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 말이 내 마음과 같아서
회원제 커피하우스 ‘더 코스모스’.
황족과 고위 귀족 등 소수에게만 허락된 그곳에서 알레스와 카르티에 공작은 다시 만났다.
회원제는 좋은 전략이었다.
알레스는 공유 마차 사업에도 이 전략을 쓰자고 머릿속에 메모했다.
물론 이곳은 폐쇄적인 럭셔리 멤버십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공유 마차와는 정서의 결이 다르다.
하지만 회원제라는 게 별건가.
매끈하게 뽑아낸 멤버십 카드 하나만 있어도 해결된다.
카드 색깔은 기왕이면 골드로.
거기에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하면 끝.
귀족들은 가격 할인이나 1+1 같은 행사보다, 많이 쓰면 많이 받는 차등적인 혜택을 좋아할 거다.
어머, 생각 없이 쓰다 보니 마일리지가 이만큼 쌓였네? 성가셔라.
요런 느낌?
공유 마차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멤버십 특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게 할 것.
그 특혜의 핵심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취향 쩌는 한정판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에 푹 빠진 알레스가 커피하우스 구석구석으로 바쁘게 눈길을 주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잊진 않으셨죠? 제가 있다는 걸.”
카르티에 공작이 참다 참다 한마디 했다.
살면서 쏟아지는 눈길 때문에 피곤해한 적은 많아도….
눈길을 구걸하긴 네가 처음이야!
지난번 처음 봤을 때도 부산하게 한눈팔고 중얼거리면서 딴생각 하느라 바쁘더니.
어떻게 나 카르티에를 눈앞에 두고 그럴 수가 있지?
혹시 시력에 이상이 있나?
바쁜 애인에게 나 좀 봐 달라고 투정부리는 기분이야.
콱 마차 빼라고 할까 보다.
“아, 공작 전하. 죄송해요. 잠깐 사업 생각 좀 하느라.”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니 봐드리겠습니다.”
카르티에가 특유의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매력을 발산해 보았다.
방심하면 날아드는 카르티에의 버터 멘트에 알레스가 숨을 흡 들이켰다.
나 역시 주차장 주인이니 봐드린다.
“오늘 뵙자고 청한 건 마차 때문이에요. 우선 저희 마차를 주차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알레스가 인사하자 카르티에는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느긋하게 손을 저었다.
“별 말씀을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뭐, 고마워하는 마음이야 잘 알겠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요, 레이디.
아니나 다를까 알레스의 녹안이 카르티에의 적안에 곧장 부딪쳐 왔다.
카르티에는 이것도 당황스러웠다.
웬만한 여자들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흠모한다며 쫓아다니는 영애들도 막상 그가 작정하고 응시하면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눈길을 피했다.
뭐 눈이 멀 거 같다나, 촤하하하.
그런데 레이디 페레티는 저리 맹숭맹숭한 눈으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로서는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더욱이 그 마차들은 저희 페레티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재원인걸요.”
“아, 마차를 처분하시려고요? 황실 마차라 제값 받고 잘 파셔야 할 텐데. 믿을 만한 중고 마차 길드를 소개해 드릴까요?”
오늘의 용건은 이거였나?
조금 싱겁네.
카르티에가 자신과 줄이 닿아 있는 길드를 소개해 주려던 그때.
“아, 처음엔 저도 그럴까 했는데, 생각을 좀 바꿨어요.”
알레스가 슬슬 시동을 걸었다.
“대여 마차 사업을 해 보려고 하는데, 영업용 마차를 전하의 저택에 주차해도 되는지 마음에 걸려서요.”
대여 마차?
요즘 웬만한 귀족들은 마차가 몇 대씩 있어서 장사가 잘 안 될 텐데?
카르티에는 사업 초보들이 흔히 하는 실수를 레이디 페레티가 하는구나 싶었다.
제대로 된 시장 조사 없이 경솔하게 시작했다 자금만 탈탈 털리는 게 아니라 멘탈까지 탈탈 털리는.
이렇게 되면 황제한테 뜯어낸 위자료가 바닥나는 거도 시간문제다.
“상관없습니다. 영업용 마차를 주차하시는 건. 그런데 대여 마차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지요.”
“그런가요?”
“잘못하면 투자비용도 건지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금이 여유롭다면 모를까, 그 사업에 가문의 생존이 걸렸다면 솔직히 말리고 싶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알레스가 얼굴을 조금 더 바짝 디밀었다.
이거도 황당하다.
보통은 카르티에가 장난삼아 영애에게 얼굴을 쓱 내밀면, 영애 쪽에서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 치곤 하는데 말이다.
“보통의 대여 마차로는 승산이 없을 거 같아서 이런저런 차별화 전략을 생각해 봤거든요.”
카르티에가 혹시나 하고 동공을 유혹적으로 풀어 헤치며 자신의 필살 눈빛을 던져 봤지만, 알레스는 휘휘 쳐내고 자기 용건에만 집중했다.
뭔가… 거세당한 기분이야!
“그중 하나가 이거랑 관련이 있는데요.”
알레스가 마시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저희 집 1층 한쪽에 간이 카페를 차려놓고 대여 마차가 중간에 들르게 할까 싶거든요. 빵이나 커피를 살 수 있게.”
갑자기 대여 마차에서 카페 얘기로?
“다행히 빵은 제국 최고의 명장이 만든 굉장한 걸 확보했거든요. 이제 커피가 남았는데….”
아, 진짜 부탁은 커피였구나.
카르티에가에서 커피를 출시한 걸 알았군.
“전하께서 커피 사업을 시작하신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커피가 ‘키스 오브 카르티에’지요?”
“하하, 눈치가 빠르십니다. 맛이 어떤가요?”
“음, 나쁘지 않아요. 저희 천타빵이랑도 궁합이 괜찮을 거 같고.”
자신의 간이 카페에서 내 커피를 팔게 해 달란 소린가?
“아무리 전하라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신 거니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시죠?”
“그런 짜릿함에 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마음이 쓰여서 그냥 지나칠 수 없겠더라고요. 전하께 은혜를 입은 거도 있고, 이웃사촌이기도 하고.”
어째 말의 뉘앙스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주차장의 답례로 전하의 커피를 저희가 납품 받겠습니다. 천타빵의 명성에 살짝 기대어 보시지요. 어떤 커피든 풍미를 살려 줄 겁니다.”
무어라고오?
나한테 기회를 달라는 게 아니고, 자기가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천타빵도 천타빵이지만, 이 대여 마차 사업이 곧 제도에 엄청난 바람을 몰고 올 겁니다. 이 대박 사업의 꿀을 전하께도 맛보게 해 드리는 게 은혜를 아는 인간의 도리겠지요.”
갑자기 똑바로 부딪쳐 오는 레이디 페레티의 녹안이 마녀의 눈 같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부담 갖지 마시라니까요. 은혜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이웃끼리 나눠 쓰는 거지요.”
“아, 그런 표현이 좋으시다면, 저도 전하와 나눠 쓰겠습니다. 대박의 행운을. 그때 그러셨죠? 양쪽이 모두 좋은 거래, 마음의 교류를 원하신다고.”
저런 날강도 레이디가 있나.
주차장을 공으로 뜯어낸 거도 모자라 커피까지 은근슬쩍 가져가시겠다?
“아, 원하시면 전하가 커피를 공급하는 모든 커피하우스에 천타빵을 넣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 무리하면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의리라고 해 두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그럼 이 천하의 카르티에가 호락호락 넘어가… 준다.
재미있고 흥미로우니까.
무엇보다 그 대박 사업이 완전히 허튼 소리는 아닌 거 같은 사업가의 촉이 온다.
행운이 굴러 들어왔으면 잡는 게 당연한 법.
카르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오늘의 거래도 만족스러웠습니다.
* * *
이렇게 공유 마차 사업을 위한 준비를 또 하나 마쳤다.
커피 맛도 괜찮았지만, 중요한 건 물론 카르티에의 이름이다.
카르티에가 엮이면 홍보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니까.
자신이 카르티에와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귀족 사회에서 알레스를 쉽게 업신여기진 못하리라.
썩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자존심은 성공한 후에 세워도 된다.
생각해 보니 대단한 하루였다.
드디어 황궁을 벗어나 우리 집에 왔다.
실력 있고 아름다운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고, 준비하던 사업은 조금쯤 앞으로 나아갔다.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고….
잊고 있던 근심거리가 고개를 들었다.
후회로 봉인된 그 편지.
에잇, 뭐 ‘사랑합니다, 고객님.’도 있잖아!
원래 고객님이란 보고 싶고, 궁금하고, 평생 함께하고 싶고 그런 거지.
그보다 새 집에 온 첫날이니 우리끼리라도 조촐한 파티를 열어야겠다.
황궁에 있을 때 약속대로 섭섭지 않게 제공받은 주류들을 모아두었다 떠날 때 챙겨서 나왔다.
덕분에 조촐한 파티여도 술은 부족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와인 한 잔 마시더니 온몸이 새빨개져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특급 유모 마사는 역시나 말술이었고, 밤비 경은 절제했으나 결코 술이 약하지 않은 듯했다.
빙의 전 삶에서는 회식 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피나는 후천적 노력으로 주량을 늘린 알레스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찍 잠자리로 샜다.
“끄으으….”
알레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제 눈사람 악몽에 나왔으면 됐지, 또 나오냐.
메르세데스 공작이 시커먼 차림으로 침대 옆에 앉은 채 알레스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위에 눌린 거 같았다.
아무리 스캔들에 휘말린 게 억울해도 그렇지.
북부 공작의 한이 북풍한설보다 매서웠다.
“잘못했어요, 고객님….”
알레스는 목소리를 쥐어짜 공작의 망령에게 사죄했다.
역시 진심을 다해 뉘우치고 사과하면 북부 공작의 망령도 웃는다 했던가.
그가 다정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애처롭게….”
정말 소름이다.
어쩜 이렇게 실감날까.
부드러운 듯 힘이 깃든 단정한 중저음이 너무 디테일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알레스는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맞춰 보았다.
잘생긴 이목구비가 은은한 촛불을 받아 더욱 분위기 있어 보였다.
머리는 투구에 눌린 듯 작은 까치집이 생겼고, 얼굴은 피곤으로 해쓱해졌으며, 옷도 땀에 절고 흙탕물이 튀어 더러웠다.
전장에서 곧장 달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 섹시해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지.
일렁이는 촛불 때문인가?
욕구불만인가?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고요한 암청색 눈이 매우 요망해 보이기까지.
망령이 저렇게 잘나도 되는 건가.
이번 꿈은 아무래도 음란마귀 버전인 듯한데….
알레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이디 페레티?”
“…공작 전하?”
“불쑥 찾아와서 놀라셨나요?”
“왜 여기 계신 거죠? 꿈인가요?”
그는 작게 미소 짓더니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편지를 받았습니다.”
“…….”
“거기서 어떤 말을 발견했습니다.”
“……!”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이 내 마음과 같아서.”
알레스가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진짜 공작님?”
“예, 레이디 페레티.”
“전쟁 끝났어요?”
“아직이요.”
갑자기 알레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에메랄드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저… 혹시…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