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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35화 (35/120)

35화

달리기 좋은 밤이군요

[공작 전하.

레이디 페레티께선 속도가 빠른 걸 선호하십니다.

질주 애호가십니다.

밤비.]

메르세데스 공작은 밤비 경이 보낸 짧은 서신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속도가 빠른 게 좋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

‘밤비, 자세히 좀 설명하란 말이다.’

너무 단순하고 명백해서, 도리어 헷갈리는 전언이었다.

더욱이 밤비 경이 왜 이런 서신을?

서신을 보낸 의도는 더욱 의문스러웠다.

레이디 페레티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과 속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알레스가 질주 애호가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던 바였다.

그때 비에커가에서도 엄청 달렸으니까.

한 마리 다람쥐처럼 뽀로로 달아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력 질주가 잡념을 떨치는 데 좋다고 했었지.

그건 그렇고, 이 서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팍팍팍.

오늘따라 끈질기게 달라붙는 설인족 병사의 투구를 검집째로 내려치며 공작은 고민했다.

‘속도란 그 속도일까?’

퍽퍽퍽.

아직 어려 보이는 설인족 병사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며 생각했다.

‘속도가 빠른 걸 좋아한다라….’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마력을 불꽃으로 바꾸어 쏘아대며 고심했다.

‘속도, 속도, 속도!’

설인족 부대의 사기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공작의 기세가 평소와 달랐다.

적진의 수장이니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긴 했지만, 눈을 새파랗게 번뜩이는 게 오늘따라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가장 무서운 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일격을 날린다는 거였다.

영혼을 어딘가 두고 온 거 같았다.

설인족 병사들은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가장 위험한 건 영혼이 없는 살수와 사랑에 빠진 풋내기.’

* * *

“다들 고생 많았어요. 오늘도 훌륭하게 해냈어요!”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알레스가 측근들을 치하했다.

“음식 나눔장을 성공적으로 개장했으니 이제 슬슬 공유 마차 사업에도 박차를 가해 볼까 해요.”

측근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제 큰 계약도 두 건이나 맺었고, 여러 가지로 논의해야 할 사안이 많아요. 얼른 회의했으면 좋겠네.”

냉랭한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신나서 늘어놓는 알레스에게 마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변하셨네요.”

“뭐가?”

“먹는 걸 두고 딴생각을 하시다니.”

좀처럼 입을 여는 법 없는 헤라클레스도 빵을 떨어뜨리며 더듬거렸다.

“애, 애정이 식으신 겁니까?”

밤비 경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조신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는 거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기신 거 아니겠습니까. 안 먹어도 배부른 그런….”

마밤헬의 반응에 알레스의 눈에 힘이 콱 들어갔다.

“어떻게 안 먹는데 배가 불러? 그리고 누가 먹는 걸 좋아한대?”

“예? 이제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내가 좋아하는 건 먹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거야, 맛있는 거! 그리고 맛있는 거만큼 좋아하는 게 돈 버는 거고! 가장 좋아하는 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맛있는 거 먹는 거지!”

“그게 뭐예요….”

“식업일치 몰라요? 가장 행복한 인생의 경지.”

“아가씨도 참, 변하지는 않으셨네요.”

마사가 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헤라클레스도 다행이라는 듯 헤벌쭉 웃었다.

밤비 경은 밤색 눈을 빛내며 머릿속에 재빨리 메모해 두었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맛있는 거 먹기.’

자신이 이렇게까지 지원하는데 공작님이 분발을 좀 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여하튼 좋아요. 그건 내 즐거움이니 여러분에게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일 얘기는 내일 하고 지금부턴 맛있는 거에 집중합시다.”

식사를 마친 알레스는 책상 앞에 앉았다.

약속대로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위문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메르세데스 공작님께.

식사는 하셨는지요?]

으, 이게 뭔가. 다시.

[친애하는 카이트.

오늘 전투는 어땠나요?

살벌한 전장에서도 가끔 하늘을 보는 여유를….]

뭔 소리야? 칼 맞으라는 소리야?

안 되지, 안 돼.

[푸른 불꽃의 고결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사교계에서 전하의 평판이 점점 올라가고 있어요.]

거짓말.

[카이트, 오지 말란다고 정말 안 오나요?

이 눈치 없는 인간아….]

미쳤니?

알레스는 스스로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편지 한 장 쓰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편지를 쓰는 대신 편지지에 눈사람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알레스?”

“이악!”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중저음에 알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훤칠한 실루엣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카이트? 뭐예요, 정말!”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눈사람 예쁘네요.”

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도리어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면 혼란스럽거나 긴장했거나?

“아니… 매번 어디서 솟아나는 거예요?”

“아, 그거 말입니까? 순식간에 움직이는 걸 좋아합니다. 속도를 지배하는 쾌감이란.”

“네?”

알레스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나타난 공작이 정색한 얼굴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제도에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이상한 편지 같은 걸 보내지도 않았는데?

알레스의 물음에 공작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 달리기 좋은 밤이라서요.”

“그런 밤이… 있어요?”

공작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공작님, 거짓말 정말 못 하시는군요.

“알레스, 괜찮다면… 나와 함께 말 타러 가지 않을래요?”

“…….”

설마 진짜로 말 타자고 거기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죠?

물어보기도 무서워 알레스는 공작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저런 얼굴로, 저런 눈으로 물어보면 도저히 거부할 수가….

당장 짐 싸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냥 가면 되는 거예요?”

“네.”

알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메르세데스 공작에게만 유독 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빙의 전부터 빙의한 지금까지, 남자들과의 담판에 강한 자신이었다.

1원어치도 양보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메르세데스 공작에게만큼은 번번이 마음이 물렁해진다는 게 불만이었다.

물론 공작은 늘 정중했고, 억지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게 더 고단수 같단 말이지….

안 된다거나 싫다고 하면 저 고상한 이목구비가 금세 슬픔으로 젖어 들 거 같고, 그걸 보면 가슴이 찢어질 거 같고.

망했다, 알레스.

공작과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알레스도 무심코 멈춰 서 앞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저건!’

말로 추정되는 동물이 집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보통 말보다 1.5배 정도는 커 보이고, 타는 듯 붉은색이었다.

타자는 말이 이분?

빙의 전 동쪽에서 살던 사람답게 관우가 타던 유명한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적토마….”

알레스가 중얼거리자 공작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아시나요, 적토마를?”

이번엔 알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정말 적토마라고요?”

“제겐 스승이 한 분 계시는데 동방에서 오신 분입니다. 암흑 사막을 건너서 메르세데스령으로 오실 때 이 적토마와 몇몇 신수를 거느리고 오셨죠.”

으음? 스승이 동방 사람?

암흑 사막은 뭐며 신수는 또 뭔지….

그 무엇보다 황당한 건 자신이 지금 저 적토마를 타야 한다는 현실이다.

“저, 우리가 진짜 이 말을 타는 건가요?”

“예, 믿으셔도 좋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을 위해 조금 무리했습니다.”

아니, 왜?

적토마의 머리를 올려다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눈치다.

알레스는 이제야 자신이 정말로 다른 세상으로 왔다는 걸 실감했다.

오자마자 황제랑 이혼도 하고, 황궁에도 살아보고, 귀족들도 구경하고, 물론 장식용 말이 달린 마차도 숱하게 봤지만 사람 사는 세상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다.

달라서 조금 불편했던 건 입고 있는 드레스 정도?

그나마도 본격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서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황궁에서 나온 후론 더 간편하게 입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마차가 아닌 말을 직접 타는 건….

그것도 보통 말이 아니고 이야기 속에서나 접했던 전설의 적토마라니.

게다가 공작과 함께라니.

이 세계로 떨어진 후 처음으로 닥쳐온 진정한 도전 같았다.

중세 귀부인답게 우아하게 해낼 수 있을까?

적토마의 등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 보였다.

공작은 훤칠하고 체격도 당당해서 그 높고 큰 말의 진정한 주인 같았다.

상대적으로 짧은 자신은 그 말 앞에 있자니 더욱 땅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우선은 저길 어떻게 기어 올라간담?

“말은 처음 타보는데요.”

“그렇습니까? 제가 함께 탈 테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아마 좋아하게 되실 겁니다. 속도가 빠른 걸 좋아하시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속도, 속도 하는 건지.

솔직히 좀 무섭고 걱정되는데.

쇳덩이나 나무토막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걸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잠시 고심하던 공작은 알레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뭐라 대꾸하거나 생각할 새도 없이 공작은 알레스를 번쩍 들어 안장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버버 하다 보니 적토마를 타고 있었다.

뭐, 목덜미를 잡고 말 위로 집어던지지 않은 게 어딘가.

그보다 알레스는 이 위가 좀 낯설고 무서웠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설마 이 정도 높이도 무서울 만큼 심각한 고소공포증은 아니겠지?

곧이어 공작이 훌쩍 올라탔다.

탄탄하고 따뜻한 등받이가 생기자 마음이 좀 가라앉고 안정감이 생겼다.

고삐를 잡은 공작의 두 팔이 알레스를 안전하게 가뒀다.

드디어 적토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생경하면서도 두근거리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말은 경쾌한 움직임으로 어둠이 내린 번화가를 벗어났다.

처음 타보는데도 여기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자꾸만 공작과 몸이 부딪치는 게 신경 쓰일 정도의 여유마저 있었다.

마침내 상점이나 인가가 사라지고 확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적토마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바람의 아우성이 귓가를 때렸다.

보통 말도 한번 타보지 못한 알레스는 뒤늦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말은 결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란 걸.

꾹 참고 버텨 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아아!”

그 소리를 들은 공작은 뒤에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말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알레스는 매우 즐거워하는 듯했다.

속도를 즐기는 레이디답게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역시 대범한 레이디가 아닐 수 없었다.

공작은 속도를 더 높였다.

“아악, 천천히, 천천히! 속도를 좀 늦춰요, 제발!”

알레스가 애원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며 땅을 박차는 소리와 거센 바람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열혈 질주 애호가 레이디가 뭔가 말하는 거 같은데, 공작의 귀에는 ‘얏호, 더 빨리, 더 빨리! 오빠 달려!’ 정도의 느낌으로 접수됐다.

“으흑, 그만! 그만하라고요!”

알레스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나중엔 엉엉 울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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