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모두가 하는 그거
잘했다니….
메르세데스 공작이 계약 파기하고 선금 물어내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한데.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날 만나자고 한 사람도, 이상한 변장을 하고 나간 사람도, 고소공포증이 있는지 몰라 대관람차 안에서 한바탕 쇼를 한 사람도 전부 알레스 자신인데 말이다.
공작은 그저 옆에 있다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오지랖이 이렇게 해로운 거다.
공작의 저주를 풀어 준답시고 설치다 이게 뭔가.
저주의 저주를 부르고 만 거 같다.
그 속도 모르고 자유연애를 신봉하는 유모는 뿌듯한 얼굴로 알레스를 바라보았다.
여우짓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던 아가씨가 이렇게 알아서 척척 진도를 빼시다니.
역시 연분은 따로 있는 걸까.
메르세데스 공작같이 단정한 분도 화끈할 땐 그리 화끈하시고.
물론 우리 아가씨 같은 분을 만났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예전에 고용인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 때도 그랬다.
원래 목석같은 분들이 한번 불이 붙으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두 분은 오직 서로를 위해 준비된 사람들 같았다.
특급 유모 마사의 눈엔 그런 게 보였다.
입버릇처럼 조건 좋은 영식을 만나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애초부터 마사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자유연애 지지자 아닌가.
마사의 눈엔 사랑도 없이 이익을 쫓아 정략결혼 하는 귀족들이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랬으니 자기 주인이 정략결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는가.
아가씨의 첫 번째 결혼은 결국 며칠 가지 못했다.
남들은 아가씨의 결혼이 불행하게 끝났다고 기억하겠지만, 아니다.
아가씨는 엄연히 선택을 했다.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는 남편과의 이혼을.
아가씨의 결혼은 불행하게 끝나지 않았다.
상쾌하게 끝났다.
알레스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흐뭇하게 웃다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울멍울멍하는 마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찌라시나 스캔들보다 더 무서운 건 마사의 넘겨짚기와 소설 쓰기.
이걸로 사람을 또 얼마나 자분자분 긁어댈 건가.
한 달 치 놀림감은 잡은 분위기다.
“이 <소문과 진실>이란 가십지, 보는 사람이 많을까? 디자인이나 종이 질도 조잡하고 내용도 유치하고. 별로 보는 사람 없겠지?”
알레스가 마사의 동의를 바라며 물었다.
“글쎄요…. 적어도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면 이런 걸 보느라 시간 낭비하진 않겠죠.”
“그렇겠지?”
그럼 마사는 공작의 스캔들 기사를 어떻게 발견한 거지?
이런 사소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공작이 사교계에서 이목을 끌지 못하듯, 이 기사도 이목을 끌지 못하고 조용히 묻히기를, 알레스는 간절히 바랐다.
* * *
카르티에 공작은 아침 일찍 20여 종이 넘는 차트와 일간지, 잡지, 사교계 소식지 등을 휘리릭 훑었다.
멜로먼의 아침은 트레이닝과 마사지, 사교계 동정 체크로 시작된다.
그는 곧 출시할 커피 ‘키스 오브 카르티에’의 그윽한 향을 음미한 뒤 한 모금 머금었다.
희고 고운 손가락이 읽고 있던 가십지를 한 장 넘겼다.
“푸악!”
멜로먼이 커피를 뿜자 물러나 있던 시종이 달려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생각지 못한 일로 공작의 의복과 주변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괜찮지 않아.”
공작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하도 웃어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공작을, 시종인 듀클란 자작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봤나, 자작?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군.”
듀클란은 건네받은 <소문과 진실>을 의아한 눈으로 들여다봤다.
언제나 소문만 있고 진실을 찾는 건 독자의 몫인 가십지.
그걸 본 자작도 이내 눈이 커졌다.
“메르세데스 공작?”
“드디어 나의 친구가 스캔들 무대에 데뷔를 했군 그래. 곧 사교계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될 텐가?”
멜로먼은 신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일전에 황제의 전처인 레이디 페레티와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싶더니 결국!
역시 카이트는 실망시키지 않아.
생각해 보면 늘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주머니 속 송곳처럼 돌출 행동을 일삼았단 말이지.
좋아해도 꼭 몰락한 가문의 이혼녀나 수신사?
이렇게 튀는 주제에 고결이니 고상이니 단정이니 하는 수식어를 잘도 달고 다닌단 말이야.
금세 와르르 달아오르는 사교계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참으로 이상했다.
여하튼 재밌는 일이 시작된 거 같았다.
카이트라면 놀려 먹는 맛이 있지.
멜로먼은 재미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듯 흥분됐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스캔들을 접한 건 처음인 듯합니다.”
자작의 말에 멜로먼의 입꼬리가 위로 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처음부터 좀 세긴 하네.”
브린 5황자는 아침부터 들이닥친 여동생 때문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럴 수는 없다고요!”
로잘린 황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손에 들린 가십지를 와락 구겼다.
“감히 이런 기사를 쓰다니! 오라버니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로잘린, 진정해.”
브린이 피곤한 얼굴로 폭주하는 로잘린을 말렸다.
로잘린이 울먹이며 물었다.
“설마 이게 사실은 아니겠죠? 뭐 아는 거 좀 있어요?”
“당연히 아니지.”
“그렇죠?”
“카이트가 남다른 취향이었다면 이 고운 나를 가만뒀겠니?”
브린의 말에 로잘린이 인상을 썼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이런 식으로 귀족을 능멸해도 되는 거야? 대체 이런 추악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뭐예요? 가만 놔둘 거냐고요!”
“로잘린, 네 말대로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헛소문이야. 사교계에 떠도는 스캔들이 한두 개니? 거기 일일이 반응하면 끝도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오라버니는 안 된단 말예요! 얼마나 순결하신 분인데!”
“에이, 로잘린은 남자를 모르는구나.”
브린이 또 건들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카이트가 아무리 뻣뻣한 건어물이라도 순결은 아니지. 카이트도 남자라구. 내가 봤는데.”
“브린이 뭘 안다고 그래요! 남자 같지도 않게 생겨서는.”
로잘린이 펄쩍 뛰며 브린을 노려보았다.
“어머 야, 나 황자야. 밖에 나가면 영애들이 줄을 섰어. <빌보아 차트> 10위권이야.”
“흥, 그게 다 황자 후광이지. 좋아요. 그 황자의 권위로 카이트 오라버니를 욕보인 신문사를 당장 문 닫게 해요.”
“스캔들은 더 이상 들쑤시지 않는 게 가장 좋아. 조용히 묻히는 게 가장 좋은 수라고. 네 말대로 하면 쌍수를 들고 기뻐할 건 그 신문사일걸? 누구 하나 찔러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게다.”
“악랄한 놈들!”
“사람들도 그래. 이런 기사 따위 누가 믿겠니? 하지만 누군가 신문사를 공격하면, 그게 황족씩이나 되면 다들 생각하겠지. 이거 정말 사실이구나.”
브린의 말에 로잘린은 발을 꿍꿍 구르면서 분해했다.
우리 고결한 오라버니의 허술한 면은 나만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런 귀여운 건 나만 아는 비밀이어야 한다고!
로잘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라버니의 스캔들이 속상한 건지, 다른 사람들이 오라버니에 대해 알게 된 게 속상한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로잘린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돌아가자, 브린은 황실 출판국 서고 관리자에게 공무용 통신 마도구로 연락을 넣었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책이 서고에 얼마나 남아 있지?”
“천여 권 남아 있습니다.”
“주문이 더 들어올 수 있으니 천 권 더, 아니 삼천 권 더 만들어 두게.”
“예? 예, 알겠습니다.”
“잠깐. 새로 만들 때 제목을 좀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도덕적으로 사는 길’에서 ‘한 점 부끄러움과 도덕 사이에서’로 살짝 바꾸게.”
“…살짝 바꾸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괜찮아, 제목 따위. 잘 팔리는 게 우선이지.”
통신을 끊은 브린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카이트, 우리 눈 딱 감고 근사한 작품 하나 만들어 보는 거야.
또 메르세데스 공작인가….
아가판투스 황제는 <소문과 진실>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턱을 문질렀다.
그는 레이디 페레티가 수신사 제복으로 변장하고 궁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일찍이 세작으로부터 받은 터였다.
둘이 대관람차에서 진한 만남을 가졌다?
이혼 수속이 아직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는데, 내 등 뒤에서 꽁냥꽁냥 연애질을 하였다?
황제는 비위가 확 상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돈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한 남자를 추문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는 여자였다.
이럴 거면 후궁은 왜 거절한 거지?
페레티는 그렇다 치고, 메르세데스 이자는 무슨 생각인 거야?
세간의 눈총 따위 상관없는 건가?
<소문과 진실>.
이런 신문을 누가 보나 했지만, 이렇게 다들 보고 있었다.
볼 사람이 별로 없길 바랐던 알레스의 염원이 무색하게, 황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특히 제도에서는 메르세데스 공작의 스캔들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됐다.
아마도 북부의 전장에 있는 메르세데스 공작 본인만 까맣게 모르리라.
“백작, 이혼 수속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황제의 물음에 보좌관인 부르댕 백작이 아뢰었다.
“마침 보고 드리려던 참입니다. 오늘 최종적으로 위자료 목록을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끝인 건가?”
“그간 논의해 왔던 내용이고, 오늘은 형식적인 검토와 날인만 거치면 됩니다. 별 이상이 없으면 수속을 신속히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처리가 지연되는 걸 황제가 못마땅해 하는 거라 여긴 부르댕 백작이 황급히 말했다.
“페레티의 거처는 마련됐나?”
“예. 비에커가에 있는 값 싼 저택을 매입했습니다.”
“비에커가에 싼 집이 있나?”
“그게, 집 모양이 좀 괴상해서 가능했던 거 같습니다.”
“…….”
황제가 말이 없자 백작이 걱정스레 덧붙였다.
“부디 폐하의 체면을 손상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이래저래 시한폭탄 같은 여자다.
황제가 물었다.
“페레티가 언제 오지?”
* * *
드디어 궁을 떠날 준비가 됐다.
알레스는 마지막으로 정리한 서류를 가지고 본궁으로 향했다.
이제 도장만 찍으면 완벽한 이혼녀가 된다.
황실에서 보증하는 신원 확실한 이혼녀!
이제 세상의 돈을 긁어모을 일만 남았다.
황제와 대면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보좌관인 부르댕 백작에게 서류를 제출하면 끝!
메르세데스 공작의 매니지먼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체크하는 <빌보아 차트>.
거기서 황제의 이름을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취임 거품도 가라앉을 때가 됐는데, 어째서 아직도 2위에 있는 건지.
물론 1위는 카르티에다.
도대체가 사람들의 취향을 모르겠단 말이지.
황제면 다 좋아 보이는 건가?
이렇게 고시랑거리면서 부르댕 백작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쪽 복도 끝에 매우 거슬리는 형체가 나타났다.
설마 아니겠지?
하필 그 인간과 딱 마주치는 불상사 같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