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교계 무서운 언니들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메르세데스 공작령.
접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고 겨울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곳.
그 탓에 다른 지역과 왕래가 드문 미지의 땅.
바로 그곳에서 전투를 지휘하느라 공작은 외부로 나온 적이 없는데?
근래 딱히 사교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이름이 <빌보아 차트>에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제도에 몇 차례 몰래 오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이고 즉흥적인 일탈이었다.
보는 눈이 없는 야심한 밤과 새벽에 이루어진 데다 알레스 한정이었는데….
“마사, 우리가 뭘 했던가?”
“아직요. 이런저런 계획만 잔뜩 세웠지, 실행에 옮긴 건 없는데요.”
맞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 공작과 영지를 알리기 위해 플랜 ABCD를 준비했지만 아직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저절로 차트에 등장하디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것도 진입하자마자 100위 중 77위라니. 이유가 뭘까요? 책 때문일까요?”
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유일한 대외 활동이 저술이긴 한데….
최근 책 제목을 요상하게 바꾸긴 했더라만, 그렇다고 책 때문은 아닐 거 같았다.
차트를 훑어보니 여전히 1위는 카르티에 공작, 2위는 아가판투스 황제였다.
그 외 순위도 대동소이했다.
가장 큰 이변이라면 역시 메르세데스 공작의 등장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절로 인기가 높아지다니.
혹시 저주의 시효가 끝난 걸까?
그렇다면 매우 싱거운 저주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도 서둘러야겠는 걸?”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를 알리는 일 말인가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않겠어? 이유가 뭔진 몰라도 분위기 탔을 때 치고 나가야지.”
“저어,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응?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닙니다.”
마사가 주저하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지? 뭔가를 걱정하는 눈치인데?
공유 마차 개업을 앞두고 다른 일까지 벌이는 게 걱정돼서 그러나?
“마사, 공유 마차 신문 광고 오늘부터지? 기사빨 가라앉기 전에 얼른 내보내야 할 텐데.”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아가씨께 광고 보여 드린다는 게 그만. <빌보아 차트> 때문에 홀랑 잊고 있었네요.”
마사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엠파이어 타임스>를 알레스에게 건넸다.
“카르티에 공작 전하는 정말! 제도가 또 한 번 들썩이겠어요.”
언제 걱정했냐는 듯 마사가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광고면을 펼치니 역시나 카르티에 공작의 얼굴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알레스가 제안한 광고인 일명 ‘공유, 너와 함께 달린 모든 날이 좋았다.’ 시리즈였다.
‘날’을 강조한 ‘날날날’ 광고 카피 아래 카르티에 공작이 요염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당장 공유 마차를 잡아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붉은 물보라의 매혹’이었다.
“크으, 탁월한 선택이었어. 카르티에 공작을 모델로 내세운 건.”
알레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신문 광고는 남녀 인기인 버전을 준비했다.
남자 모델로는 카르티에 공작을, 여자 모델로는 로잘린 황녀를 섭외했다.
알레스의 인맥을 닥닥 긁은 결과였다.
내일은 로잘린 버전이 이어서 나갈 예정이다.
전면광고인 데다 영상 마도구까지 동원해 촬영하느라 제작비, 광고비를 꽤 쏟아부어야 했다.
덕분에 귀족 영애들이 결혼할 때 받는다는 귀금속 3~5세트 중 일부를 팔았다.
그래도 알레스는 대공씩이나 되는 작자와 결혼했던 터라 귀족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인 5세트를 받았다.
황후나 황비는 7세트를 받을 수 있다나.
여하튼 알레스는 5세트 중 사파이어와 루비 세트를 팔아서 광고비를 충당했다.
카르티에와 로잘린의 모델료는 공유 마차 평생 무료승차권과 부대 서비스 무료이용권으로 퉁쳤다.
기사는 사업 진척에 따라 5차 보도까지 준비하는 걸로 스토커 남작과 대략 상의해 두었다.
* * *
“언니! 알레스 언니! 이거 봤어요?”
로잘린 황녀.
황궁을 나온 후 어째 더 자주 보고 있었다.
처음엔 ‘더 코스모스’ 같은 커피하우스에서 조심스럽게 만났다.
그러다 점점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를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주 제집인 양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잖아!
황제의 전처, 즉 오빠와 이혼한 새언니라면 좀 껄끄럽고 주저돼야 하는 거 아닌가.
불편해하기는커녕 눌러앉아 저녁까지 먹는 걸로도 모자라 걸핏하면 자고 간다고 해서 억지로 등을 떠밀어야 했다.
극진한 보살핌 속에 부족함 없이 자란 황녀답게 어쩜 그리 구김살이라곤 없는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황녀의 손에서도 <빌보아 차트>가 펄럭이고 있었다.
“카이트 오라버니가 왜 여기서 나와요? 언니가 뭘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럼 어째서 차트에 나오고 난리야!”
메르세데스 공작의 순위권 진입이 로잘린은 전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녀님은 기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기뻐요? 이 언니가 증말! 당연히 기쁠 이유가 없죠!”
“아니 왜요? 공작 전하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인데. 좋아하는 사람이 잘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게 팬심 아니겠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혼자 좋아하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들이야 그렇죠. 언니처럼 비즈니스 관계이거나.”
로잘린이 답답함 반, 안도감 반인 심정으로 말했다.
“나야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이 될 사람인데, 내 남자 얼굴 팔리는 게 뭐가 좋겠어요?”
문가에 서 있던 밤비 경이 로잘린을 조용히 노려봤다.
로잘린은 입버릇처럼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이란 말을 들먹였다.
그건 밤비가 레이디 페레티에게 공작부인의 칭호를 슬쩍 갖다 붙이려는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밤비는 밤톨 같은 경쟁자를 서늘한 눈길로 훑었다.
다시 봐도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이 될 재목은 아니었다.
겨울만 돼도 춥다고 엄살에 엄살을 떨며 제도로 돌아가겠다고 할 게 뻔했다.
저런 철딱서니로 영지민 시집살이를 견뎌낼 거 같지도 않고.
고부 갈등이 깊어질 게 뻔했다.
“차트에 올라봤자 음흉한 사교계 너구리들이나 군침을 흘리겠죠. 얼마나 치근덕거릴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로잘린은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황녀님,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득이 있으니 서로 차트에 오르려고 애쓰는 거 아니겠어요?”
“흥, 그까짓 이득.”
금수저 로잘린에겐 와 닿지 않는 말인 듯했다.
알레스가 매니지먼트사 대표 모드로 설명에 들어갔다.
“카르티에 공작 전하를 보세요. 자신의 인기를 사업에 십분 활용하잖아요. 심지어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도 순위 작업을 하실걸요?”
“카르티에야 약삭빠른 여우고 폐하는 못 말리는 사이코, 아니 냉혈한이니 괜찮다고요.”
그들이 인기가 있든 말든 나랑은 딱히 상관도 없고.
하지만 카이트 오라버니는 내 반려가 될 분인데, 남의 손 타서 좋을 게 뭐 있겠어?
“카이트 오라버니는 순하고 점잖은 분이라 사교계 능구렁이들이 마수를 뻗쳐 오면 어찌할 바를 몰라 진땀을 흘릴 게 뻔하다고요!”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던데요.”
“응? 언니, 뭐 아는 거 있어요?”
로잘린이 눈을 번뜩였다.
“그렇게 심약한 분은 아닐 거 같다고요. 무엇보다 험한 전투를 이끄는 분이잖아요.”
그리고 레이디들의 목덜미를 아무렇지 않게 턱턱 잡아채는 무지막지한 분이고요.
밤새 달려서 제도 찍고 새벽같이 전장으로 출근하는 무모한 분이고요.
말 달리기 좋은 밤이라며 스승의 적토마를 여기까지 끌고 올 만큼 막 나가는 분이고요.
서재에 틀어박혀 글 쓰고 공부만 하는 책벌레인 줄 알았더니 주로 몸으로 때우는 그런 분입디다.
메르세데스 공작에 대해 떠올리던 알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싯 웃을 뻔했다.
로잘린 황녀의 살벌한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렸지만.
“언니, 사교계 암투를 무시하면 안 돼요. 거기도 전장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차라리 진짜 전장이 더 깨끗할걸요?”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요. 전장에서 죽은 사람보다 사교계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대요.”
“그건 좀….”
하긴 사교계 암투나 진짜 전투나 본질은 권력 싸움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꼭 과장된 얘기만은 아닐 수도.
지극히 이기적이고 하찮은 욕심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카이트 오라버니가 전투에 능하다고 해서 사교계 암투에도 능하다고 생각했다간 큰코다친다고요.”
일리 있는 말이다.
반대로 어쩌면 카르티에는 이 방면의 백전노장인지도.
하지만 그래서 나 알레스가 필요한 거지.
메르세데스 공작의 사교계 매니저.
“언니가 사교계 활동을 안 하니 모르는 거라고요.”
음, 이건 좀 문제네.
사교계 매니저가 사교계를 모른다는 거.
그래도 왕년에 홍보실에서 근무도 했고, 한류 스타 보유국에 살았고, 권언 유착에도 익숙하고, 영화 <네 부자들>도 봤고….
“여하튼 <빌보아 차트>에 오른 건 득보다 실이 많다니까요. 저는 카이트 오라버니의 고결한 모습을 지켜 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구요.”
로잘린이 계속 우겨댔다.
이보세요, 황녀님. 말은 바로 하시죠.
공작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거잖아요.
아무리 소유욕을 불태워도 다 큰 성인 남자를 언제까지고 숨길 순 없다고요.
심지어 ‘아싸의 저주’, ‘투명인간의 저주’ 같은 지독한 저주의 장막마저 뚫고 나온 마당에.
“어쨌든 우린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하지만 공작 전하가 <빌보아 차트>에 등장한 건 좋은 조짐이라고 봐요. 이참에 작업을 시작할 거고요.”
“뭐예요?”
“전하도 전하지만, 메르세데스 공작령을 알리는 데 집중할 생각이에요. 영지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알레스의 말에 로잘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곧 안주인이 될 영지를 발전시킨다는데 반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저 언니는 정말 카이트 오라버니에게 사심이 없나?
사심이 있더라도 공작부인 자리를 넘보기는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참, 언니는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네?”
“사교계 말이에요. 언니야말로 벼르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요. 너구리 3인방부터 해서….”
“왜요? 아직 아무 짓도 안 한 거 같은데? 너구리 3인방은 누군지도 모르고요.”
“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니는 이미 사교계 유명인사예요.”
이유는 대충 짐작하겠다.
“언제 한번 손봐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이도 적지 않답니다. 너구리 3인방도 그런 이들 중 하나구요.”
심심풀이 간식이나 안줏거리로 씹는 거야 그렇다 치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손봐준다고 벼르기까지?
어떻게 손봐줄 건데?
“너구리 3인방이 누군데요?”
“모넬라 대부인, 네슬라 공작부인, 스노브 후작부인이요.”
스노브 후작부인만 대충 알겠고, 나머지 둘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지위 한번 으리으리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