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이에나인데 말이 통해
얼마 전 알레스는 카르티에 공작에게 부탁해 기자 한 명을 소개 받았다.
탐욕적일 것.
파렴치한 철면피일 것.
왜곡, 날조, 낚시질, 분탕질 솜씨가 뛰어날 것.
대략 이런 조건을 나열했더니 <엠파이어 타임스>라는 신문의 하이에노 기자와 연결해 주었다.
<엠파이어 타임스>는 <크루그 스탠다드>와 영향력 1, 2위를 다투는 제국의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알레스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신문사를 찾았다.
하이에노 기자는 자리에 없었다.
비즈니스가 바쁜가?
“미리 시간 약속을 하고 방문했는데 자리에 없다니, 무례하군요.”
밤비 경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는 게 정말로 펜이 칼보다 강한지 시험해 볼 기세였다.
“뭐 먼저 약속을 어긴 건 나니까. 황은식 아저씨한테 붙들리는 바람에.”
지난번 하이에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급작스레 황제의 마차로 연행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신문사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후리후리한 남자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레이디 페레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듣던 대로 인상이 매우 비열해 보이는 남자였다.
형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아무리 유들유들함을 가장해도 날카로운 눈매는 숨길 수 없었다.
웃으면서 쌍욕을 날릴 수 있을 거 같은 잔인함이 엿보였다.
그는 굽실거리면서 입술에 침을 발랐다.
“레이디의 업적에 죽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은 제가 황실 출입 기자라 레이디의 활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지요.”
와, 역시.
기레기답게 아부가 아트다.
그저 듣기 좋은 말만 영혼 없이 늘어놓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기자라고 상대의 근황을 파악해 맞춤 아부를 떠는 스킬이 돋보였다.
게다가 비열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그리 탁하지 않았다.
그 맑은 목소리가 아부에 신뢰감을 얹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비즈니스를 원하는 사람이니 번거로운 예를 갖추는 데 신경 쓰지 마세요.”
피곤하니까 본론으로 직진하자고요.
피차 다 아는 처지에 괜한 시간 낭비 말고요.
“진심입니다, 레이디.”
하이에노의 눈이 또다시 번뜩 빛났다.
뭐야… 사례비를 기존 단가보다 더 요구하려는 건가?
카르티에 공작을 통해서 싸게 잘 후려쳤다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려고?
알레스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 레이디, 괜찮으시면 잠시 말씀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공식적인 인터뷰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레이디의 행보에 관심이 많아서요.”
아, 보통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가?
하긴 대놓고 부정 거래를 하자고 떠들 순 없지.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하니까.
역시 다년간 구린 짓을 해 온 만큼 노련하고 철저하구만.
그럼 나도 눈치 있게 맞춰 줘야겠군.
“네,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디가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드리지 않았네요.”
어? 소개부터 시작하는 설정입니까?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으시네.
“저는 <엠파이어 타임스> 기자인 스토커 남작입니다.”
하이에노가 아니고?
하이에노 스토커가 풀네임인가?
여하튼 이름 한번 투명하군.
“낭비되는 연회 음식을 어려운 백성들과 나누자는 혜안에 무척 감명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지요?”
그만 하라니까. 낯 간지럽게 왜 자꾸 이러시나.
안 되겠다. 내가 먼저 진도를 빼야겠군.
“별말씀을요. 제가 먹는 거에 좀 예민해서요. 그보다 저야말로 남작님의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정말이십니까? 저야 영광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레이디의 새로운 사업이라면 무척 궁금하군요.”
“일종의 대여 마차 사업인데, 제가 하려는 건 조금 달라요. 우선은 새로운 생각부터 팔아야 해요.”
“새로운 생각이요?”
“마차가 없는 사람만 우리 마차를 타는 게 아니라 마차가 여러 대인 귀족도 기꺼이 타게 만들 어떤 생각.”
“그거 흥미롭군요.”
“그 새로운 생각을 널리 퍼뜨려야 해서 남작님의 도움이 필요한 거고요.”
스토커 남작은 이미 눈을 빛내며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진지한 모습에 알레스는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우선은 이름부터 대여 마차가 아니라 공유 마차로 바꾸려고 해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아닙니다.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건 새로운 생각을 전파하는 유용한 방법이죠. 공유라는 말의 어감이 무척 좋네요.”
뭐야, 의외로 말이 잘 통하잖아?
하긴 ‘공’ 자 들어가는 게 요즘 대세지.
공유, 공익, 공존, 공생, 공감, 공작….
“유명 일간지 기자님이 좋다고 해 주시니 힘이 나는걸요? 이런 홍보 문구도 생각해 놨어요. 느낌 좀 얘기해 주세요.”
“홍보 문구까지 생각해 두셨군요. 기대됩니다.”
“페레티 공유 마차.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너와 함께 달린 모든 날이 좋았다.”
“…….”
“별로예요?”
“그게 아니라….”
스토커 남작이 눈가를 훔쳤다.
“방금 문학작품에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음, 그렇게 감동하고 나오면 내가 민망한데.
저쪽 세상 드라마 대사 베낀 건데….
“레이디는 정말 특별한 분입니다. 좋은 걸 넘어 감동을 주는 문구였습니다.”
“칭찬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공유 마차에 담긴 뜻을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응? 진짜로 관심이 있는 건가?
“음, 제가 홍보 문구에 ‘날’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넣었잖아요. 공유 마차를 이용하면 공기와 자연 환경이 좋아져서 정말로 날이 좋아지거든요.”
스토커 남작은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에 쏙 빠진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분명 얍삽하게 생겼고 눈빛도 비열하고 매서운데….
이름처럼 하이에나 같고 스토커 같은데….
어쨌거나 상대가 흥미롭게 듣자 알레스도 흥이 나서 사업에 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문사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잊고서.
“제국의 마차는 마정석으로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마정석은 천연자원이라 매장량이 한정돼 있고 심각한 공해를 일으키잖아요.”
마정석이 마차의 연료로 사용될 때 미세한 마력 가루가 공기 중에 배출된다.
그 마력 가루는 대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호흡기 질환과 우울증 등을 유발했다.
그러니 각자 마차를 굴리기보다 필요할 때마다 공유 마차를 이용하거나 마차 함께 타기 등을 실천한다면?
환경오염도 줄이고 자원고갈도 막고, 향유하되 소유하지 않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도 유행시킬 수 있으리라.
물론 고급 마차를 편하게 타던 귀족들을 이런 귀찮은 일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는 않을 터.
대의만을 강조해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현명한 소비라거나 가계 절약 같은 걸 내세우면 귀족들에겐 우스갯소리로 들릴 테고.
그래서 준비했다. 두 가지 미끼를.
그 하나가 새로운 생각 유행시키기.
공유 마차를 타는 게 잘나가는 귀족, 유행을 선도하는 셀럽, 미래지향적이고 열린 상류층의 덕목이라는 인식부터 퍼뜨리는 거다.
사교계 내에 동물 학대를 혐오하는 공감대가 형성돼 마차를 말이 아닌 마정석으로 운행하게 된 사례처럼 말이다.
그다음으로 준비한 미끼는 매우 화끈한 서비스 제공.
귀부인들을 혹하게 만들고 사교계에 화제를 불러일으킬 향응을 제공하는 거다.
“공유 마차를 새로운 사교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건 제가 이것저것 준비를 좀 했는데, 새로운 생각을 알리는 일은 제 힘만으론 부족해서요.”
“충분히 널리 알릴 만한 생각입니다.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남작님이 도와주신다면 너무나 든든하죠.”
스토커는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들여다보다 물었다.
“공유 마차에 호의적일 셀럽이나 사교계의 실력자가 있을까요?”
“한 분… 있어요. 카르티에 공작 전하요.”
“예? 이거 놀라움의 연속이군요. 그분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스토커 남작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음, 사실 저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남작님께 살짝 공유해 드리자면, 최종적으로는 마정석 사용을 줄이는 게 아니라 아예 제로로 만들려고 해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이거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저희 공유 마차를 마법식만으로 움직이게 개조할 거예요. 그럼 공해와 자원 낭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죠.”
“멋진 일이긴 한데, 가능한 겁니까?”
“전령 길드인 헤르메스에선 이미 마법식으로만 움직이는 소형 이륜차를 직원들에게 보급했어요.”
“아, 그 뉴 탈라리아 말씀이군요.”
“네, 무척 유용해 보여서 저희 유모에게도 한 대 마련해 줬거든요.”
“유모에게….”
“그냥 유모는 아니고 특급 유모예요. 저희 가문 최고의 인재죠.”
“…….”
“물론 뉴 탈라리아는 단순한 구조고 마차는 그보다 복잡하긴 하죠. 하지만 저한테는 엄청난 무기가 있거든요.”
제국 최고의 마법식 천재와 아는 사이거든요.
게다가 한 번 속여 봐서 그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쨌든 새로운 사업의 첫걸음이 남작님의 기사였으면 합니다.”
* * *
요즘 카르티에 공작의 낙은 단연 레이디 페레티였다.
황궁 음식 나눔장 일도 기대보다 재미있게 흘러가는 데다 공유 마차 사업도 예상외로 진척이 빨랐다.
잊을 만하면 사건사고를 빵빵 터뜨리는 면모도 사교계의 재목감이 아닐 수 없고.
게다가 메르세데스에 이어 황제까지 가세해 제대로 팝콘각을 만들 줄이야!
음식 나눔장 개장일, 카르티에 공작도 마차 안에서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본의 아니게 별별 재미난 광경을 관전하게 되었다.
엉뚱한 인물들이 그녀 주변에 꼬이는가 싶더니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르티에 공작도 슬슬 걱정이 되어 자신의 기사단 중 정예 3인을 보냈다.
기껏 생색 좀 내려는 찰나, 황제가 물량 공세로 완전히 평정해 버리는 게 아닌가!
카르티에의 기사들은 쪽도 한번 못 써 보고 묻히고 말았다.
이혼한 전처를 위해 황실 근위대를 파견하다니, 그보다 더 노골적일 순 없었다.
뭐지, 뭐지? 이건 또 무슨 재미난 냄새지?
카르티에 공작은 잔뜩 흥분했다.
아이고, 어쩌냐 메르세데스?
하필이면 황제가 연적이라니.
카르티에는 좋아 죽을 거 같은 얼굴로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레이디 페레티가 어떤 마차에 올라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것도.
페레티의 앞을 가로막은 자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가판투스 황제의 측근.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이러니 레이디 페레티를 끊을 수가 없다니까.
그래서 공유 마차와 관련한 인터뷰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곧 찾아온다는 기자가 왜 스토커 남작이야?
내가 연결해 준 하이에노는 어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