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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1화 (41/120)

41화

보이지 않는 손이 너무 많아

“누구 맘대로 그런 결례를 범한다는 말씀인지.”

밤비 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지체 높은 귀부인이라도 레이디를 모욕한다면 이 밤비가 참지 않을 겁니다.”

밤비 경의 서슬 퍼런 경고에 다들 조용히 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호위 기사가 여자라는 점이 매우 유리했다.

시녀로 위장해 연회나 티파티에 함께 참석할 수 있잖아?

상대방이 차나 술을 끼얹으려 하거나 분노의 스테이크 싸다구를 날리려고 들 때 재빨리 막아줄 수도 있고.

그나저나 밤비 경이 드레스 입은 모습이라….

알레스는 눈앞에서 찬바람을 쌩쌩 날리고 서 있는 밤비 경에게 상상의 드레스를 가만히 입혀 보았다.

상상은 입틀막을 불러왔다.

무척 단아하고 예쁠 것 같잖아!

페레티 상단의 럭셔리 담당답게 사교계 패션리더로 급부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저리 싸늘한 얼굴로 너구리고 두꺼비고 단칼에 베어 버릴 기세다.

혼자만의 상상에서 빠져나온 알레스가 자신의 호위 기사를 만류했다.

“진정해요, 밤비 경. 내 성격 알잖아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나도 가만있진 않을 테니. 나야 잃을 것도 없잖아요?”

주군과 기사가 사악한 미소를 교환했다.

로잘린은 어이없는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평소 황녀인 자신조차 냉랭하게 대해 온 저 호위 기사라면 너구리 3인방에게도 못할 짓이 없을 거 같았다.

사실 이 집 유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다들 멀쩡한 얼굴로 한가락씩 하는 언니들이었다.

이 집 생긴 모양새부터가 희한한 게, 터가 매우 세 보이더니.

알레스는 굳어 있는 로잘린에게 물었다.

“그 너구리 3인방은 어떤 분들인가요? 작위만 들어서는 연배도 꽤 있을 거 같은데, 어째서 저 같은 애송이를 상대하려 하시는지?”

스노브 후작부인은 그 인상 나쁘고 심술궂은 귀족 영감의 마누라인 거 같고, 나머지 둘은 이름부터 생소하다.

“원래 욕심 사납고 음흉하기로 소문난 이들이라 자기들끼리도 경계하던 사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한편이 됐더라고요.”

서로 경계하던 이들이 의기투합했단 말이지….

공동의 표적이 나타났고, 그 표적이 나란 얘긴데.

“제가 고상한 부인들 눈에 차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잡도리를 당해야 할 만큼 뭘 하진 않았는데 말이죠.”

아니, 뭘 더 했어야 했나?

아예 상종하고 싶지 않게 머리라도 풀고 뛰어다녔어야 했나?

귀족 사회의 틈새에 몸을 묻고 돈이나 따박따박 벌며 조용히 살려 했건만.

사교계가 사람을 가만두질 않는구나, 아흐!

로잘린 황녀는 너구리 3인방에 대해 소개했다.

“모넬라 대부인은 선황의 비이자 승하한 황태자의 생모예요. 내 의붓어머니죠.”

어이쿠야.

황태후 자리를 바로 눈앞에 두고 떨려났으니, 독이 바짝 올랐을 만도 하다.

3황자의 반란으로 가장 크게 몰락한 사람 중 하나일 테니까.

하지만 알레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황후나 황비도 아니고, 이혼하고 후궁 자리마저 박차고 나온 마당인데 왜 엉뚱한 데다 화풀이야?

오히려 따지고 싶은 건 알레스였다.

그 망할 황태자가 아가판투스와 억지로 엮는 바람에 인생이 이토록 꼬이지 않았는가.

졸지에 이혼녀 되고, 황태자파로 낙인 찍혀 불이익을 당하고.

중매를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는데.

뺨을 맞아야 할 뚜쟁이가 뺨을 때리려 들다니,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편을 가른다면 모넬라 대부인은 자신과 한편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둘 다 황제에게 적대적인 입장이니 말이다.

자기편으로 포섭해도 모자랄 판에 손을 봐주겠다며 별러?

알레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다.

아무리 봐도 이 페레티가의 영애를 처음부터 그냥 싫어했던 게 분명하다.

매우 싫어하는 영애를 매우 싫어하는 3황자와 엮어서 1타2피로 한방에 보내 버리고 싶었던 거다.

뜻대로 되기는커녕 자신들이 당하자 알레스에게 화풀이하는 거 같았다.

황제에게 대들 순 없을 테니.

“네슬라 공작가는 황후 자리를 노리는 가문이에요. 황실의 판도가 뒤집힌 틈을 타 주도권을 잡으려는 거죠. 지금의 혼란기가 어떤 이들에겐 기회래요.”

가지가지 한다.

이것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

아니, 마나님들, 나 황제랑 이혼하고 황실에서 나왔다구요.

궁중암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대체 왜 거슬려 하는 거죠?

그리고 황제와 혼인을 흥정한다는 면에서 자신과 네슬라 공녀가 뭐가 다르냔 말이다.

모넬라 대부인은 자기네가 중매까지 선 페레티가 영애는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 어떻게 네슬라 공작가에 붙을 수가 있지?

생각하니까 열 받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황제와 계약 맺은 걸 알면 난리도 아니겠군. 계약 때문에 궁에라도 들락거리면 아주 불을 뿜겠어.’

알레스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찍히느니 뭐라도 하고 찍히는 게 덜 억울하지.

제대로 염장을 질러 줄까 보다.

물론 황제를 떠올리고는 곧장 의욕이 사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자꾸 건드리면 어떻게 엇나갈지 모른다고.

“스노브 후작은 선황 때부터 황제의 딸랑이로 불리던 황제파의 핵심 인사예요. 모넬라 대부인과 네슬라 공작부인도 스노브 가문 출신이고.”

아하, 세 너구리에게 그런 연결고리가 있었군.

하지만 왜 영양가도 없는 이혼녀 페레티를 물고 뜯으려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왕따에 이유 없는 건가? 그냥 만만해서?

그동안 억눌러 왔던 쌈닭 본능이 너구리 3인방 때문에 자꾸만 깨어나려 했다.

직장생활 할 땐 못해도 석 달에 한 판은 떴던지라 안 그래도 좀이 쑤시던 차였다.

성질 같아선 개운하게 한판 뜨고 싶지만.

사교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들과 척을 지면 여러 모로 피곤해질 게 뻔하고 사업에도 타격을 입을 거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느라 돈 버리고 시간 버릴 테고.

지금부터 귀족들을 열심히 구워삶아도 모자랄 판에 그럴 순 없지.

좋아, 그렇다면!

알레스는 대처 방안을 세웠다.

첫째,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

사교계 출입을 삼가고, 너구리 3인방과 마주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죽어라 도망 다니며 따돌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둘째, 아부와 아첨으로 무장한다.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운 없게 맞닥뜨린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고 아부를 떠는 수밖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달콤한 말로 비위 맞추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사교계 왕언니들에게 사탕발림을 잔뜩 해서 예쁨 받는 거다.

잘하면 씀씀이가 웅장한 대형 고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셋째, 이도 저도 안 통하면 그때는 머리채를 잡는다.

최대한 천박하고 지저분하게 싸운다.

일단 싸우면 무조건 이길 것.

“황녀님, 고마워요.”

“응? 뭐가요?”

“광고 모델 수락해 주신 거요. 사교계 거물들이 저렇게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 같아요.”

“아, 난 또 뭐라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요. 저랑 엮여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잖아요.”

“어차피 그들보다 내가 더 거물이에요.”

“…….”

“카르티에 공작 전하도 그렇고요. 그러니 우리 걱정은 말아요.”

그렇군요.

나만 동네북이라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고 다니는군요.

하지만 알레스는 알고 있었다.

카르티에 공작이나 로잘린 황녀야말로 이런 일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걸.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걸 감수하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 준 게 새삼 고마웠다.

그동안 전혀 몰랐던 사교계 동정을 알고 나니 더욱 그랬다.

사실 두 사람 다 세간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걸 즐기는 타입이라 광고 제의도 받아들인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겠지만.

‘사교계 너구리들이 어쩌고 있든, 지금은 공유 마차 개업에 집중할 때야.’

알레스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닥치면 3단계 대응 매뉴얼대로 하면 되고.

피하고 아첨하고 안 통하면 꼴사납게 싸운다.

좋았어.

“그러니까 언닌 남 걱정 말고 공유 마차 사업에나 전념하세요.”

오케이, 알았어.

“카이트 오라버니를 띄우니 어쩌니 하는 건 잠시 잊고요.”

응? 잠깐. 진짜 잊고 있었잖아.

메르세데스 공작이 <빌보아 차트>에 갑자기 등장한 바람에 로잘린 황녀가 득달같이 달려온 거였지.

알레스 역시 이유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로잘린이 뭘 좀 알지 않을까 해서 슬쩍 떠보려 했는데.

남들은 모르는 공작의 사적인 모습이나 일상 습관도 꿰고 있는 사생팬이니까.

게다가 저주도 비켜간 예외 중 하나잖아.

“난 언니가 손을 쓴 건 줄 알았거든요. 언니가 아니면 혹시 브린이 손을 썼나? 책 팔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로잘린도 모르는 듯했다.

“이 인간, 가만 안 두겠어.”

새로운 제물을 찾은 황녀는 느닷없이 왔던 거처럼 느닷없이 떠났다.

* * *

참모진과 저녁식사 후 알레스는 그대로 식탁에 남았다.

종이 위에 눈사람을 쓱쓱 그리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오후엔 마부 연습생들을 보고 왔다.

‘윽, 눈부셔!’

소로 씨네 사 형제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눈이 보배라고, 알레스가 떡잎을 정확히 알아봤다.

원래부터 타고난 미남들이긴 했지만, 거기에 때 빼고 광내고 품위 있는 애티튜드마저 익혔더니 대단한 매력남들로 거듭나 있었다.

알바의 미모가 매출을 좌우한다는 걸 아는 사장은 다 안다.

지금은 일단 F4 마부지만 앞으로 활약할 무대는 무궁무진했다.

알레스로서는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제국의 아이돌을 나, 이 사람이 발굴하고 키웠습니다.

ATS, 알탄소년단의 미래를 그려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귀족이 아니라서 <빌보아 차트>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돈 벌면 나중에 내가 하나 만들지 뭐.

귀족, 평민, 남녀 가리지 않는 인기 차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알레스는 결심했다.

혼자 얼굴을 붉힌 채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마사가 기척을 냈다.

“저, 아가씨….”

고개를 들어 보니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사 옆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훤칠한 남자.

메르세데스 공작!

“오늘은 어쩐 일로…. 참, 안 그래도 기별을 넣으려던 참이었어요. <빌보아 차트> 소식은 들으셨나요?”

공작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알레스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군요.”

“네?”

“알레스의 얼굴이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아, 뭐 그렇죠. 공유 마차 개업 준비도 순조롭게 돼가고….”

꽃미남 형제를 생각하니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네요, 제가.

그런데 오늘은 또 뭣 때문에 그 멀리서 여기까지 오신 거죠?

어째 공작은 기분이 별로인 듯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 걱정이 돼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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