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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28화 (28/120)

28화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아

밤색의 큰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단아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기사 복장을 갖춘 걸로 봐선 메르세데스가에서 보낸 호위 기사가 맞는 듯한데….

알레스와 마사는 조금 당황했다.

기사라고 하니 자동으로 젊은 남자를 생각했던 거 같다.

게다가 믿을 만한 실력자라고 하니 왠지….

베일 듯 날카롭지만 빛나는 이목구비에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길고 잘 빠진 다리 같은 걸 기대했던 거 같기도.

돌아보니 근거 없는 기대였다.

여자 아니라 남자가 왔대도 꼭 그런 스타일이란 법은 없지.

하지만 알레스와 마사는 묘한 실망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 와중에 헤라클레스의 입만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할 호위 기사가 오면 누구보다 잘 대해 주리라던 다짐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겼다.

레이디와 유모는 한마음이 되어 그녀를 살폈다.

정녕 실력 있는 남자 기사가 하나도 없었던 걸까?

굳이 기어코 흔치도 않은 청초한 여자 기사를 이리로 보내야 했을까?

이런 인재를 아낌없이 내어준 메르세데스의 도를 넘는 친절에 알레스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감사했다.

공작은 정말 눈치가 지독히도 없는 걸까?

아니면 눈치가 지나치게 좋은 걸까?

하여간 세상은 내가 스포츠맨 스타일의 젊은 남자와 붙어 다니는 꼴을 못 본다니까!

알레스와 마사가 겪는 방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온 호위 기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밤비라고 불러 주십시오, 레이디 페레티.”

“아, 밤비 경. 이름이 참 꽃사슴처럼 곱네요.”

이름처럼 곱게 웃은 밤비 경은 곧 한쪽 무릎을 꿇고 오마주 자세를 취했다.

“레이디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레이디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이 심장의 더운 피를 대지에 쏟는 것을 최고의 영예이며 영혼의 기쁨으로 삼을지니.”

알레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어휴, 그런 무서운 말 말아요. 쏟긴 뭘 쏟아. 일어나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밤비 경은 방금 살벌한 말을 쏟아낸 사람 같지 않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신하게 넘겼다.

“자, 인사 나누고 출발해 볼까요?”

알레스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했다.

별궁의 고용인들과 작별 인사를 마친 알레스 일행은 마침내 황궁 문을 벗어났다.

위자료로 받아낸 세 대의 마차 중 두 대는 각각 마사와 헤라클레스를 태우고 곧장 카르티에 공작저로 향했다.

알레스와 밤비 경이 나머지 한 대에 타고서 비에커가 221B에 있는 조각 케이크 모양의 저택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알레스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밤비 경을 찬찬히 관찰했다.

짙은 자줏빛 머리칼과 커다란 밤색 눈, 기사답게 단정하고 절도 있으면서도 뭔가 청초한 분위기가 한 송이 아이리스 같았다.

‘내가 밤비 경을 보호해 줘야 할 거 같아.’

아이리스의 기사는 과묵한 편인 듯했다.

말없이 호위에 집중할 뿐이었다.

실은 아까부터 알레스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전반적으로 시크한 분위기 속에서 매우 튈 수밖에 없는 블링블링함.

밤비 경이 지닌 검의 검집이 화려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알알이 영롱한 구슬과 반짝이는 금속, 광택이 아름다운 광물 등으로 섬세하게 장식된 검집.

알레스는 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저런 건 빙의 전에도 빙의 후에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단순히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예술품들이 그러하듯 매우 참신한 아름다움이 새로운 기쁨에 눈뜨게 했다.

이제 보니 손잡이 끝에 달린 매듭도 평범치 않았다.

“그건 어떤 장인의 작품인 건가요?”

알레스가 검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시종 차분하던 밤비 경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검집을 꾸미는 취미가 있습니다.”

“네? 그렇다는 건 저 검집을 직접 꾸몄다는 얘기?”

“심심풀이 잔재주지요.”

“잔재주가 아니라 이건 수준급 솜씨인데요? 실력자라고 하더니 이런 쪽으로도 비상한 재능이 있었네요!”

이래저래 예상을 뒤엎는 호위 기사였다.

“가까이서 좀 봐도 돼요?”

알레스의 말에 밤비 경은 흔쾌히 검을 건넸다.

“가까이서 보니 더 기가 막히네요. 이건 예술품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진심이에요. 어떤 경지에 오른 느낌이랄까.”

알레스의 칭찬에 밤비 경의 서늘하던 눈이 소녀처럼 반짝거렸다.

“레이디께서도 혹시 이런 거 좋아하시나요? 저는 비즈 공예 동호회랑 검 튜닝 동호회에 소속돼 있거든요. 가끔 주문을 받아서 검집이나 검자루를 꾸며 주기도 한답니다.”

“역시! 감각이 남다르다 했어요.”

밤비 경이 갑자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다른 데 시간을 쏟는 게 마음에 걸리시면….”

“천만에요. 오히려 날 호위하는 것보다는 이쪽으로 더 정진했음 좋겠어요.”

잘하면 굉장한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겠어.

알레스의 말에 밤비 경의 눈이 다시 활짝 커졌다.

“역시…. 공작 전하께서도 당부하시길, 레이디께선 한 가지 일을 고집하는 사람보다 두루두루 일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를 원하신다고 하셨어요.”

음, 그랬지.

그리 순수하기만 한 주문은 아니었지만.

그걸 또 기억해서 예술적인 감각과 손재주로 검 튜닝 투잡을 뛰는 호위 기사를 일부러 보낸 걸까.

눈치 없다고 욕한 거 미안해지게….

“하지만 결코 본분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레이디를 완벽하게 호위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밤비 경이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중요한 건 밤비 경 덕분에 명품 사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거라니까.

한정판으로 출시하면 귀부인들이 아주 몸이 달아 난리도 아닐 테지.

사교계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명품 장사인데.

그동안은 알레스 자신이나 마사나 럭셔리랑은 통 친하지 않아서 선뜻 일을 벌일 수 없었다.

“참, 공작 전하께서 새로 옮겨가는 저택의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맞아. 우리 대어 고객님을 챙겨야지.

이렇게 훌륭한 호위 기사도 보내 주시고, 고정 수입도 약속해 주신 키다리 공작님!

“그래요. 내가 서신을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춥고 황량한 전장에서는 따뜻한 곳에서 보내온 편지 한 장이 큰 위로가 되거든요.”

“아….”

생각해 보니 그는 지금도 살벌한 전장을 누비고 있겠구나.

고달픈 삶이다.

군부대에는 역시 위문편지가.

마차가 비에커가의 ‘피스 오브 케이크’ 하우스에 도착했다.

알레스와 밤비 경이 내린 후 이 마차 역시 카르티에 공작저로 향했다.

황궁을 나온 고급 마차 세 대가 모두 카르티에 공작저의 너른 부지에 주차를 마쳤다.

알레스는 새 집의 자기 방에 앉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저택 1층 한쪽을 간이 카페로 바꿔야 하고, 공유 마차 영업에 대해 주차장 주인인 카르티에에게 언질을 넣고.

양심은 밥 말아 먹은 기레기 하나 소개 받아야 하고, 곧 개장할 황궁 음식 나눔장의 이름 설문 결과가 나왔는지 체크하고.

이웃에 이사 인사로 천타빵 돌리고….

하지만 당장 해야 할 건 무엇보다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편지 쓰기.

제국에선 매일 오후 2시까지만 우편물을 접수한다.

그다음은 전국 각지로 배달.

우편물 텔레포트 방식을 채용해 하루 안에 배달이 깔끔하게 완료된다는 홍보물을 본 적이 있었다.

알레스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우선 매니저가 고객님께 할 법한 형식적인 인사를 몇 마디 쓰고.

한참을 고심한 다음.

새로 옮겨온 집의 주소를 쓰고.

한참을 고심한 다음.

매니저가 고객님께 할 법한, 건강과 행운을 비는 복붙한 듯한 인사를 썼다.

편지를 봉투에 넣은 후 청록색 실링왁스를 떨어뜨리고 페레티가 인장을 찍어 봉인했다.

몇 분 후.

알레스는 조심스레 봉인을 뜯고 있었다.

봉투에서 꺼낸 편지지 한 귀퉁이에 아주 조그맣게, 최대한 안 보이게, 여차 하면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게, 그냥 얼룩처럼 보이게 한마디 덧붙였다.

[보고 싶습니다.]

이만하면 안 보일 거야.

게다가 누가 누구를 보고 싶다는 건지, 매우 불분명하잖아?

알레스는 흡족한 얼굴로 편지를 다시 봉인한 후, 1층에 있는 우편물 바구니에 넣었다.

한 시간 뒤.

알레스는 방방 뛰면서 편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마사가 길 건너 다섯 건물 지나 있는 우편함에 넣었다고 하자 알레스가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우편물 수거 시각 5분 전.

마침 우편배달원과 알레스가 거의 동시에 우편함 앞에 도착했다.

배달원이 우편함을 열고 편지를 수거할 때 자신의 편지를 빼낼 생각이었다.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배달원은 아까부터 수상한 사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우편물 절도가 극성이라더니.

배달원은 바람 같은 손놀림으로 절도범에게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편지를 수거한 뒤, 역시 바람처럼 움직였다.

단 한 통의 편지도 길을 잃지 않도록!

배달원의 비호와 같은 움직임에 알레스는 버벅거리다 뒤늦게 팔을 뻗어 보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편지는 오늘 중으로 메르세데스 공작에게 깔끔하게 배달될 것이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알레스는 연유와 설탕과 꿀을 잔뜩 채운 빵으로 당을 충전했다.

왠지 눈 밑이 퀭해진 거 같았다.

그때 거리에서 끼아악 끼아악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 떼가 출현했다면 카르티에 공작의 행차가 있다는 뜻?

탁상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거리에 사는 동안 매일 오후 3시면 까마귀 소리로 설정된 카르티에 알람을 들을 수 있겠군.

안 그래도 알레스는 카르티에 공작을 만날 일이 있었다.

그 집 앞마당에 주차시켜 놓은 마차로 영업을 할 텐데, 마당 주인에게 한마디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약속을 따로 잡을까 했는데, 집 근처에 떴을 때 잠깐 이야기 나누면 될 거 같았다.

거래할 것도 있고 말이다.

알레스는 창밖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카르티에가 어떤 퍼포먼스를 선보이려나.

잘 보고 큐시트를 따 두어야 할 텐데.

이미지 관리에 있어서는 카르티에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인정!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카르티에 역시 알레스에게서 곧 기별이 오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주차장을 내어 준 일에 대해 아마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을 테고.

사업과 관련해 몇 가지 팁이나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을까?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게 뭔지 궁금하겠지?

이혼녀 몸으로 사교계나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을 테지.

카르티에는 조각 케이크 모양의 집 앞을 지나며 이런저런 예상을 했다.

우아하면서도 퇴폐미 넘치는 미소를 주변에 날리며.

‘붉은 물보라의 매혹’ 멤버들이 까마귀 울음소리를 내며 거리를 또 한 번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알레스의 뻔뻔함에 기가 막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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