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네가 떠나지 않으면 좋겠다
순간 뭐에 쓰인 게 틀림없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개탄스러운 짓을 하고 말았다.
알레스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장식품들을 올려놓은 진열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황실의 색인 보라색 벨벳 천으로 덮인 커다란 테이블이었다.
그 아래 쪼그리고 앉아 바로 후회했다.
대체 왜!
뭐가 무서워서 이런 짓을 했담.
그냥 가볍게 마지막 인사라도 나눴으면 자연스럽고 좋았을걸.
괜히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먼저 도망치고 말았다.
아무리 황제가 싫어도 그렇지.
싫으면 차라리 당당하게 싫은 티를 내든가.
알레스가 스스로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마도 황제가 근처까지 온 듯했다.
알레스는 황제가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발소리가 하필 자신이 숨은 진열대 앞에서 딱 멈추는 게 아닌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알레스의 이마가 축축하게 젖어오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인생 최대 흑역사를 생성할 위기에 처했다!
물론 스스로 판 무덤이다.
알레스는 버텨 보기로 했다.
황제는 오늘따라 새삼 진열대 위 장식품을 감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혹시 자신의 기척을 느꼈더라도 못 본 척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황제 입장에서도 꼴 보기 싫은 상대이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부질없는 기대였다.
자신을 해치려는 자객으로 생각해 검으로 찌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알레스는 계속 버텼다.
스스로 기어 나가지는 않으리라.
끌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그런데 어째 황제도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이건 멘탈 싸움이야!
알레스는 창피함을 승부욕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마침내 황제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떨어졌다.
“나와.”
알레스는 주춤주춤 밖으로 나갔다.
눈부시게 차려입은 황제가 자수정 같은 눈으로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뭘 하는 건가?”
“…….”
“짐을 피한 건가?”
그렇다.
“폐하께서 별로 유쾌하시지 않을 듯하여….”
“그러니까 피한 게 맞군.”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이혼 수속을 마치러 왔다고?”
“…예.”
“아직 마친 건 아니고.”
“예….”
알레스는 불안한 눈으로 황제를 흘끔거렸다.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지?
위자료 청구 목록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나?
쫌팽이 같은 놈.
그러나 황제는 알레스의 걱정과 달리, 아니 걱정보다 더 희한한 소리를 했다.
“그럼 우리가 아직 부부 사이로군.”
황제의 말에 알레스는 처음엔 멍했고, 다음으로 3단 분노가 치밀었다.
아하, 그걸 이제야 깨달으셨군.
기댈 곳 없는 열아홉 소녀가 궁지에 몰렸을 때, 그때 그 생각을 했어야지.
“아니요. 폐하와 저는 한 번도 부부인 적이 없었습니다.”
황제의 한쪽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부부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번거롭게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거지?”
“돈 벌고 싶어서요. 제국에서 귀족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혼녀가 돼야 하니까요.”
넌 그냥 물주란 말이다 이것아!
“돈을 벌지 않아도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어렵게 가려고 하는군.”
“하시고 싶은 말씀이?”
시답잖은 말은 그만 듣고 싶은 알레스가 감히 황제의 말을 가로막았다.
곁에 있던 수하 중 하나가 나서려 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막았다.
“서류상이나마 부부였으니 궁을 떠나기 전에 잠시 얘길 나누었으면 한다.”
역시 치를 건 언제가 됐든 치러야 하나 보다.
삶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장식품 진열대 밑에 숨어도 기어이 찾아내서 장부를 들이민다.
알레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지난번 불려갔던 집무실과는 다른 방이었다.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였다.
황제가 화사한 천을 씌운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순금빛 머리칼 아래 자수정처럼 빛나는 눈이 알레스를 한참 응시했다.
기껏 바쁜 사람 불러다 앉혀 놓고 왜 쳐다보기만 해?
눈빛으로 시비 거는 거야?
“짐이 이거저거 다 떼면 어떤가? 황제란 지위라든가 부와 권력, 혈통 같은 걸 다 떼어 내면 어떤 사람인가?”
뜻밖의 자아성찰적인 질문에 알레스는 어리둥절해졌다.
게다가 왜 하필 그걸 자신에게 묻는 건지.
혹시 매니지먼트 사업 시작한 거 황제 귀에도 들어갔나?
황제도 고객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
대어이긴 한데….
황제가 알레스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밖에 없어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은.”
그렇군. 그거 아주 영광입니다.
알레스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떤 사람이긴 뭐가 어떤 사람이야.
그런 계급장까지 다 떼면 더 끔찍하지.
화려하게 치장한 오징어에서 쥐뿔도 없는 오징어 되는 거지.
“어렵게 손에 넣으신 걸 뭐 하러 떼어 내시려고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 바보 같은 질문이지.
네가 이런 멍청한 의문을 갖게 했다.
황제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짐도 곧 황비를 간택해야 하는 터라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
와, 결국 이거였네.
지금 나 멕이는 거지?
그런데 어쩝니까, 폐하.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걸.
알레스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귀족 회의와 대신들이 어련히 알아서 훌륭하신 분을 추대하겠습니까.”
“그래도 짐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아 놔, 어쩌라고?
이런 소름 돋는 얘기까지 들어줘야 하나?
“궁금하고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네가 여길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다.
이렇게 아가판투스 황제와 레이디 페레티 사이에 속마음을 숨긴 말들이 어지러이 오갔다.
정작 몇 마디 오가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피로감을 느꼈다.
“폐하, 제 미천한 생각으로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아픔까지 가져가는 겁니다. 흥미나 호기심이 아닙니다.”
“…….”
“폐하께선 그럴 각오가 있으십니까?”
알레스의 녹안이 황제를 빤히 올려다봤다.
황제도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은 측근들이 권하는 대로 조건을 따져 황비를 간택하고 정략결혼을 할 거다.
자신이 가진 무엇도 떼어 놓지 못하겠지.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무언가를 거는 무모한 짓은 결코 하지 않겠지.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질척거리고 있지?
“그래도 혹시 정말로….”
알레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가 그걸 원하신다면, 아픔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여자를 찾으십시오. 그 여자가 폐하께서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옜다, 받아라.
서류상 부부의 정으로 해 주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마지막 충고다.
황제와 헤어진 알레스는 보좌관인 부르댕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거기서 위자료 청구서 최종본을 제출하고, 이혼 서류에 페레티 가문의 인장을 꽝 찍었다.
별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왔다.
알레스는 기대와 걱정으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사도 줄곧 심란한 표정이었다.
비록 더부살이에 눈칫밥이었지만, 어찌 보면 황궁에 있을 때가 편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황궁을 벗어나면 알레스 앞에 살벌한 현실이 펼쳐질 터였다.
사교계엔 그녀를 물고 뜯고 넘어뜨릴 시나리오들이 잔뜩 쌓여 있을지 모른다.
스노브 후작처럼 자신을 이물질 보듯 하는 시선도 적지 않으리라.
이 건방진 이혼녀를 밟아 뭉개고 싶어 편견과 혐오와 거부의 이빨을 드러낼 사람들 사이로, 내일이면 첫발을 디딘다.
* * *
자신을 추문 속으로 떨어뜨린 알레스에게 메르세데스 공작이 원한을 품었던 걸까.
아니면 알레스 안의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앞둔 자의 불안과 두려움이었던 걸까.
황궁에서의 마지막 밤, 알레스는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꿈에 메르세데스 공작이 나왔다.
공작의 몸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몸의 일부가 녹고 있었다.
“어? 공작님, 몸이 녹고 있잖아요?”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한가하게 말씀하실 때가 아니죠. 몸이 녹고 있다고요.”
“오늘 햇살이 좀 따갑긴 하네요.”
공작의 몸에서 맑고 차가운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알레스가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자 공작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실은 전… 눈사람입니다.”
“눈사람이라고요?”
“예. 지금껏 속여서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아니에요. 눈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제가 만난 눈사람이 공작님이 처음은 아니에요.”
“아, 그러시군요.”
말하는 사이에도 공작은 점점 더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혹시 우시는 건가요?”
공작의 암청색 눈에서도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니요, 그냥 녹아서 그런 거예요. 미안해요.”
알레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공작님, 걱정 마세요.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아주아주 큰 냉장고에 공작님을 집어넣을 거예요.”
“그런 큰 냉장고가 있을까요?”
“제가 만들 거예요. 큰 냉장고를 많이많이 만들어서 세상의 모든 눈사람을 다 집어넣을 거예요.”
“고마운 사람. 당신은 눈사람들의 수호신이군요.”
공작의 말에 알레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니에요, 수호신이라뇨. 당치 않은 말이에요.”
주저하던 알레스가 이제 절반은 녹아내린 공작에게 말했다.
“…실은 제가 사람을 눈사람으로 만드는 마녀거든요.”
선잠에서 깬 알레스는 어둠 속에 누운 채 눈을 깜빡였다.
무서운 꿈을 꿨다.
공작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공작은 알고 보니 눈사람이었다.
알레스는 스산한 느낌에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눈사람 병’이 또 도진 거 같았다.
한참 잠잠하더니….
이 세상까지 따라온 빙의 이전의 기억.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작과 연결돼 있었다.
* * *
“아가씨,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마사가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새벽녘의 꿈 때문에 몹시 심란하고 찜찜했지만, 알레스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거 같아.”
마지막으로 로즈마리 궁의 고용인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그때 별궁 집사가 급히 올라왔다.
“안 그래도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다들 모였나요?”
마사가 묻자 집사가 다른 소식을 전했다.
“레이디 페레티를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요?”
“새로 온 호위 기사라고 합니다.”
“아, 메르세데스 공작님이 보내 주신다던 그 호위 기사인가 봐요. 마침 딱 맞춰 왔네요.”
“그러게. 새 집으로 같이 움직이면 되겠네.”
알레스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용인들이 인사를 나누기 위해 모여 있었다.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와 알레스에게 예를 갖추었다.
“레이디 페레티를 뵙습니다. 메르세데스 전하의 명을 받들어 지금부터 레이디를 호위하겠습니다.”
으응? 당신이 그 실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