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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2화 (42/120)

42화

내가 니 올애비다

걱정?

뭐가 걱정이기에 거기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건가요?

“차트에 갑자기 등장한 일 때문에 그러세요?”

알레스가 응접실로 안내하며 묻자 메르세데스 공작은 또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도리어 알레스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네?”

“차트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니, 나 좋자고 하는 일인가.

공작님이랑 영지를 알리려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차트에 오르셨지 뭐예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아직 누군가와 긴밀하게 손발을 맞추신 건 아니군요.”

“손발요? 뭐…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봐요. 차트에 오르셨으니 이 기세를 몰아 조금만 작업을 하면 순위가 쭉쭉 올라갈 거 같아요.”

알레스가 의욕적으로 말하자 공작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순위에 든 것도 작업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살짝만 바람을 넣어 주면 불길이 더 쉽게 더 빨리 번질 거란 말씀이죠.”

“알려질 만하면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을까요? 나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까?”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모든 건 당연히 전하한테서 비롯되는 겁니다.”

알레스는 아차 싶었다.

너무 올곧은 분이라 기본적인 언론플레이마저도 정직하지 못한 수법이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보고하지 않고 몰래 하는 건데.

“없는 걸 억지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고요, 전하의 진면모를 알리려는 것뿐이에요. 사람들도 뭘 알아야 좋아하든 말든 할 거 아니겠어요?”

알레스의 해명에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내 진면모를 알려면 나와 긴밀하게 손발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예? 그렇…지요.”

아까부터 왜 자꾸 손발손발 하는 거야?

“그렇게 먼저 나와 긴밀하게 손발을 맞추고, 거기에 당신의 기지를 조금만 더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처음부터 순위 따위는 어떻게 돼도 좋았다.

그저 알레스와 가까이 지낼 구실이 필요했다.

알레스의 크고 작은 선택이나 행보에 슬쩍 참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필요했다.

행여 그녀가 최악의 선택을 하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누군가 그녀를 해치려 하면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공작은 생각했다.

알레스와 맺은 매니지먼트 계약은 그에게 그 정도 의미였다.

<빌보아 차트> 순위가 미칠 영향 같은 건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알레스가 자신을 알리는 일에 너무 몰두하는 게 아닌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의욕을 활활 불태우며 자신뿐만 아니라 영지까지 알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갖 늑대 같은 녀석들까지 알레스 주변에 꼬이기 시작했다.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려 했다.

어쩌면 일이 아니라 자신이 변한 걸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이래저래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그만 <빌보아 차트>에 올라 버리고 말았다.

알레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차트에 오르는 거쯤은 별것 아니란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과시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서 결국 자신답지 않은 짓을 벌이고 말았다.

경솔한 행동을 한 걸 곧바로 후회했지만.

“좋아요. 전하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신다면야 사실 가장 바람직하긴 하죠. 잘되면 기자들이야 절로 따라붙을 거고요.”

“…해 보겠습니다.”

“이야, 다음번엔 몇 위까지 올라갈까요? 50위 안에 들 수 있으려나?”

“…….”

“그게 걱정되셨어요? 그 말씀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메르세데스 성에도 통신구 하나 놓으시는 게 어때요? 요즘 다들 하나씩 있다는데.”

물론 차트 때문이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길을 나섰는데, 오는 동안 생각해 보니 스스로도 한심했다.

자신은 알레스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훈계를 늘어놓으려고 달려가고 있었다.

잔소리를 하려고 득달같이 달려가다니, 제정신인가.

꼭 질투에 사로잡힌 수탉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자꾸만 무모한 짓을 벌이는 거지?’

공작은 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레스는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레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차분한 성찰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그거였어.’

답을 구한 공작은 비로소 안도하며 웃었다.

“차트 때문이 아닙니다.”

공작은 자신의 진심을 알레스에게 조심스레 전하자고 마음먹었다.

“네? 다른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알레스 당신이요.”

“……?”

“당신이 보낸 서신과 사업에 대한 기사를 보고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왜요? 제가 일을 망칠까 봐서요?”

“그게 아니라… 사업을 핑계로 당신 곁에 불순한 자들이 들러붙는 거 같아서 너무 걱정이 됩니다.”

엉뚱생뚱한 소리에 알레스는 얼떨떨하면서도 자꾸만 착각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애틋했다.

왜 주책맞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아무래도 나는 당신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고백 타임?

“아니,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직진?

“이런 말 당황스럽겠지만, 나는 당신을….”

잠, 잠깐만요, 공작 씨!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친여동생으로 여기는 거 같습니다.”

뚜둥.

“자꾸만 친오빠의 눈으로 당신을 보게 됩니다.”

파삭, 떼구루루루….

“네, 압니다. 황당하고 무례한 소리라는 거.”

공작은 얼굴을 붉히며 알레스의 안색을 살폈다.

“성숙한 레이디께 이런 말은 분명 실례일 테지요.”

“…….”

“하지만 그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당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철부지 여동생을 걱정하듯이.”

“…….”

“아, 철이 없기는커녕 남달리 기지와 능력이 뛰어난 분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작이 열심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간섭하고 싶어지는 건 역시 내가 친오빠 마음이어서….”

하긴 공작이 알레스보다 다섯 살 많으니 나이로도 오빠는 오빠다.

물론 저쪽 세상 악녀 양자강과 비교하면 반대로 공작이 여섯 살 어리지만.

내가 모르는 나.

알레스는 자신이 공작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걱정돼서 못 살겠고 간섭하고 싶어 못 견디겠는 마음은 오빠 마음밖에 없나요?

진정 그거밖에 없어요? 네?

“형제 없이 적적하게 자라서 그런지, 알레스를 보며 그런 마음을 품게 됐나 봅니다. 동생이라곤 눈고양이 동생밖에 없었거든요.”

그짓말. 걸출한 여동생이 있잖아요.

“로잘린 황녀님은요.”

허탈함에 할 말을 잃었던 알레스는 뻣뻣한 턱관절을 겨우 움직여 내뱉었다.

여동생계의 거물 로잘린 황녀는 어쩔 거냐고?

아, 로잘린은 이제 동생 아니고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인가.

“로잘린은… 친구 동생이죠.”

공작이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알레스는 친동생이고.”

아니, 이 오빠가?

아주 큰일 날 오빠일세.

양다리, 아니 문어다리 오빠가 되려고 저러시나.

물론 알레스도 양자강도 외롭게 자란 아이들이었다.

저렇게 잘생기고 힘세고 지체 높고 능력 있고 다정한 톱클래스 오빠가 생긴다면 좋아서 방방 뛰겠지?

알레스는 잠시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 거다.

잘난 오빠를 둔 여동생 대접을 톡톡히 받았겠지.

사교계에서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할 테고, 오히려 오빠를 사모하는 영애들이 이 동생님의 마음에 들려고 줄지어 아양을 떨었겠지.

로잘린 황녀는 미래의 시누이를 살뜰히도 챙겼을 테고.

하지만 문제는 진짜 친오빠가 아니라는 거.

친오빠 마인드만 갖춘 먼 오빠라는 거.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극진한 대접은커녕 극한 괴롭힘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친구도 아니고 친오빠라니….”

“어렸을 때 봐서 그럴까요. 자꾸만 생각이 그렇게 흐릅니다. 실제로 내가 다섯 살 연상이기도 하고요.”

“누가 그러던데, 남녀 사이엔 한두 살 차이는 말할 거도 없고 서너 살 차이도 별거 아니라고….”

“어떤 음험한 자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혹시 그런 말을 하면서 나이가 매우 많은 자가 접근해 왔습니까?”

음험한 대왕 오징어가요.

공작은 자세를 고쳐 앉더니 근엄한 얼굴로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내가 여기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오빠 커밍아웃을 하더니, 공작은 이제 맘 놓고 오빠 놀이에 발동을 거는 듯했다.

“알레스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듯하더군요.”

제가요? 설마요.

머리 검은 짐승은 절대 믿지 말자는 주의인데.

속인 자가 아니라 믿은 자가 잘못이다.

이게 내 삶의 지침인데.

“물론 알레스 잘못이 아닙니다. 알레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려 드는 자들이 나쁜 거지.”

예? 지금 저한테 하는 소립니까?

“알레스 눈엔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보일 거예요. 모든 말이나 행동이 호의로 느껴질 테고, 사심 없는 친절로 여겨질 테죠.”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아 참, 알레스 이 아가씨의 본체가 착했다고 했나?

공작은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말이죠, 알레스가 생각하는 거처럼 그렇게 담백하지만은 않습니다. 나쁘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복잡한 건 장담합니다. 알레스가 상처 받을까 봐 걱정돼요.”

저기요, 눈사람 공작님?

지금 본인 얘기 하시는 겁니까?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공작의 말에 알레스는 민망해졌다.

분명 생뚱맞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자신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고.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눈을 순수해 보이게 뜨려고 애쓰는 건 뭐람?

눈망울이 울망울망하니 여려 보이려고 애쓰는 건 뭐란 말인가.

마치 공작의 말이 주문이 된 거 같았다.

“전하, 저도 다 알고 있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공작이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특히 남자가 친절을 베풀 때는 의심해야 합니다. 남자라는 동물은 결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지 않거든요. 반드시 흑심이 있을 겁니다.”

공작이 힘주어 말했다.

알레스는 공작을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남자의 호의 자체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적의와 뒤통수는 많이 접수해 봤습니다.

공작은 알레스의 반응엔 아랑곳없이 의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심해야 할 자는 번드르르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아무한테나 눈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퇴폐적인 자!”

어? 왜 누군가가 떠오르려고 하지?

“그리고 번드르르한 말로 사람을 홀리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

이번에도 누군가가 슬며시 떠오르려고 하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 아는 남자의 느낌.

공작은 심해같이 깊고 푸른 눈에 근심의 빛을 담고 알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걱정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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