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언니 달려!
‘레이디 페레티를 공작부인으로?’
밤비 경은 자기가 한 생각에 자기가 흠칫 놀랐다.
무엇보다 공작 전하의 최측근인 기사단장과 대스승이 자신의 이런 생각을 알면 뒷목을 잡겠지.
밤비 경이 제도로 떠나기 전, 그들은 따로 자신을 불러 당부했다.
레이디의 호위 기사로 제도에 잠입해 ‘독버섯’ 일당의 동태를 면밀히 살필 것.
그리고 혹시 모를 공작 전하의 불장난을 원천봉쇄할 것.
그때만 해도 밤비 경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긴장 풀기용 농담 같은 건가?
불장난이라니….
메르세데스 공작과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으리라.
밤비 경이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뵈커 단장이 헛기침을 한 후 설명했다.
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공작의 별인 알테온을 향해 웬 미친 초록 꼬리 행성 하나가 돌진해 오고 있다나?
아무래도 뵈커 단장이 나이를 먹으면서 이성의 날이 무뎌진 게 아닌가 싶었다.
?전하 같은 유형이 원래 큰 사고 치는 법이거든. 푸르든 붉든 불꽃은 불꽃이라구.?
이런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마스터 현은 언제나처럼 알쏭달쏭한 말을 반 토막만 흘렸다.
?결혼은 무덤….?
동방에서 온 대스승의 말버릇이었다.
그의 동방식 교육 덕분에 메르세데스 공작의 정신세계가 더욱 괴상해졌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여하튼 두 측근이 서로 다른 화법으로 같은 걸 강조했다.
로맨스의 불씨일랑 초장부터 철저히 밟아 꺼뜨리라고.
밤비 경은 그런 당부가 공작을 누구보다 아끼는 두 사람의 노파심이라 여겼다.
아니면 솔로인 두 사람이 물귀신 작전으로 공작 전하의 연애를 방해… 그건 아니겠지.
사실 영지민 대부분이 공작의 안위에 대해서라면 흔히 이런 극성맞은 태도를 보였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그들의 뜬금없는 당부도 그런 것이겠거니 이해했다.
그런데 북부의 전장에 있어야 할 메르세데스 공작이 이곳 제도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는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별점 용하네.
두 어른의 관록도 대단하고.
그러나 밤비 경 자신은 두 사람의 당부와는 정반대로 레이디 페레티를 공작부인으로 만들 궁리를 하고 있다.
뵈커 단장과 마스터 현이 알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라며 통탄할 일이었다.
‘하지만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레이디 페레티의 손길이 절실했다.
밤비 경은 두 사람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디 페레티를 밀착 호위하며 그녀의 취향과 호불호를 파악하리라.
* * *
알레스는 조금 늦게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를 출발해 황궁 음식 나눔장으로 향했다.
나눔장은 평민 상점가에 있었다.
마사와 헤라클레스가 아침 일찍 먼저 가서 문을 연 그곳엔 예상대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호기심에 구경 나온 귀족들의 마차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나눔장에도 어엿한 이름이 생겼다.
새 간판도 달았다.
이름은 제도민 설문을 통해 결정했고, 설문 조사는 헤르메스에 맡겼다.
헤르메스는 <빌보아 차트> 순위 조사도 맡고 있는 제국의 독보적인 여론 조사 기관이었다.
원래는 전령 길드였으나 시대에 맞춰 발 빠르게 체질 개선을 한 거였다.
구두쇠 알레스가 돈도 안 되는 사업장 이름을 굳이 헤르메스에 의뢰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 홍보 연습 차원에서.
설문 조사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업 취지와 내용을 알리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둘째로 알레스는 헤르메스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이번 기회에 거래를 터서 앞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렇게 헤르메스의 설문을 거쳐 탄생한 이름은.
‘황제의 은혜로운 식탁’.
알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생고생해서 황제 좋은 일이나 하다니.
‘황은식’,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개장하는 날 성황을 이룬 건 다행이었다.
헤라클레스는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띠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사는 매처럼 눈을 번뜩이고 있었지만 턱 끝에 자부심이 줄줄 흘렀다.
아무리 돈도 안 되고 남 좋은 일이라도 썰렁한 건 역시 좀 그렇지.
무엇보다 마사와 헤라클레스가 이 일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가.
헤라클레스는 그 귀한 면죄권을 꿀꺽한 죄가 있으니 고생해 마땅하다 쳐도, 마사는 생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맡은 집안일도 많은데 페레티의 브레인이라는 이유로 이 일 저 일 발을 담그지 않은 일이 없었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나눔장을 우직하니 지키고 있으면 되지만, 마사는 업무 성격상 다닐 곳도, 만날 사람도 많았다.
먼 거리라고 마사가 마차를 타고 다니겠는가.
분명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겠지.
그런 마사를 위해 알레스는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레이디 페레티, 업자가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밤비 경이 다가와 속삭였다.
마침 나눔장으로 주문해 둔 물건이 도착했다.
며칠 전 설문 의뢰를 하러 마사와 함께 헤르메스를 직접 방문했을 때였다.
알레스는 거기서 이 물건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저건…?’
직원에게 묻자,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영민하십니다, 레이디. 저희가 원래 전령 길드 아니겠습니까. 모태사업인 전령 부문도 재개하려고요. 이번엔 서신이나 전언 외에 물건도 전달합니다.?
이제 택배랑 퀵 서비스까지!
?그럼 저건 전령들이 타고 다니는??
?예. 작지만 가볍고 빠릅니다. 마법식으로 움직이게 설계해 연료비, 공해, 소음 세 가지를 모두 잡았지요.?
?마법식만으로 움직일 수가 있는 거예요??
?보시다시피 차체에서 군더더기를 다 뺐거든요. 이 뉴 탈라리아가 헤르메스의 새로운 상징이 될 겁니다.?
그때 알레스는 보았다.
마사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걸.
두 눈은 분명 소유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알레스가 직원에게 물었다.
?제가 보기엔 모양이 간편하고 높이가 낮아서 레이디들이 타기에도 좋을 거 같은데요??
?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레이디들은 좀… 아무래도….?
?왜요? 승마도 하잖아요. 저건 드레스 입고도 타겠네.?
?그렇지만….?
?하나 구할 수 없을까요??
?네??
당황한 직원을 두고 알레스가 마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 마사한테 필요할 거 같지 않아??
?예? 저는 필요 없어요.?
마음을 들켜서인지 마사가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어투로 말했다.
?마사 좋으라는 게 아냐. 지금도 허리가 아프네, 무릎이 아프네, 밤마다 투덜거리잖아. 그 소리 듣기도 지겨워. 집 안의 기운이 탁해진다고.?
?그렇지만 비쌀 텐데요….?
?들인 만큼 뽑아야지. 무슨 색??
?…핑크요.?
실랑이 끝에 제작소를 알아냈고, 특별 제작을 부탁했다.
딱 맞춰 배달돼 온 물건을 살펴봤더니 마음에 든다.
점심 배식이 대충 마무리되자 또 어디론가 급히 나서는 마사를 불러 세웠다.
“마사!”
“아가씨, 아니 보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 어디 가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이 몰려서요. 봉투랑 기름종이 같은 걸 더 구해 와야겠어요. 사무실에 잠시만 앉아 계세요. 곧 다녀올게요.”
“마사, 애마가 왔어. 지금 바로 타고 가면 되겠네.”
금세 알아들은 마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핑크색 스쿠터.
헤르메스에서 본 건 분명 저쪽 세상의 소형 오토바이였다.
놀랍기도 했지만, 보자마자 마사에게 딱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거리를 기동력 있게 다니면서 때에 따라 짐도 날라야 했으니까.
스쿠터라면 저쪽 세상에선 여자들도 많이 타고 다녔으니까.
다만 핑크색을 원할 줄이야.
‘어쩐지 내 몸단장을 도울 때 자꾸만 되지도 않게 핑크핑크한 걸 시도하더니.’
한 가지 아쉬운 건, 헬멧이 없어 투구로 대신했다는 거였다.
그래도 핑크색 천을 덧대서 깔맞춤을 했다.
마사가 깜찍한 자신의 애마를 손으로 한번 쓸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좌석에 척 하니 앉는데, 원래부터 타던 것인 양 자연스러웠다.
“아가씨, 고마워요.”
“탈 줄은 알아?”
“후후, 제가 왕년에 속도를 좀 즐겼습니다.”
“으음?”
투구를 받아 쓴 마사는 주저 없이 핑크 애마와 한몸이 되어 멀어졌다.
이쯤에서 알레스는 특급 유모 마사의 과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에서 보기 드문 자유연애 신봉자이며, 배운 여자이고 말술에 스피드광이기까지.
대체 왜 하필 본업이 유모란 말인가.
“와, 빠르네요. 벌써 안 보여요.”
밤비 경이 마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한가해지면 우리도 한번 태워 달라고 해 보자고요.”
알레스가 웃으며 말하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밤비 경이 물었다.
“레이디도 속도가 빠른 걸 좋아하시나요?”
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알레스는 새삼 생각해 봤다.
매일 쌩쌩 달리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으니, 자신도 여기 사람들 사이에선 속도광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응, 속도를 즐기는 편이죠.”
알레스는 별생각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밤비 경은 알레스가 나눔장 사무실로 들어간 사이, 급히 서신을 써서 보냈다.
오후 2시 전이니 오늘 안에 메르세데스령에 배달될 것이다.
* * *
알레스와 밤비 경, 헤라클레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스피드광 마사까지, 사무실 탁자에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함께 했다.
나눔장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헤라클레스가 갓 구운 스콘을 가지고 나왔다.
고소한 버터향이 사무실 가득 퍼졌다.
바깥엔 벌써부터 저녁 배식을 기다리는 줄이 생겨나고 있었다.
쌉싸래한 홍차 한 모금에 겉바속촉 스콘을 음미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이 시끌시끌해졌다.
“무슨 일이지?”
네 사람 모두 창가로 몰려갔다.
주인 아가씨가 일어섰기에 그녀의 호위 기사, 유모, 파티시에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었다.
“거지새끼들이 다섯이나 몰려와서 싹쓸이해 가려는 거야?”
윽박지르는 쪽 패거리들은 입도 거칠고 인상도 험악했다.
그들이야말로 사지육신이 멀쩡하다 못해 지나치게 건장해 뵈는 게, 굳이 이 줄에 있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행크 씨, 제발 부탁드릴게요. 어린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당하는 쪽이 애원했으나 킬킬거리는 비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저놈의 보육원을 싹 밀어 버려야 하는데.”
“저런 허름한 보육원은 제도의 수치라고.”
“그나저나 너희 계집애야, 사내야?”
알레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창밖으로 목을 빼고 소리쳤다.
저런 허접한 놈들 때문에 내 스콘이 식어 빠지게 할 순 없지.
“소동이 일어나면 배식 중단합니다.”
그러자 윽박지르던 험상궂은 패거리는 물론, 등을 보이고 서 있던 괴롭힘 당하는 쪽도 알레스를 향해 돌아섰다.
‘아니, 저 사람들 뭐야?’
알레스는 돌아선 이들을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