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속살이 참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알레스의 볼을 타고 흘렀다.
“예?”
놀라서 눈이 왕방울만 해진 건 메르세데스 공작이었다.
“아주 잠깐, 숨이 차서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아직 죽진 않았습니다.”
“…아직 안 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래서 여길 왔다고요?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요.”
“보고 싶다는 말이 꼭 제 목소리 같더군요. 그러자 참을 수 없게 됐습니다.”
공작의 꾸밈없는 말이 알레스의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정도는 전장을 비우셔도 되는 건가요?”
“아니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갈 겁니다.”
“뭐라고요?”
농담이라기엔 재미도 없고 목소리도 너무 진지한데?
“잠시라도 보면 좋을 거 같았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요.”
공작의 입꼬리가 다정하게 올라갔다.
알레스가 이불을 걷어차고 나섰다.
“장난해요?”
어이가 없다 보니 말이 짧게 나간다.
“아… 영주의 책임을 소홀히 한 건 저도 반성….”
“아니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공작님 얼굴이 얼마나….”
손으로 감싸 주고 싶은지 알아요?
“…초췌해 보이는지 아세요?”
“전장에서 곧장 오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죠?”
공작이 민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는 거예요. 전장에서 시달리고, 여기까지 오느라 쉬지도 못하시고….”
알레스의 말에 공작의 심해 같은 눈에 물결이 일고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우리 메르세데스의 가주들은 대대로 마법을 쓸 줄 압니다. 그동안 검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요. 보통 사람과는 조건이 조금 다릅니다.”
“그렇지만… 마법을 쓸 때도 기력이 많이 소모된다면서요?”
알레스는 마법 기초 서적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제가 나름 마법 레벨이 좀 돼서요.”
공작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살짝궁 어필했다.
알레스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부담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방정맞게 편지에 그런 말은 왜 써 가지고.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한달음에 달려와 준 그에게 자신도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피로 회복에 좋을 만한….
“저, 전하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보시겠습니까?”
방에는 전부 등받이가 있는 의자뿐, 적당한 의자가 없었다.
“침대에요? 옷이 더러운데.”
“아, 그 옷도 좀 벗어 보세요.”
“옷을요?”
왜 토끼눈이 되시는 건지.
“네. 상의를 최대한 가볍게 해 주세요.”
공작의 상체에 얇은 튜닉 한 겹만 남았다.
“전하, 제가 잠시 뒤에서 다가가겠습니다.”
알레스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공작의 등 뒤에 무릎으로 섰다.
빙의 전에 손이 맵다, 손끝이 야무지다, 아귀힘이 세다는 소릴 좀 들었다.
지압 포인트도 잘 알고 있고.
“전하, 몸에 손을 좀 대겠습니다.”
공작의 등이 움찔 하는 게 보였다.
해치지 않습니다.
“제가 하려는 건 안마라는 건데, 피로 해소에 좋습니다. 긴장도 풀리고 기분도 좋아지고요.”
“아, 예.”
고된 전투를 치르느라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을 터였다.
아주 흐물흐물하게 녹여 드립죠.
알레스는 공작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성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막상 달려들고 보니….
왜 이렇게 잡히는 데가 없어?
전부 다 넓고 커서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얼마나 딱딱한지 손가락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옷을 다 입고 있을 땐 공작이 이렇게 근육 괴물인지 몰랐다.
이 와중에 이 귀족 아가씨의 손은 왜 이리 조막만 한 거야?
알레스는 자신의 작고 고운 손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았다.
고양이 손으로 꾹꾹이 하듯이 깨작대고 있으려니 공작이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안마라는 건 간지럼 태우기군요.”
“…….”
“맞습니다. 간지럼을 태우면 긴장이 풀리고, 웃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지요.”
공작의 사심 없는 맞장구에 알레스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말았다.
안 되겠어, 다른 걸!
알레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공작을 이대로 보낸다면 마음이 너무나 불편할 거 같았다.
안마랑 비슷하고 피로 해소에 좋으면서 변수가 적을 만한 거….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알레스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돌아왔을 땐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있었다.
알레스는 혼자 남아 서성이고 있는 공작에게 말했다.
“이번엔 저쪽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으십시오.”
공작이 머뭇거리며 앉자 그 발치에 대야를 내려놓았다.
“신을 벗으세요.”
“예?”
“어서 벗으세요!”
곧 동이 틀 거다.
알레스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벗겨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세족과 발 마사지를 할 거예요.”
아무리 근육이 단단하다 한들 발바닥까지 근육질은 아니겠지?
척 봐도 대야에 담기지 않을 만큼 왕발도 아니고.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면 만성피로가 풀린대요.”
알레스는 얌전하게 대얏물에 들어가 있는 발 두 개를 들여다봤다.
생각했던 거보다 매끈한 발이었다.
여기서도 발 냄새 대신 새벽 숲의 삼나무 냄새가 날 거 같은, 그런 발이었다.
알레스는 그중 하나를 들어 향기 나는 비누를 칠했다.
구석구석 조심스럽게.
버블버블.
이렇게 공작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작업을 하고 있자니 언뜻 매우 비굴한 모양새가 됐지만, 알레스는 개의치 않았다.
알레스의 마음속에서 공작은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다.
씻겨 줄 발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렇게 발만 마사지해도 온몸의 긴장이 풀린대요.”
공작의 입장은 달랐다.
얼결에 맨발을 내맡기긴 했지만, 알레스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해 있었다.
알레스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간질간질해서 움찔거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썼다.
잘못하다간 그 사춘기 소년이 또 찾아올 거 같았다.
문득 열중하고 있는 알레스의 핑크빛 감도는 갈색 머리와 그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래, 카이트?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작은 고개를 젖혀 괜히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유심히 올려다봤다.
조금씩 몽글몽글 편안한 느낌이 찾아왔다.
지금 내 발을 만지고 있는 이 여자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해를 입은 가문의 영애를 이번엔 자신이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레티가 영애에 대해 들은 소문이나 평판도 몇 가지 있었다.
대공과 정략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실망도 했던 거 같다.
그러다 황제 앞에서 이혼을 선택하는 그녀를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다.
그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레이디 페레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순간 무척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험난한 시간이 그녀의 소중한 걸 망가뜨리지 않아서.
‘우리 참 잘 버텨냈군요.’
공작은 그때 레이디 페레티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꼈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동지애일까?
자신도 똑같이 씻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단했을 레이디 페레티의 발을.
하지만 그 작은 발을 상상하는 걸로도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졌다.
마사지가 다 끝났는지 레이디 페레티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제 맘이 좀 편하네요.”
공작의 얼굴을 살피던 알레스의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효과가 있네요. 안색이 한결 좋아지셨어요. 아깐 조금 창백했는데 지금은 혈색이 돌아왔잖아요.”
공작은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혈색이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혈관, 아니 심장 그 자체가 된 기분입니다.
“고마워요, 레이디 페레티.”
“별 말씀을요.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편하게 알레스라고 부르세요.”
“알레스….”
“네.”
“둘이 있을 땐, 아니 그냥 부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카이트라고 불러 줘요.”
“감히 전하 이름을 막 부르긴 그렇죠.”
“다들 막 부릅니다. 브린도, 멜로먼도, 로잘린까지.”
“그분들이랑 제가 같나요. 알았어요. 눈치껏 부를게요.”
공작의 입꼬리도 시원하게 올라갔다.
암청색 눈이 다정한 빛을 품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과 이름까지 허락하는 넉넉한 마음씀씀이를 보며 알레스는 실감했다.
발 마사지의 효과는 대단하구나.
“편지 자주 드릴게요, 카이트.”
공작이 떠날 때 알레스는 말했다.
“밤비 경이 얘기해 줬어요. 전장에서 받는 편지가 무척 소중하다고.”
고객님, 위문편지 자주 드릴게요.
“대신 약속해 주세요. 제가 혹시 편지에 어떤 경솔한 실수를 하더라도 절대 이번처럼 오시지 않는다고요.”
공작은 가만히 생각했다.
자신이 받은 여심 교육에 따르면, 레이디들은 실용이나 실익보다 감성이라고 했는데….
잠시 주저하던 그가 대답했다.
“알겠어요, 알레스.”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와도 되는 거다.
그렇게 그는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제도의 비에커가를 떠나 북부의 전장으로 향했다.
* * *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에서는 식사를 다함께 모여서 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마사와 헤라클레스는 황궁 음식 나눔장으로 출근했다.
오늘이 바로 음식 나눔장 개장일.
“나중에 봐요, 마사 경, 브레이브 경. 멋지게 해치우자고요!”
알레스의 격려에 마사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개장 준비를 위해 먼저 출발한 거였다.
마사는 황궁 측 사람들을 만나 서류 업무를 싹 처리했다.
외부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준비가 제대로 됐는지,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그 외에도 음식을 제외한 나머지 문제들을 척척 해결했다.
헤라클레스는 음식의 종류와 상태를 점검하고, 가장 적절한 상태로 재조리하고 포장하고 진열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식탁에는 알레스와 호위 기사인 밤비 경만 남았다.
함께 커피 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둘만 남게 되자 밤비 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작 전하가 오셔서 무척 놀랐습니다.”
알레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밤비 경을 쳐다봤다.
어젯밤, 헤라클레스는 술이 약해서, 마사는 너무 많이 마셔서 곯아떨어졌다.
‘주량을 조절한 밤비 경은 공작을 봤구나. 원래 모시던 주군이니 따로 기별을 받았을 수도.’
“제가 레이디의 호위를 명받아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 분이 계약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제가 공작 전하의 일을 봐 드리고 그 대가를 받기로 했어요.”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겠으나, 두 분이 계약 관계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뭐지? 밤비 경의 태도가 이상한 걸?
살짝 도를 넘는 거 같은데?
“솔직히 걱정스러운 마음입니다. 저뿐 아니라 메르세데스의 영지민이라면 모두 걱정했을 일입니다.”
알레스는 밤비 경의 말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뭔가 자신을 원망하는 투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