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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36화 (36/120)

36화

계약을 파기합니다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명마 적토마.

알레스는 그 위에서 눈물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어 갔다.

알레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진 데다 몸이 자꾸만 기우뚱해지자 공작은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알레스의 작은 손이 적토마의 갈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닌가.

졸지에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긴 적토마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런!’

공작은 급히 말을 세웠다.

달리는 걸 멈추자 알레스가 적토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거기 얼굴을 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저러는 건 아님을 공작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공작은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후 알레스에게 팔을 뻗었다.

“알레스….”

알레스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적토마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 푸스스 일어났다.

최대한 고개를 숙인 채 공작의 팔에 의지해 말에서 내려왔지만, 퉁퉁 부은 눈과 댓 발 나온 입을 다 숨길 순 없었다.

공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레스는 힘없이 걸어서 널찍한 그루터기에 풀썩 주저앉았다.

공작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말 타는 거…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

난생 처음 타 본다니까 그러시네.

더욱이 적토마가 웬 말인가.

공작 형씨, 내가 여포나 관우로 보입니까?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공작이 자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왜 멋대로 생각해 버렸을까.

레이디 페레티와 좋은 걸 함께하고 싶었다.

무척 아끼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요즘 인기라는 대관람차도 탔던 거고, 스승의 적토마를 몰래 끌고 나와 태운 거고.

결과적으로 두 번 다 알레스를 사지로 몰아넣고 말았다.

‘또 해를 끼치고 만 건가.’

노력해도 어긋나기만 하는 상황에 공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번번이… 정말 미안해요.”

그래요, 번번이….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친 알레스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공작이 좋은 사람인 거 같아서, 지금까지 겪은 남자들과는 다른 사람인 거 같아서 마음의 문을 열고 빼꼼 내다볼 때마다 번번이.

좀 잘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을 때마다 번번이!

추한 모습을 보여 주고 말았다.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약한 모습들을.

저혈당증으로 쓰러지지 않나, 고소공포증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지 않나, 눈사람 꿈꾸고 지레 곡을 하지 않나, 말 타고 무섭다고 질질 짜질 않나!

왜 번번이 메르세데스 공작 앞에서 이러는 건지!

저쪽 세상과 이쪽 세상을 통틀어 아마 자신의 눈물 콧물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공작일 거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띄웠다 처박았다 롤러코스터 태우는 면이 저쪽 세상의 사내 킹카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이러려고 사내 킹카랑 닮았던 거였니?

헛된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하려고?

알레스는 울컥 짜증이 나서 왁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되는 일이 없는 자신에게 짜증이 난 건지, 번번이 자신의 민낯을 목격하는 공작에게 짜증이 난 건지, 갑자기 소환된 기억 속 사내 킹카에게 짜증이 난 건지….

그도 아니면 굳이 적토마를 끌고 동방에서 건너온 공작의 스승에게 짜증이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다고 생각하며 알레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신나게 울기로 했다.

알레스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공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안아 주고 싶은데….’

이제 자신은 그럴 자격도 없는 거 같았다.

면목 없고 미안하기만 한 공작은 섣부른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알레스 옆에 조용히 앉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말없이 알레스를 지켜보았다.

속 시원하게 울던 알레스는 옆얼굴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우는 원숭이 얼굴 구경하나?’

알레스는 눈물 콧물 범벅한 얼굴로 공작을 쏘아보았다.

윽 그런데 뭐지?

이걸 각도의 마법이라 해야 하나?

그저 얼굴 조금 기울였을 뿐인데, 시선 조금 내리깔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야릇해 보이지?

요망한 입술은 왜 벌어져 있는 거야?

물론 기본적으로 잘난 얼굴이기에 가능한 일임을 명확히 해두자.

오징어는 기울여도 오징어다.

알레스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왜요?”

“네?”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요. 우는 사람 처음 봐요?”

“알레스처럼 그렇게 우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안해요.”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런 거 말고는 없어요?”

알레스는 기왕 망한 거 생떼를 부려 보고 싶었다.

공작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고 싶은 심보도 있었다.

흥, 자기도 고생 좀 해 보라지.

역시나 공작은 당황하더니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고심하는 듯했다.

마침내 공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레이디 페레티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알레스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나와 있을 때마다 알레스가 안 좋은 일을 당하니까요.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어!

그저 공작이 난처한 얼굴로 변명 한두 개쯤 늘어놓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다.

대충 몇 마디 둘러대면 될 걸, 아예 안 보고 살겠다고?

오지 말래도 그 먼 거리를 달려 꾸역꾸역 올 때는 언제고.

뭐 이렇게까지 하냐고 이 벽창호야!

알레스가 눈을 부릅뜬 채 분을 삭이고 있는데 공작이 덧붙였다.

“아, 계약은 그대로 유지할 겁니다. 저주에 관해서도 계속 연구해 주시고, 조언해 주실 부분은 얼마든지 조언해 주십시오. 밤비 경이 있으니 중간에서 전달해도 좋고….”

“계약은 파기합니다.”

“알레스….”

“전하의 본모습을 알리는 일인데, 어떻게 안 보고 그 일을 할 수가 있죠?”

“그건… 미안합니다. 내가 또 욕심을 부렸군요.”

“천만에요. 전하는 욕심 결핍증 환자 수준이에요. 전하는… 누구든 얼마든지 안 보고 살 수 있는 분이고요.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고고하게 사는 분이죠.”

“아닙니다, 알레스.”

“아, 아니군요. 누구든, 무엇이든이 아니라 저한테만 해당하는 얘기군요. 저야말로 주제넘게 굴어 미안하네요.”

아까는 작정하고 악을 쓰고 울었다면,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데 눈이 멋대로 눈물을 밀어냈다.

눈이 사춘기인가. 죽어라 말을 안 듣는다.

눈물이 눈에서 곧장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공작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떨어지는 눈물을 받았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눈물의 느낌이 묘했다.

심해같이 망망하던 눈동자에 새하얀 달그림자가 일렁였다.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당신을 못 본다면… 아마 무척 괴로울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불행해진다면 더욱 더 괴롭겠죠.”

이미 한 번 당신과 당신 가문을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또다시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말하기 힘든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옮아갈까 봐 주저된다는 뜻입니다.”

상처가 무슨 바이러스도 아니고 옮길 뭘 옮아요?

알레스는 왠지 외로워 보이는 공작을 바라보며 눈에 고인 눈물을 꽉 짜냈다.

그래도 옮는다고 우긴다면….

“제가 한번 옮아 볼게요.”

“네?”

“오해는 마세요. 전하의 저주를 풀고 본모습을 파악하는 데 그만한 지름길이 없을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오해 안 합니다. 나도 알레스에게 오해 받기 싫으니까. 하지만 방금 전 계약을 파기한다고….”

“파기 이유가 마음에 안 들어요!”

“이유가… 마음에 안 드는군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전하는 상처가 있고 그 상처가 저를 불행하게 만들 테니 저를 위해 아예 안 보고 살겠다, 이거 아닌가요? 정말로 안 보고 싶은 건 아니고요.”

“…음, 맞습니다.”

“이거 보세요. 이상하잖아요.”

“확실히… 이렇게 정리를 하니 민망하긴 하네요. 저, 그런데 계약 파기 얘기를 꺼낸 건 내가 아니라….”

“불행이라는 거도 그래요. 왜 제 불행을 맘대로 결정하시죠? 저한테 물어보셨어요?”

“안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알레스… 그동안 힘들었잖아요.”

“물론 힘들고 속상한 일은 있었어요. 하지만 힘든 거랑 불행은 다른 거라고요.”

불행은 힘든 일도 싹 잊어버리게 하는 더 거대한 무엇이죠.

당신을 다시 볼 수 없는 일 같은.

“그 상처라는 거도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거라면, 다른 사람에게 치유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사람에게 치유 받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세상에 믿지 말아야 할 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자꾸만 나답지 않은 말을 하게 만드는 당신이 두려워요.

“알레스, 당신의 생각은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동방에서 오신 내 스승님과 어딘지 닮았습니다.”

공작이 감탄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취소하세요. 제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말.”

공작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알레스가 말했다.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말 아세요?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제 상처도 만만치 않게 독하거든요. 카이트의 상처와 제 상처, 누가 이기나 한번 부딪쳐 보죠.”

알레스의 상처 부심에 공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답지 않게 자꾸만 웃게 만드는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리고요….”

알레스가 급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레스의 기색을 살핀 공작이 재빨리 품속을 뒤적거렸다.

“단 게 필요하십니까? 이번엔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아… 그보다 지금은 좀… 자고 가도 될까요?”

“예?”

“꽤 멀리 온 거 같은데… 이대로는 도저히 적토마를 다시 탈 수가 없구요…. 딱 오 분만 자면 제가 완전히… 충전이… 빵빵….”

“알레스, 괜찮아요?”

“느….”

대답을 다할 새도 없이 알레스의 정수리가 옆에 앉은 공작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백 퍼센트 다 쓰고 빈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았다.

공작은 알레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게 아닌가 놀랐다가 조그맣게 쌔근쌔근 하는 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그는 알레스의 머리를 조심조심 무릎 위로 옮겼다.

돌아보면 알레스에겐 고단한 밤도깨비 일정이었다.

난생처음 말을,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괴물 같은 말을 타고 먼 거리를 온 데다, 달리는 내내 공포에 질린 채 울며 소리를 질렀으니.

그뿐 아니라 말에서 내려서도 계속 울며불며 진을 뺐으니.

긴장이 풀리자마자 잠의 격류에 휩쓸려가 버렸다.

공작이 내려다보니 핑크 브라운의 머리칼이 매우 탐스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공작은 그 머리카락 끝에 살며시 손을 대 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간질였다.

알레스가 입을 새처럼 오물거렸다.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레스도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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