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영지민이 집착해서 곤란하다
밤비 경의 커다란 밤색 눈은 호소력이 있었다.
“아시겠지만 메르세데스령은 국경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맞다. 그래서 공작은 연중 이백 일을 전장에서 산다고 했지.
입김이 얼어붙고 혼잣말을 하면 반짝반짝한 결정이 되어 떨어지는 계절에만 겨우 무거운 갑주를 벗고 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작 전하께선 자신을 돌보실 겨를이 없습니다. 영지민 모두 전하의 건강과 안위를 걱정하는 형편이지요.”
“와, 전하께서 영지민 사이에 인기가 아주 좋으신가 봐요.”
알레스가 농담 삼아 가볍게 내뱉은 말에 밤비 경이 무섭도록 진지한 궁서체로 말했다.
“인기가 아니라 애정입니다.”
알레스는 잠시 멍해졌다.
저게 무슨 뜻이지?
“영지민들은 공작 전하를 어버이처럼 신뢰하고, 반려처럼 아끼며, 아들처럼 걱정하고 있어요.”
이런 소리는 살다 살다 처음 듣는다.
아무리 영주가 위대하고 존경스러워도 그렇지.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집단으로 세뇌당한 것도 아니고.
영지민 모두가 공작빠라니.
집착남이니 집착하는 폭군이니 하는 건 들어 봤어도 집착 영주민은 처음이다.
“오로지 영지를 위해 헌신할 줄 밖에 모르던 전하십니다. 그런 분이 충동적인 일탈로 몸을 축내신 걸 알면, 영지민들의 염려가 대단할 겁니다.”
아무래도 공작의 인기는 영지 한정인가 보다.
영지민들이 이토록 그를 애지중지하며 따르니 공작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몸을 아끼지 않은 거겠지.
?저주 받은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대요.?
언젠가 자신이 공작에게 이런 말을 했던 거 같다.
조금은 괴상해 보이는 영주와 영주민의 관계였지만, 어쩌면 공작은 이미 행복한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알레스는 생각했다.
밤비 경이 저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타박하는 걸 보면, 공작을 향한 영지민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기울어지고 꽉 막힌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교계라는 허황된 사막에서 신기루 같은 인기를 쫓는 거보다 영지민의 투박한 염려를 사는 쪽이….
어쩌면 더 가치 있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교계에서 공작을 띄운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띤 내가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어도 되나?
어떻게든 공작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어 계약을 유지하고 고정 수입을 천년만년 가져가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령 주민들이 어젯밤 일을 알게 된다면, 알레스는 착실한 도련님을 꾀어낸 역적 취급을 받을지 모르겠다.
“걱정 말아요, 밤비 경. 안 그래도 다시는 그러시지 말라고 단단히 말씀드렸습니다.”
“과연 전하께서 그 말을 순순히 들으실지…. 은근히 고집이 세시거든요.”
아, 알았다.
알레스는 속으로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밤비 경의 까칠한 눈빛이 무엇과 비슷한지 생각났다.
저것은 빙의 전 아침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던 꼬장꼬장한 시어머니의 눈빛!
알레스는 미래의 메르세데스 공작부인에게 깊은 동정심이 일었다.
그녀에겐 영지민 전체라는 전무후무한 시월드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공작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엄청난 시집살이를 하게 생겼잖아?
쯧쯧.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참 고생이 많겠네.
알레스는 그 불쌍한 레이디를 잠시 애도했다.
밤비 경은 알레스의 다음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혹시 경은 호위 기사를 가장한 감시자가 아닐까.
아무래도 자신이 아닌 공작을 불미스런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러 온 사람 같았다.
“메르세데스의 주민들은 영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거 같아요.”
알레스가 감탄스런 얼굴로 말하자 밤비 경의 밤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의외의 반응이라는 표정이었다.
“네, 뭐 우리 영지민들이 좀 그런 편이지요.”
“좋아 보여요.”
“네?”
“자신의 터전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밤비 경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알레스를 쳐다봤다.
흠,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군.
그렇다면 좀 더 강도 높은 아부를.
알레스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거긴 겨울이 아름답다면서요? 추운 곳은 추울 때가 더 매력 있는 법이지요. 전하가 그랬어요. 너무 추워서 입김이 바삭바삭 얼어붙은 곳이라고.”
“네…. 설령 몸은 먼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내가 그곳 사람이게 하는 기억들이 있지요.”
밤비 경의 눈이 그윽해졌다.
그걸 본 알레스가 녹안을 빛내며 얼굴을 바짝 디밀었다.
“그런 고향의 기억들과 아름다운 자연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메르세데스령은 이곳 제도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곳은 아니에요.”
“모든 곳이 제도 같을 필욘 없어요. 거긴 거기만의 매력이 있는 거죠.”
“그럴까요?”
“방금 얘기한 겨울 풍경이 그런 거죠. 입김이 바삭바삭 얼어붙고, 누군가에게 고백의 말을 하면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떨어지고.”
“그건 늘 있는 일인걸요.”
“그곳 사람들에겐 일상이겠지만, 외지인들의 귀엔 무척 환상적으로 들리거든요.”
“아….”
“겨울엔 너무 추워서 전쟁도 쉰다면서요. 새하얀 눈과 수정처럼 맑은 얼음, 청정한 바람…. 바로 메르세데스령의 겨울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는 거예요!”
밤비 경의 얼굴에 기대가 번지는 게 보였다.
“그런 말씀은 처음 들어 봐요. 너무나 낯선 얘기지만 가슴이 뛰어요. 레이디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
밤비 경의 눈빛과 표정과 말투가 어느덧 비즈 공예와 검 튜닝 얘기를 할 때처럼 바뀌어 있었다.
“이래 봬도 내가 그런 일 전문가거든요. 공작 전하와도 바로 이걸로 계약을 맺은 걸요.”
“그런 일 전문가요?”
“가치를 찾아주고 널리 알리는 일이요.”
밤비 경에게 공작과 영주민의 괴이하고 끈끈한 애착 관계에 대해 들으며 알레스는 이미 견적을 뽑았다.
보아하니 공작만 공략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겠다.
공작과 영주민의 관계가 이미 견고하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태라면?
오케이, 영주민까지 묶어서 간다.
공작과 영지를 세트로 매니지먼트 하는 거다.
생각해 보면 두 개는 애초에 별개가 아니라 서로에게 속한 거니, 홍보의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영주민까지 구워삶는 것만이 살길이다!
우선 밤비 경부터.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메르세데스령의 주민들에겐 너무 익숙해서 특별한지 모르는 보물들을 오히려 외지인인 내가 찾아내는 거지요.”
“어떤 보물들이 있을지 저도 궁금한데요?”
“그렇게 찾은 보물들을 또 외지인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으로 알리는 거예요. 일종의 포장술이라고 할까요?”
“흠… 그렇게 메르세데스령에 외지인들이 오기 시작하면 영지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질 수 있다는 거지요?”
역시 실력파 기사답게 정곡을 찌르고 들어온다.
“바로 그거예요, 밤비 경. 중요한 건 거기서 수익이 발생해야 한다는 거예요. 남아도는 제도 귀족들의 돈을 털어 보자는 거죠. 남 좋은 일만 시킬 순 없잖아요?”
알레스가 사악하게 웃었다.
북부는 농사를 짓기엔 환경이 척박했다.
더욱이 연중 이백 일은 외적이 도발을 일삼았다.
그 탓에 영지민들의 생활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공작을 사랑하는 데다 소박하고 우직한 북부인의 기질 덕에 한마음으로 참아 내고는 있었지만, 영지의 형편이 나아진다면 모두 기뻐하리라.
“레이디 페레티, 정말 메르세데스의 형편이 나아질 수 있을까요?”
밤비 경은 알레스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럼요. 생각을 바꾸면 다 돈이 된다고요. 농사를 짓기엔 척박한 북부의 환경이 도시인들에겐 휴양과 치유에 좋은 청정 환경이 될 수 있어요.”
“아, 그러네요!”
“겨울이면 온 영지를 뒤덮어 불편을 안기던 눈과 얼음이 외지인에겐 환상을 자극하는 장치가 될 수 있고요.”
알레스가 밤비의 검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밤비 경이 튜닝한 검집만 해도 제 눈엔 북부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로 보여요.”
“제 검집이요?”
“투명한 크리스털과 반짝이는 비즈로 설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검. 메르세데스령을 여행하는 귀족이라면 반드시 사 가는 대표적인 기념품이 될 수 있겠죠.”
안 그래도 큰 밤비의 눈이 더 활짝 커지며 자신의 검집처럼 빛을 발했다.
“이러다 다들 농사 안 짓고 관광업에만 몰릴까 봐 걱정인걸요.”
알레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디 페레티, 부디 전하와 영주민들을 도와주십시오.”
충직한 호위 기사 밤비 경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부탁했다.
“아휴, 일어나세요, 밤비 경.”
알레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렇게 힘들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계약서와 계약금만 있으면 되는 일이에요.”
그 말에 밤비 경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알레스를 올려다봤다.
밤비답지 않게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알레스는 조금 심장이 아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돈 관계는 철저히 하는 게 뒤탈이 없거든요.”
“…예에, 물론이죠.”
“무슨 일이든 돈 들인 만큼 나오거든요. 그래서 공짜는 못써요.”
“맞는 말씀이에요. 생각해 보니 저도 수고료를 제대로 받았을 때 검집 작업이 더 예쁘고 촘촘하게 나오더라고요.”
“역시 밤비 경은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참, 경도 절대 헐값이나 공짜로 작품을 넘기지 말아요. 가치를 깎지 말아요.”
밤비 경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지 알리기 말인데요, 할인은 되죠?”
윽, 강적이다.
“이미 전하와 맺으신 계약에 항목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해서, 기존 고객 혜택 좀 부탁드릴게요.”
아니 이 언니, 많이 깎아 본 솜씨네.
“끄흠, 그간 거래한 정이 있긴 하지요.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는 쪽으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따지고 보면 저도 계약의 일부로 이곳에 온 거 아니겠어요? 제가 두 배, 세 배로 일하겠습니다. 원하시면 레이디의 손가방을 비즈로 꾸며 드릴게요.”
“원해요.”
밤비 경이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 * *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레이디야.’
딱딱한 침대에 팔을 베고 누운 밤비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특이하다는 소리를 남부럽지 않게 듣는 편이지만, 자신은 귀족이 아니지 않은가.
귀족, 게다가 레이디들은 사회적인 틀과 예법을 넘어서기가 더욱 힘든 법.
공작 전하도 레이디 페레티의 저런 면에 끌리신 걸까.
밤비 경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과 가슴을 식히느라 창을 열어 두어야 했다.
공작 전하도 여인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분이었구나….
레이디를 보기 위해 북부의 전장에서 여기까지 오신 걸 알았을 땐 정말이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안했다.
게다가 소문으로 파악한 레이디 페레티는 큰 결함이 있어 황제에게 이혼 당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직접 만나 본 후 소문이 틀렸다는 걸 금세 알았다.
자신의 검집에 대해 이야기할 땐 범상치 않은 분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 같다.
공작부인으로는.
처음엔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훼방꾼에서 조력자로 돌아설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공작 전하가 레이디 페레티를 더 좋아하시는 거 같다.
공작빠 영지민으로서 조금 속상하기는 하지만….
잠깐.
밤비 경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공작부인이 영지를 위한 일을 하면서 보수를 달라고 하진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