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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3화 (43/120)

43화

멍청이가 멍청이에게

“그들의 공통점은 주로 알레스처럼 순수한 열정을 지닌 레이디를 노린다는 겁니다.”

그런 여자는 흔치 않으니까.

그자들은 수많은 여자를 겪어 본 만큼, 그녀가 특별하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을 거다.

그런 바람둥이들은 본래 늘 새로운 대상에 목말라하는 법.

이상형이 처음 본 여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거기다 레이디 홀로 사업까지 벌이고 있지 않나.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접근하기 얼마나 쉬울 것인가.

즉, 알레스는 그들이 노리기에 딱 좋은 먹잇감인 거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반듯한 이마와 짙고 가지런한 두 눈썹 사이를 와락 찌푸렸다.

“또 그자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통한다, 취향이 맞다, 말이 통한다는 말로 레이디를 유혹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간 알레스 앞에서 많이 부드러워졌던 공작의 말투가 다시금 건조해졌다.

“그들은 즐겨 말하지요. 마음의 교류를 원한다, 당신의 멋진 생각에 반했다. 다 함정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해진 공작을 보며 알레스는 눈을 깜빡였다.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푸른 불꽃의 분노?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도덕책 공작답게 정의 구현을 하려는 듯했다.

세상을 상대로, 특히 부유한 귀족들을 상대로 거하게 사기를 치겠다는 포부를 키워 온 알레스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이 이상했다.

갑자기 <빌보아 차트>에 나타난 거도 이상하고, 느닷없이 친오빠 운운하는 거도 수상하고, 여기까지 와서 나쁜 남자 감별법을 출장 강의하는 거도 당황스럽고.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가장 이상한 건 그의 눈빛이었다.

저게 공작이 구구절절 주장하는 여동생을 걱정하는 친오빠의 눈빛인가?

왠지… 공작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유해한 남자들보다 그의 눈빛이 더 심장에 안 좋을 거 같았다.

“저, 정말로 말이나 생각이 잘 통해서 편한 친구나 동업자로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꼭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도?”

알레스가 변명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공작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알레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뭔가 검은 속내를 들킨 거 같아 알레스는 움찔했다.

공작의 입술이 너무 도톰하기도 했고.

“알레스… 그러기엔 당신이 너무 매력적인 레이디란 게 문젭니다. 무례하기도 하고 어쩌면 오해 사기 딱 좋은 말이지만….”

공작이 주저하며 말했다.

“당신이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 같아서. 적어도 친오빠 격인 나는 얘기해 줘야 하지 않나 싶어서….”

이미 친오빠 확정인 겁니까?

“알레스는 이성이 많이 따르는 타입입니다.”

“…….”

“물론 알레스가 일부러 그런다는 게 아닙니다. 알레스가 지닌 고귀한 향기가 벌들의 본능을 자극한다는 그런 얘깁니다.”

알레스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작은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줄 알까.

이성이 따르는 타입, 살다 살다 저런 소린 처음 듣는다.

저쪽 세상 양자강은 물론이고, 이쪽 세상 알레스도 마찬가지.

이쪽저쪽 차원을 통틀어 남자들한테 인기 없는 걸로 유명한 나인데!

공작의 사리분별에 큰 결함이 생긴 게 분명했다.

친오빠 운운하더니 벌써 동생바보라도 된 겁니까?

아하, 이성이 막 꼬이는 타입이라 황태자와 대공의 폭탄 돌리기에 폭탄으로 낙점됐답니까?

이성에게 인기가 많아서 결혼 이틀 만에 그리 소박을 맞는답니까?

아무리 스스로 이혼을 골랐다 해도.

그걸 제대로 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이혼이든 후궁이든 뭘 골라도 기다리는 현실은 사회적 소박일 따름이다.

“미안합니다. 너무 갑자기 충격적인 얘길 꺼냈군요.”

굳어 버린 알레스의 안색을 살피며 공작이 걱정스레 말했다.

네, 당신의 허당기가 충격적이긴 합니다.

어쩜 그렇게 헛다리를 심하게 짚을 수 있나요.

“아니요, 충격이라기보다 제가 아는 사실과 많이 다른 거 같아서요.”

“그럴 겁니다. 혼란스러우실 테죠. 하지만 자신을 탓하진 마십시오.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마시고요.

자신을 탓하고 반성하는 건 공작님 같은 사람 얘기죠.

난 아예 잘못이란 걸 안 한다고요. 잘못은 다 남이나 세상이 하죠.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 게 나거든요.

“친오빠처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에요. 착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요.”

알레스가 말했지만 공작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주가 전략을 바꿨나?

차트에 올라가게 해 주는 대신 냉철한 판단력을 가져가 버린 거 같았다.

“정말이에요. 저는 어떻게 하면 돈 벌까, 그 궁리밖에 없다고요.”

알레스가 자신의 속물성을 알아 달라고 호소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저런 맑은 시선은!

공작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황제의 연회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구했죠. 그것도 다른 귀족들은 하찮게 다루기 쉬운 고용인을요.”

알레스는 멍하니 공작을 바라봤다.

그게 아닌데….

빠…앙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좀.

“또 누구보다 황제를 피하고 싶을 입장일 텐데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간언했지요.”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

그게 아니라, 전부 다 식탐 때문에, 천타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간 건데….

“그건 그냥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워서…. 제가 그런 건 또 두고 보지 못하거든요. 음식 남기는 건 크나큰 죄악이라고 생각해요.”

“쑥스러워하지 말아요.”

아니라니까!

“그, 그래요. 제가 폐하께 힌트를 드리긴 했죠. 하지만 결단은 폐하께서 내리신 거죠. 음식 나눔장 이름도 ‘황제의 은혜로운 식탁’이잖아요.”

“알레스, 사람들이 모를 거 같습니까? 아무리 간판을 그렇게 내건다 해도 다 압니다.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전하가 과대평가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지난번 궁금해서 나눔장에 슬쩍 갔다가 내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백성들이 당신을 칭송하는 걸.”

“…….”

실토를 하면 할수록 겸손한 사람이 되고 마는 사태 앞에 알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빵에 눈이 돌아서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고 공작에게 말하지 못할 거도 없었다.

빵빠죄아! 빵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빵 사랑 앞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다만 말한다 해도 공작이 믿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아니, 공작 아니라 누구라도 못 믿을 테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공작 눈엔 정의와 공익의 아이콘만이 보이는 거 같았다.

정말 답답하고 기가 찬 노릇이었다.

“알레스, 세상은 매정하고 당신은 너무 다정합니다. 그래서 난 걱정이 됩니다.”

놀라서 얼이 빠진 알레스를 보며 공작은 마음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페레티 가문의 내력을 생각하면….

사람이 마냥 좋아서, 순진해서, 계산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덮어놓고 믿어서 가문이 몰락 직전까지 가지 않았는가.

알레스 역시 페레티가의 핏줄답게 세상물정 모르고 모든 걸 좋게만 봤다.

마음이 아프지만 약간의 충격 요법이 필요한지도.

물론 페레티가에 대대로 내려온 선량함 덕에 자신도 큰 은혜를 입었다.

그 탓에 페레티가는 큰 타격을 입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알레스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그것이 우선이다.

“알겠어요. 그 점이 걱정돼서 여기까지 오신 거군요.”

밤이 깊었다.

결국 알레스는 공작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저렇게까지 착하게 봐주는데 성의를 너무 내치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이 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이쯤에서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잠시라도 재우자.

“그러니까… 공작님 마음은 친오빠 마음! 명심하겠습니다.”

알레스는 이렇게 말하며 공작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작 그 초록별 같은 두 눈과 마주한 공작은 당황했다.

알레스는 그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친오빠가 순진한 여동생이 염려돼 단속 좀 하러 왔다.’

분명 자신이 여태 우긴 내용이 맞긴 한데, 왜 이리 듣기 거북한지.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올린 핑계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쓴소리였지만, 정말 그랬나?

진실로 그런 이유뿐인가?

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기 안에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게, 아무래도 사춘기 소년이 또 장난을 치는 거 같았다.

‘아니오, 농담입니다. 실은 질투에 눈이 뒤집혀서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왔습니다.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여동생은 무슨. 완전 여자로 보입니다.’

사춘기 소년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공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재잘거렸다.

공작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점점 멍청이가 돼 가는 건가.

왜 자꾸 돼먹지 않은 어설픈 계략을 꾸미려 드는 건가.

알레스 말대로 정말 저주를 받아 몹쓸 인간이 됐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이 열심히 혼란의 구덩이를 구르는 동안, 알레스는 마사를 불러 방이 준비됐는지 확인했다.

마사와 밤비 경이 이미 손님방을 싹 치워 놓았다.

“날이 밝기까지 아직 시간이 좀 있어요. 오늘은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가세요.”

방으로 안내된 공작은 잠이 올 거 같지 않았다.

굉장히 부끄럽고 실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은 겉옷도 벗지 않고 대충 침대에 몸을 눕혔다.

사람이라면 이런 찜찜한 마음으로 잠이 올 리가 없지….

그는 이내 곯아떨어졌다.

한편 알레스는 침대에 누워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떨떨한 나머지 놓친 것들이 많았다.

공작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그제야 차분히 되돌아보았다.

원래 평범치 않은 면이 많은 그였지만, 오늘따라 더욱 이상했다.

말도 앞뒤가 안 맞는 거 같고.

태도도 어딘지 좀 부자연스럽고.

‘이건 아무래도 그거지? 맞아, 그거야….’

알레스는 누운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심을 숨기고 딴소리를 하면 부자연스럽게 마련이라고… 언젠가 황제가 그랬지.

공작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을 테지.

그런데 대놓고 말하기 어려웠을 거고.

속마음을 숨기고 여동생 같다느니 착해서 걱정이라느니, 심지어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라느니 하고 돌려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공작이 정작 하고 싶었을 말은 아마도….

“멍청이.”

알레스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설픈 애가 사업을 한다니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가만있을 수 없었겠지.

물론 모른 척해도 됐겠지만, 동방에서 온 스승에게 배워서인지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니까.

오래된, 흡사 태곳적 일인 양 아득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멍청아.

그가 말했다.

생김새가 공작과 매우 닮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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