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37화 (37/120)

37화

저마다의 동상이몽 ‘푸른 불꽃의 고결’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자신이 고결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별호가 생겨난 것인지 의아했다.

연중 이백 일을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고결할 수 있단 말인가.

전투를 하다 보면 적을 상대로 이런저런 더러운 술수를 쓰는 일도 적지 않았다.

영지민을 보호하고 황실과 다른 귀족들을 견제하려면 계략이란 걸 써야 할 때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은 복수를 계획해 온 괴물이지 않은가.

‘고결’이라니 참으로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고결한 공작은 결코 자기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야 원하는 대로 보고 생각하도록 놔두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알레스가 메르세데스 공작을 지나치게 고상한 사람으로 본다는 거였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정말로 ‘푸른 불꽃의 고결’이 되어야 할 거 같았다.

물론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알레스에겐 그 누구보다 정중하고 진지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러려고 각별히 노력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알레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스승의 적토마를 몰래 훔쳐 나올 수도 있는, 그런 뻔뻔한 남자이기도 했다.

공작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절로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매사 진지해서 귀여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 * *

음… 냐… 여기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알레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시야는 몽롱했지만, 기분 좋은 따스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마를 무언가에 마구 비볐다.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면서 눈앞의 물체가 식별되기 시작했다.

이 검푸른 털은 공작의 머리카락 같은데?

이 널찍하고 탄탄한 건 공작의 몸 같고?

저래 봬도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하지.

그런데 이것들이 왜 내 얼굴에 딱 붙어 있는….

“이약! 뭐야!”

“어어.”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가는 걸 느낀 알레스는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걸 와락 끌어안았다.

꽤 빠른 속도로 발이 공중에 동동 떠가고 있었다.

와락 끌어안은 건 공작의 목이었다.

“알레스, 깼어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금… 업혀 가는 중?’

알레스는 화들짝 놀라서 목을 꽉 조인 팔을 조금 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곤히 잠드신 거 같아서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귀가는 해야 하고….”

당신을 무사히 데려다 주고, 스승이 눈치 채시기 전에 적토마도 제자리에 돌려놓고, 부관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 늦지 말아야 하고, 전장에도 나가 봐야 하거든요.

알레스는 그제야 혼자 자 버린 게 생각났다.

그전엔 적토마를 탔고, 공작과 한바탕 설전을 벌였고….

“그냥 깨우시지. 이제 그만 내려 주세요.”

“아,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시겠습니까? 내가 이미 어떤 기술에 들어가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주변의 실루엣이 빠르게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을 업은 것치고는 공작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렇다고 적토마를 탔을 때처럼 감당할 수 없는 속도감이 사람을 짓누르는 거도 아니었다.

매우 가볍고 부드럽게 떠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스승이 동방에서 온 사람이라더니 아무래도 이 기술 역시 그에게서 배운 게 아닐까 싶었다.

동방살이 30년이면 오며가며 들은 풍월이 있단 말이지.

“제가 불편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전하가 힘드실까 봐 그렇죠.”

“업은 거 같지도 않습니다.”

사실 몸은 무지 편한데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깨지 말고 계속 잘걸.

깨 버린 이상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드실까 봐’라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짐짝이 아닌 이상 단지 그것만 신경 쓰일 리 없었다.

다 큰 총각이 다 큰 처녀를 업는 건 좀 음음음….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같은데, 자신만 음란마귀가 든 걸까?

‘그러고 보니 공작의 손은 어디서 어쩌고 있지?’

알레스는 눈을 부릅뜨고 신변을 살폈다.

공작의 두 손은 눕힌 검의 양쪽 끝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 검 위에 알레스의 엉덩이가 걸쳐져 있었다.

흠….

이제 보니 야외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던 공작의 외투가 자신의 몸을 안전벨트처럼 사선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흐음….

누가 ‘푸른 불꽃의 고결’ 아니랄까 봐.

역시 공작은 매사 고지식하고 진지하단 말이야.

“적토마는 어디로 갔지요?”

“근처에서 달리고 있을 겁니다.”

“적토마를 타시지 않고….”

알레스가 그렇게 무서워하는데, 그 말을 다시 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알레스가 잠든 사이 어부바로 감쪽같이 옮겨 놓으려 했는데….

“알레스, 심심하면 별을 보세요.”

불빛이 없어서인지 밤하늘에 별이 촘촘했다.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별의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공작의 등에 업혀 가면서 별 구경하기.

생각하니 엄청난 호사였다.

공작에겐 때아닌 달밤의 체조, 아니 별밤의 달리기겠지만.

* * *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방에서 온 대스승 마스터 현이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공작이 얼마 전에도 몰래 제도에 다녀온 걸 알고 있었다.

적토마가 마구간에 없는 걸 발견하자마자 그는 직감했다.

공작이 또 제도에 갔다는 걸.

도둑처럼 밤이슬을 밟고 슬그머니 간 이유는 뻔했다.

이번엔 심지어 적토마까지 슬쩍하다니.

적토마를 끌고 간 이유 역시 뻔하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 꾀려는 남자들의 꼼수가 속도 과시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설의 명마를 연애질하는 데다!

마스터 현은 점점 대범해지고 방탕해지는 제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작은 제도에 갔다 온 걸 순순히 시인했다.

무단으로 적토마를 끌고 나간 일에 대해서도 잘못을 빌었다.

대체 얼마나 요사스런 여자이기에 저리 목석같은 남자를 홀린단 말인가.

경지에 이르려면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건만.

밤비 경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물론 마스터 현이 짐작도 못 하는 사실이 있었다.

연애질하는 데 적토마만 사용한 게 아니라 경공술도 십분 응용했다든지.

밤비 경은 불장난을 막기는커녕 앞장서서 부채질하고 있다든지.

그런 사실까지 안다면 마스터 현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거다.

아니, 그는 지금 당장 뒷목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웃어?’

잔뜩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공작이 몰래 실실 쪼개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어젯밤엔 공작 전하와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

아침을 먹다 말고 밤비 경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아침 식사 자리에 올리기엔 핵폭탄 급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마사와 헤라클레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아가씨, 공작 전하가 오셨어요? 북부에 계신 거 아니었나요?”

마사의 질문에 밤비 경이 대신 대답했다.

“레이디를 만나러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밤을 꼬박 새우며 다녀가셨답니다.”

알레스는 밥 먹다 말고 연장을 놓칠 뻔했다.

밤비 경 대체 왜 이래?

평소 밤비 경의 성격이나 처신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론 밤비 경은 계획이 다 있었다.

기정사실화하기와 세뇌하기.

두 사람의 관계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알려서 레이디 페레티 본인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도 그녀가 공작부인이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전략.

마치 태어날 때부터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이었던 거처럼.

공작부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람인 양.

“그래서 어젯밤에 뭘 하신 거예요?”

마사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냥 말 좀 탔어.”

“함께 말을요? 들판을 달리셨어요? 야간 승마라니 로맨틱하다.”

아주 눈물 쏙 빠지게 로맨틱했지.

“어디까지 다녀오신 거예요?”

“조금 멀리.”

밤비 경이 잽싸게 비집고 들어왔다.

“제가 알기론 그냥 말이 아니고 매우 특별한 명마라던데요.”

“어머나, 아가씨를 위해 그런 귀한 말을 타고 오신 건가요?”

“동방에서 온 말인데 제국엔 한 마리밖에 없대요.”

“어머나, 제국 유일의 고급 외제마!”

마사와 밤비 경, 오늘따라 두 사람 죽이 아주 잘 맞았다.

“메르세데스령이 북부에 있어서 겨울에 조금 춥다는 거 말고는 매우 살기 좋은 곳이에요.”

그동안 듣던 거랑 좀 다른데?

“천연자원도 풍부하고, 사회 기반 시설도 잘돼 있고, 특히 때 묻지 않은 자연 환경은 미래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날 전망이랍니다.”

으응?

“물론 그중에서도 우리 영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시지요.”

브라보! 밤비 경은 역시 실력자로군.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저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좀 보게.

알레스마저 감탄하고 있는데, 평소 거의 말이 없는 헤라클레스가 엉뚱한 소리로 분위기를 와사삭 깨뜨렸다.

“신사라면 밤늦게 레이디를 멀리까지 모시고 가선 안 되는 거 아, 아닙니까?”

“…….”

“위, 위험하기도 하고. 마님은 몸도 약하신데!”

말을 마친 헤라클레스는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있었다.

싸늘해진 식탁 너머에서 마사와 밤비가 스산한 시선을 보냈다.

‘저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알레스는 측근들의 소리 없는 눈총질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침 식탁의 양쪽 온도 차가 너무 크군.

식사를 마친 알레스는 지난번 황제와 생각지도 못한 계약을 맺느라 미뤄진 약속을 챙기기로 했다.

공유 마차 사업을 위해 아름다운 창작열을 불태울 기자 한 명을 소개받기로 한 것.

이번에 한번 합을 맞춰 보고 괜찮으면 다른 사업들도 함께할 생각이었다.

마사와 헤라클레스는 황궁 음식 나눔장인 ‘황제의 은혜로운 식탁’으로 출근하고, 알레스는 밤비 경과 함께 신문사로 향했다.

마사는 핑크 스쿠터 뒤에 헤라클레스를 태우고 ‘황은식’으로 향했다.

점심 배식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마사는 생각났다는 듯 헤라클레스에게 퉁을 주었다.

“브레이브 경,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예?”

“밤비 경이랑 나랑 아가씨와 메르세데스 공작님을 엮고 싶어 하는 게 안 보여요?”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헤라클레스가 어눌하지만 고집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사 경,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엥? 뭔 소리예요?”

“밤비 경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 대신 마님의 호위를 맡아 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데요?”

“하지만 결국에 밤비 경은 메르세데스가의 사람이 아닙니까? 밤비 경이야 그럴 수 있다 쳐요. 마사 경과 저는 페레티가의 사람 아닙니까.”

“그거야….”

마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마님이 양친이나 형제자매도 없으시고 가문에 딱히 어른도 없으신 거 같은데, 저희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님을 보필해 드려야죠. 페레티 가문을 쉽게 보지 못하도록.”

마사가 눈을 비비고 헤라클레스를 다시 보았다.

그저 빵밖에 모르는 보릿자루인 줄 알았는데 저런 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파티시에 헤라클레스가 달리 보였다.

그 무섭다는 여친 오빠가 여기 버티고 있을 줄이야!

실력자 밤비 경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