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마음, 종잡을 수 없는 마음
카르티에 공작이 애써 연결해 준 업계 최강자 하이에노는 일부러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알레스를 바람맞힌 거였다.
전날 그는 머스코비 매먼 스노브 후작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
스노브 후작은 선황 때 황제파의 수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갑작스런 승하와 3황자인 아가판투스의 즉위 등 황실이 혼란을 겪는 동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황태자파라는 혐의에서도 감쪽같이 빠져나갔다.
현 황제와는 아직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지만,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특히 외교에 능해서 외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그를 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국에서도 제국과 대화하기 전에 먼저 스노브 후작을 통해 분위기를 타진해 볼 정도였다.
그를 ‘본국의 친우’, ‘본국의 형제’라 부르며 살갑게 구는 나라들이 많았다.
연회는 스노브 후작에게 줄을 대고자 하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대외무역에 관심 있는 이들은 이 연회에 꼭 초대받고 싶어 안달했다.
하이에노에게 스노브 후작은 중요한 스폰서였다.
그 연회에서 레이디 페레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들은 ‘이혼녀 페레티’, ‘귀족의 수치’, ‘품위 없는 망아지’, ‘상한 조각 케이크’란 말을 거리낌 없이 썼다.
“황궁 음식 나눔장 얘기 들으셨어요? 개장일부터 눈살을 찌푸릴 만한 소동이 벌어졌답니다.”
“벌써부터 근처에 동네 불량배들이 어슬렁거린대요. 이혼녀 페레티가 그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어머 망측해라. 그러게 왜 지저분한 평민 거리에 귀족이 드나들어 망신을 당하나요. 이건 다른 귀족들의 체면까지 손상시키는 일이에요.”
“그뿐이 아닙니다.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 남자 저 남자 추파를 던지고 다닌다던데. 글쎄 평민도 가리지 않는대요.”
“그런 정신 나간 망아지에겐 평민이 어울릴지도.”
“어머 후작 각하, 레이디들 앞에서 말씀을 삼가 주세요.”
“하하, 내가 너무 흥분했군요. 황제 폐하를 생각하니 화가 나서 그만.”
“휴, 그러게요. 폐하께선 무척 관대하십니다.”
주로 그녀의 행실을 헐뜯는 얘기들이었다.
‘제길,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하이에노는 사실 카르티에 공작이 소개했을 때부터 레이디 페레티를 만나는 게 탐탁지 않았다.
황제의 눈 밖에 난 여자와 가까이해서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렇다고 가문이 빵빵하거나 인맥이 짱짱한 거도 아니고.
혈혈단신에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는 이혼녀라니.
아무리 봐도 뜯어먹을 구석이 없어 보였다.
다만 카르티에 공작이 나선 게 좀 의외였고, 공작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그런데 연회에 와서 보니 귀족 사이에서 그녀의 평판은 나쁜 정도가 아니라 왕따 수준이었다.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이야 사교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하이에노는 유독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스노브 후작이 몸소 나서 레이디 페레티를 깎아내리고 몰아간다는 점이었다.
하이에노는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스노브 후작은 그저 감정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귀족의 가치 따위를 지키기 위해 분노할 위인도 아니었고.
그는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장사꾼이었다.
그런 후작이 레이디 페레티를 비난한다면 그건 그저 싫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는 얘기.
하이에노는 자신의 촉이 시키는 대로 나쁜 패인 레이디 페레티 쪽을 버리기로 했다.
* * *
흥흥흥. 알레스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 사업 얘기를 했더니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역시 일할 때가 제일 상쾌해.
공유 마차 개업과 관련한 준비가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전 홍보, 마차 정비, 제국의 F4 교육, 간이 카페 공사, 마일리지 등 멤버십과 서비스 점검, 전용 물품 주문….
마사와 헤라클레스는 음식 나눔장 일과 간이 카페 일을 병행하면서 나눔장 쪽 비중을 점차 줄이기로 했다.
마차 튜닝과 비품 디자인은 밤비 경에게 맡겼다.
마법 통신구 업체와도 이야기를 끝냈다.
어차피 요즘 귀족들은 마법 통신구 하나씩 구비하고 있으니 단축 번호 8282를 공유 마차 호출 번호로 샀다.
알레스는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책상에 앉아 쓱쓱 눈사람을 그렸다.
그리면서 생각했다.
공유 마차를 최신 사교 클럽으로 만들고, 다른 사업 아이템들도 이곳을 통해 유행시키자고.
그 첫 번째 홍보 대상은 공작을 포함한 메르세데스 영지 전체가 되리라.
이 알레스, 고정 수입을 보장해 준 고객님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요.
생각난 김에 고객님께 드리는 보고서를 써 보기로 했다.
공사 구분은 철저히.
[공작 전하, 식사는 하셨습니까?
적토마는 잘 지내는지요?
일의 진척이 궁금하실 거 같아 몇 자 올립니다.
저는 ‘페레티 공유 마차’라고, 새로운 사업의 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하의 일을 소홀히 하려는 건 아니고요.
오히려 공유 마차를 활용해 메르세데스령을 알리는 일에 박차를 가할 계획입니다.
마침 생각이 맞고 말이 통하는 썩 괜찮은 기자를 알게 됐어요.
홍보를 위해 앞으로 그와 긴밀하게 손발을 맞출 생각이에요.
공작 전하의 이름을 <빌보아 차트>에서 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올림.]
편지를 마무리한 알레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에게 처음으로 프로다운 면모를 보인 거 같았다.
매번 어설픈 모습을 보여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그때 창밖에서 익숙한 괴성이 날아들었다.
“끼악, 끼아악!”
알레스는 편지를 봉인하며 생각했다.
‘오후 3시구나. 우편물 수거가 진작 끝나 버렸네. 좀 더 서두를걸.’
* * *
[아가판투스 1년 ○월 ○일자 <엠파이어 타임스> 1면
“함께할 때가 됐죠. 요즘 2세 생각을 많이 합니다.”
-공유 마차의 매력에 푹 빠진 카르티에 공작
공유 마차를 아는가. 안다면 당신은 제국의 트렌드 리더!
기존의 대여 마차에 미래지향적 가치와 격조 높은 문화예술을 접목한 공유 마차가 사교계에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개업을 이제 일주일 앞둔 페레티 공유 마차가 그 주인공.
공유 마차는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 윤리적이고 스마트한 소비문화를 확산…. (중략) 공유 마차의 차고지는 놀랍게도 카르티에 공작저였다.
사교계의 별로서 늘 최신 유행을 선도해 온 카르티에 공작은 이번에도 공유 마차의 미덕과 가능성에 공감해 아름다운 정원의 일부를 선뜻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유 마차에 깃든 정신이 참으로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하지 않습니까?”
비에커가의 명물인 카르티에 저택에서 만난 공작은 이와 같이 공유 마차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
“예전엔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했다면,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만 다음 세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카르티에 공작(24세)은 이처럼 결혼과 2세에 대한 의사를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빌보아 차트> 1위에 빛나는 제국 최고의 셀럽이자, 헤르메스에서 실시한 ‘최고의 신랑감’, ‘최애 싱글남’ 조사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카르티에 공작이 결혼에 관해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공유 마차는 또한 매력적인 사교의 장이 될 거 같습니다. 아름다운 만남과 신선한 모험이 기대되는군요.”
카르티에 공작은 공유 마차에서 연인이나 배우자를 적극적으로 물색할 뜻을 피력해 앞으로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공작의 이상형은 추구하는 가치와 취미가 맞아 대화가 통하는 레이디라고.
공작은 대귀족임에도 평소 자연스런 만남을 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페레티 공유 마차 관계자는 예술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차별화된 서비스와 획기적인 멤버십 혜택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페레티 공유 마차는 마법 이동 통신구 8282번으로 어디서나 간편하게 호출할 수 있다.
오픈 이벤트로 이용 고객 열 명에게(선착순) 통신구를 꾸밀 수 있는 럭셔리 비즈 액세서리인 밤비스 컬렉션 리미티드 에디션을 증정한다.
글 폭스 스토커 기자]
알레스는 스토커 남작의 기사를 만족스럽게 읽었다.
처음엔 기사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지난번 스토커 남작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 얍삽한 인상과 달리 자꾸만 정직한 느낌을 풍겨 조금 걱정을 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카르티에 공작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탈탈 털어먹은 알뜰함이 돋보였다.
그렇다고 카르티에 공작에게 딱히 해가 될 거 같진 않은데….
뭐, 둘 사이의 분쟁은 둘이서 해결하기를.
그보다 스토커 남작의 이름이 하이에노가 아니었다니!
알고 보니 하이에나가 아니라 여우였다.
그럼 하이에나는 어디로 간 거지?
뭐, 아무렴 어떤가.
하이에나든 여우든 사냥 솜씨만 좋으면 되지.
* * *
오늘도 설인족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미간에 저기압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투를 치르면서 실실 쪼개는 전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스산한 느낌이 여느 때와 확연히 달랐다.
설인족들은 회색늑대의 야성을 각성한 부족으로 야생동물과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오늘 공작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거라고.
이 모든 적진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메르세데스 공작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상했다. 스스로도 이 기분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맞고 말이 통하는 썩 괜찮은 남자를 알게 됐다. 앞으로 그와 긴밀하게 손발을 맞출 생각이다….’
공작은 알레스의 편지를 곱씹고 있었다.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할 상황 같은데 화가 난다.
화를 내자니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평생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겠노라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지금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대체 어쩌자는 거지, 카이트?
그녀의 마음을 떠보려는 거였나?
아니면 나타나지 않겠다 말해 놓고 어느 날 슬그머니 또 그녀의 방 창가에 서 있을 속셈이었나?
솔직할 배짱도 없으면서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거냐?
최악이다.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불편한 심기로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카르티에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신문을 보게 됐다.
무심코 기사를 훑던 공작의 눈이 커졌다.
카르티에의 근황인 줄만 알았던 기사에는 페레티 공유 마차에 대한 내용이 이상야릇하게 소개돼 있었다.
‘가치관과 취미가 맞아 대화가 통하는 레이디가 카르티에의 이상형….’
<엠파이어 타임스>의 폭스 스토커가 쓴 기사였다.
신문을 쥔 메르세데스 공작의 손에 조용히 힘이 들어갔다.
* * *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어요!”
마사가 부산스럽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 손끝에서 <빌보아 차트>가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이걸 좋은 일이라 해야 할지,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지….”
마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차트에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가 등장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