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여심 교육의 효과
당신이 카르티에 공작처럼 되길 원하냐고요?
아니오!
그런 버터는 사양입니다.
하지만 그가 누리는 인기라든가 세간의 인정이라든가 부와 명예라든가.
그런 건 탐이 나요.
카르티에 공작이 누리는 만큼 당신이 누렸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나는 안목 있는 악녀예요.
내 안목을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나의 고객이니까요!
그것도 대어.
사랑합니다, 고객님.
알레스는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야.
심장이 이토록 두근거리는 건 승부욕, 일 욕심에 불이 붙었기 때문일 거야.
사실 카르티에 공작에 대한 적개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자기 집 앞마당을 통 크게 주차장으로 내어 준 사람이다.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 줬고, 사업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고.
좋아하진 않아도 싫어할 이유까진 없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게 카르티에가 얄미운 건 그가 경쟁자이기 때문일 거다.
느끼하기 때문인 점도 있겠지만.
“카르티에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수완을 보는 거예요.”
알레스가 공작의 질문에 대답했다.
“만약 수완이나 처세를 말씀하신 거라면, 맞아요. 카르티에 공작처럼 되셨으면 좋겠어요.”
메르세데스 공작의 눈이 알레스의 얼굴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
마치 마음을 읽으려는 듯이.
알레스는 공작의 푸른 눈이 아득히 멀어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아나고 멀어지는 파랑.
그는 꼭 언제든 사라질 준비가 돼 있는 사람 같았다.
알레스는 불길함을 떨쳐 버리고자 활기차게 말했다.
“모든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지 마세요. 때로는 의미보다는 재미가 삶에서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저쪽 세상의 자강도 어른이 된 이후로 이 말에 충실하게 살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자신보다 더 구제불능인 공작을 앞에 두고 있자니 이런 말이 잘도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사람 심리가 그렇다는 얘기다.
의미에 목숨 거는 사람보다 재미에 목숨 거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는 데 한 표.
“의미보다 재미….”
공작은 낯선 나라 이름인 양 중얼거렸다.
“앞으로 제가 전하의 저주를 풀기 위해 하려는 일이 그런 겁니다.”
“그런가요….”
“예. 이 방면으론 제가 전문가이니 제 얘기를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알레스의 당돌한 말에 공작의 눈이 둥그레졌다.
“오늘 보니까 전하는 모르시는 게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제가 하나하나 꼼꼼하게 알려 드릴 생각입니다.”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잔소리를 하는 저 레이디는 이제 겨우 열아홉인데.
비록 험한 일을 겪고 이혼 경력도 있다지만.
남다른 안목과 재능이 있다지만.
초롱거리는 녹안과 부드럽게 물결치는 핑크 브라운의 머리칼, 솜털이 있을 거 같은 이마와 아직 볼록하게 남아 있는 젖살은 그 또래 다른 영애들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오빠인데….’
마치 관록 있는 연상의 부인처럼 자신을 굽어보는 알레스 앞에서 공작은 하릴없이 속으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특히 전하는 여심에 관해선 완전히 백…지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알레스는 ‘백치’라고 하려다 그나마 ‘백지’로 순화했다.
“아까 비에커가에서 사람들이 왜 전하를 그런 눈초리로 보았는지 아직도 모르시지요?”
모른다.
그 일이 여심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공작은 일방적으로 구박을 당하는 듯한 흐름이 조금 억울했다.
“내면의 생각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실용성보다는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게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교계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공작의 얼굴에 곧장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속물스럽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못마땅하실 겁니다.”
알레스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옳다 그르다 판단하시기 전에.”
“…노력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귀족 영애들은 불편하고 심지어 좀 다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더 예뻐 보일 수 있는 쪽을 선호합니다.”
만일 여동생이 그런다면 혼내 주고 싶을 거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런 게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이란 겁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건 어리석고 무모하고 뻔뻔한 게 아닐 수 없다.
“아까 그 레이디를 차라리 넘어지게 두는 게 나았다는 건 이런 얘깁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뒷덜미를 잡힌 레이디는 망신살이 뻗쳐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하, 공작의 입에서 결국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뒷덜미 좀 잡혔다고 죽고 싶다니.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연중 이백 일을 보내는 공작에겐 이보다 더 기가 찬 소리가 없었다.
“물론 실제로 죽진 않겠지만요. 그만큼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니.
공작은 여전히 이해도 안 가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의 상처가 모이면 뭐가 되겠습니까? 원한이 되고, 원한이 모이면 저주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심을 모르는 게 저주를 부를 만큼 큰 죄라니.
공작은 자신이 지금껏 단단히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방금 전의 말은 알레스가 생각해도 좀 오버였지만, 공작이 계속 납득이 안 된다는 듯 불만스러운 표정이어서 자극적으로 질러 봤다.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 그중에서도 여심을 장악할 때 사교계에서 평판이 높아집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카르티에 공작 같은 사람은 여심을 파악해 평판을 높인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영리하게 각종 이득까지 취하고 있었다.
알레스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공작에게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쭙자면, 그게 정말 최선이었습니까? 목덜미를 잡는 게?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하필 잡아도, 어떻게 가장 모양 빠지는 데를!
“그럼 어딜 잡습니까?”
“예?”
“그 레이디의 목덜미를 잡기 전에 짧은 순간이지만 저 나름대로 많이 고심했습니다. 어디를 잡아서 구해 드려야 실례가 되지 않을지.”
“…….”
“손을 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가장 적합한 곳을 잡느라 잡은 건데….”
그러게. 어딜 잡지?
듣고 보니 잡을 만한 데가 별로 없긴 하다.
아니, 아니지!
어딜 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잡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공작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대체 왜 안 잡고 안 구하는 건 선택지에 없는 거냐고!
알레스가 보니 공작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설마 아직도 어딜 잡았어야 나았을지 생각하는 건가.
하, 원리부터 차근차근 이해시키는 교육법은 무리인가?
그렇다면 그냥 주입식으로.
“전하, 여하튼 중요한 건 여심을 이해하는 겁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여심은 민심!”
“여심은 민심….”
“아시겠나요?”
“…유념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공작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만 알면 되지 않나?’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징글징글 말을 안 듣는 학생이었다.
마차는 오래전에 이미 황궁 앞에 당도해 있었다.
로즈마리 궁에서 가까운 후문 앞이었다.
“아직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몸이라, 마차가 궁 안까지 들어가면 괜한 이목을 끌 거 같습니다. 변장도 했으니 이쯤에서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태워 주셔서 감사해요.”
“별궁까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가 보세요.”
그러나 공작은 기어코 따라 내렸다.
“정 신경 쓰이시면 호위 기사나 다른 분을 붙여 주세요. 전하가 직접 가시는 건 좀….”
“그럼 에스코트가 아니라 산책이라고 하죠. 황궁의 정원은 저한테도 추억이 깃든 곳이니까요.”
“아, 자주 오셨나 봐요?”
“아카데미 시절에 여길 산책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브린 황자 전하와 절친한 사이라고 하셨죠?”
“네. 브린, 카르티에 모두 아카데미 동기입니다.”
아카데미 시절의 메르세데스 공작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지금보다 더 푸릇푸릇했겠지?
그때도 고지식한 소년이었을까?
생각하자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딴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어서였을까.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구역에서 알레스는 발을 헛디뎠다.
어둑해서 계단의 높이를 잘못 짐작한 게 문제였다.
바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 허공이 있었다.
다른 발도 잇따라 잘못 디디면서 스텝이 꼬였다.
조금 앞서 걷던 알레스는 공중에서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착.
공작의 단단한 팔이 알레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알레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공작의 품 안에 알레스가 쏙 들어갔다.
다시 만난 매트리스.
탄력 좋고.
“괜찮습니까, 레이디?”
“…….”
“다친 덴 없어요?”
공작의 숨결이 이마 위로 곧장 떨어졌다.
알레스는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
얼굴이 빨개졌을 거 같았다.
정원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알레스는 공작의 품에서 얼른 떨어져 나왔다.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어두워서 위험하군요.”
역시 교육의 효과인가.
여심 교육이 효과를 발휘한 거 같았다.
뒷덜미를 잡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건성으로 듣는 거 같더니 학습 능력과 적응력이 뛰어난 거 같았다.
하긴 아카데미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지 않은가.
“금방 적응하시네요. 교육한 보람이 있어요.”
“네?”
“뒷덜미를 잡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아….”
“봐요, 하니까 되잖아요. 이래서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니까요.”
“…괜찮았습니까?”
“네, 바로 이거거든요. 가르치는 입장에서 전하의 발전이 매우 보람되네요, 하하하.”
알레스는 다소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스스로도 자기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알레스가 무척 기뻐하는 거 같아서 잠자코 있었지만, 공작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지나가는 모르는 여자와 레이디 페레티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방금 넘어지려 한 사람이 다른 여자였다면, 아마 또 뒷덜미를 잡았겠지.
아직 뒷덜미보다 더 나은 곳을 찾지 못했으니까.
“레이디 페레티, 저는 내일 영지로 돌아갑니다. 형편상 오래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말씀드린 대로 호위는 실력이 뛰어난 이로 엄선해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저주에 관해서는 계속 연구해 주십시오. 필요한 교육이 있다면 편지로 알려 주셔도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해요. 전하가 여기 안 계셔도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입김이 얼어붙는 계절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지내시길 빌겠습니다.”
“공작님도요.”
여심 교육이 아니었어도 당신의 뒷덜미를 잡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당신을 각별히 아낀다고.
공작은 속으로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