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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22화 (22/120)

22화

질풍노도의 공작

메르세데스 공작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하는 중이었다.

진지한 성찰 끝에 내린 결론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아무래도 자기 안에서 큰 착오가 일어난 것 같았다.

대관람차 안에서 일어난 모종의 변화는 공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레이디 페레티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꼈다.

그 감정이 뭔지 공작도 모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눈부신 재능과 매력을 지닌 동기 영애들을 보고 가슴 설레곤 했으니까.

봄가을에 열리던 아카데미 무도회에서 어떤 영애와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

호감을 갖고 있던 영애가 자신을 소풍에 초대했을 때는 밤새 잠을 설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이었고.

심지어 그 시절에도 공작은 욕망을 잘 다스릴 줄 알았다.

자신은 한가한 감상에 취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다른 사람과 나누기엔 미안한 일이었다.

혼자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그런데 방금 그건 뭐였을까?

물론 레이디 페레티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페레티 가문에 큰 폐를 끼쳤기에 공작은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기도 했다.

페레티가의 유일한 후손인 알레스를 지켜주겠다고도 결심했다.

또한 이 레이디는 매우 뛰어난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공작이 품어 온 건 여동생을 염려하거나 기특해하는 오빠의 마음 같은 거였다.

방금과 같은 감정은 여동생에게 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사실 감정도 감정이지만 더욱 당혹스러웠던 건 몸의 반응이었다.

수백 년 만에 대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레이디 페레티가 눈치 채진 않았을까?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대체 왜 이래?’

스물넷이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남부끄러운 일이었다.

수신사 제복으로 변장한 알레스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조금 떨어져 걷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어설픈 변장을 한 건지.

옷은 바꿔 입었지만 걸음걸이 같은 습관은 바꾸지 못했기에 매우 언밸런스한 느낌을 풍겼다.

온 동네 관심을 한몸에 다 받을 생각인가?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녀한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크게 동요한 건지도 몰랐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던 모습.

끝까지 도움을 청하지 않으려던 고집스런 모습.

안쓰러우면서도 미련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나던 모습.

?비록 저주에 걸렸지만, 레이디 혼자서 버티는 것보다는 쓸 만할 겁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아닌 게 아니라, 브린만 해도 비슷한 소릴 여러 번 했던 거 같다.

공작은 문득 궁금해졌다.

‘레이디 페레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웬일인지 그녀는 나, 메르세데스 공작이 저주에 걸렸다고 믿고 있었다.

저주에 걸린 거처럼 괴상하고 불행해 보이는 걸까?

불행의 정도를 따지자면, 레이티 페레티 본인의 불행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가문의 몰락이나 잘못된 정략결혼, 황제와의 이혼….

그녀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온통 저주의 가시밭길인 건 도리어 그쪽인 듯한데.

남 저주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우리 비에커가로 갈래요?”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알레스가 공작에게 물었다.

비에커가라면 제도에서 가장 핫한 거리.

지난번 ‘더 코스모스’ 커피하우스에서 마주친 후, 영문 모를 대낮 추격전을 벌였던 그 상점가다.

카르티에의 주 무대이기도 하고.

“거기서 볼일이 있으십니까?”

“계약한 기념으로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알레스는 언제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냐는 듯, 의욕에 차서 말했다.

아까 약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여 준 걸 만회하고 싶었다.

저주를 퇴치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겁니다!

이렇게 공작에게 맛보기로 보여 주고 신뢰를 되찾고 싶었다.

앞으로 케어를 받을 사람은 공작이고, 자신은 엄연히 케어를 하는 사람이란 걸 분명히 하고 싶었다.

밥값은 하자!

알레스는 지난번에 카르티에 공작이 선보였던 수법을 벤치마킹해 보기로 했다.

‘넘어진 레이디에게 따뜻한 손길을’ 퍼포먼스 말이다.

물론 카르티에 공작은 명품 구두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닭살 돋는 퍼포먼스를 계획한 거지만.

거기에 덤으로 좋은 이미지까지 챙겼고 말이다.

1. 한 영애가 갑자기 브레이크 고장 난 덤프트럭처럼 거리를 질주한다.

2. 그러다 발이 삐끗하며 넘어지는데, 넘어지는 곳은 하필 카르티에 공작의 코앞이다.

3. 카르티에 공작은 매너 있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한다.

4. 그때 얼굴엔 더없이 상냥한 미소, 멘트는 “괜찮아요? 많이 놀라셨죠?” 정도가 적당.

5. 영애가 절뚝거리며 일어나는데, 미리 톱으로 썰어놓은 듯 구두굽이 부러져 있다.

6. 상냥한 카르티에 공작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곁에 있던 수하에게 영애께 드릴 새 구두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7. 새 구두 브랜드명은 목청을 돋워서 크고 선명하게 발음한다.

8. 주변에 심어놓은 바람잡이들이 카르티에 공작의 인품과 매너를 칭송한다.

9. 주변에서 돌아가는 기자들의 영상 마도구에 좋은 각도로 잡히도록 포즈와 동선을 미리 계산한다.

지난번 카르티에 공작이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고서 알레스가 정리해 본 큐시트다.

이번엔 이렇게까지 복잡할 필요는 없다.

시험 삼아 가볍게 해보는 연습 무대인 데다, 아직 협찬 받아 홍보할 물건도 없으니.

그냥 메르세데스 공작의 이미지 정도만 띄울 수 있으면 된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이미 훌륭한 인품과 상냥한 성품을 기본적으로 갖췄기에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거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남은 건 하나였다.

불꽃 연기를 선보일 ‘넘어지는 영애 역’.

변장만 안 했다면 당연히 알레스 본인이 하고 말았을 테지만.

알레스는 지난번에 받아둔 주소지 근처에 와서 공작에게 말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공작을 거리에 세워둔 채 말릴 틈도 없이 뛰어가 버렸다.

갑자기 뭘 보여주겠다더니 휑하니 사라져 버린 레이디.

공작은 멀거니 선 채로 눈앞에 펼쳐진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면서 화려한 불빛이 하나둘 상점가를 밝혔다.

거리는 아름다운 건물과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들떠 있었다.

허영의 거리였다.

자신과는 별로 맞지 않는 곳이다.

카르티에와 잘 어울리는 거리였다.

그때 한 레이디가 딱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거리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공작이 보기에 이상하게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주변의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불안하게 움직였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충분히 그녀에게 쏠렸다.

사람들이 “어, 어어!” 소리를 냈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다가오던 그녀는 마침내 공작 바로 앞에서 마음 놓고 길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옆에서 몰래 지켜보던 알레스는 레이디의 메소드 연기에 감탄했다.

역시 단장인 샤를테론 부인이 강조한 대로 생활 연기에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이번 퍼포먼스를 맡은 레이디는 특히 넘어지는 자세가 아름답고도 처연하다고 했다.

이제 레이디가 피날레를 장식하며 넘어지고, 공작이 레이디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그 다정한 손과 이어진 출중한 몸과 얼굴을 보고 새삼 놀랄 거다.

저런 남자가 있었나?

저 사람이 메르세데스 공작이라고?

상냥하고 매너도 좋아.

저 진중한 얼굴은 진심으로 레이디를 걱정하고 있어.

저런 보석이 어디 숨어 있다 나온 거야?

알레스는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턱.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건 알레스가 그리던 그림이 아니었다.

공작의 팔은 예상보다 훨씬 재빨리 움직였다.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는 듯했다.

넘어지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레이디는 미처 넘어지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무척.

“에구머니나!”

“어이쿠야!”

“아아아아….”

“창피해.”

“모양 빠져.”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연기자 레이디는 드레스의 목덜미를 공작에게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마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처럼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알레스는 폭망한 그림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공작에게 덜미를 잡힌 채 자라목이 되어 있던 레이디는 결국 울면서 뛰어가 버렸다.

공작은 공작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넘어지려는 걸 기껏 붙잡아 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달아나질 않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레이디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수군거리지 않나.

“저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집까지 굴러가는 게 낫겠어요.”

이런 말도 귀에 꽂혔다.

공작의 마차가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 안의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은 솔직히 마음이 좁아져 있었다.

모든 게 납득이 안 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어디로 사라졌다 나타난 건지 모를 알레스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에메랄드 눈동자에 실망한 기색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마침내 알레스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정말… 이 정도는 알아서 하실 줄 알았는데.”

하나하나 좀 더 세심하게 알려 주었어야 했을까?

공작의 캐릭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알레스 자신의 불찰인 듯도 했다.

“무슨 말씀이죠?”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다 제가 준비한 연극이었단 말이에요. 전하를 띄우려고요.”

“연극?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당신의 연극을 망쳤나요?”

“아니요… 전하가 잘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잘못이 없다고 하기엔 당신 눈에도 실망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도 절 비난하는 듯했습니다.”

“그게… 아까 그 레이디가 그냥 넘어지게 두시지 그랬어요. 넘어진 다음에 손을 뻗어 일으켜 주셨으면 보기에 좋았을 텐데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공작의 암청색 눈동자가 알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넘어지기 전에 구할 수 있는데,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 넘어지게 놔두라고요?”

끄응,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이 넘어지는데 안전하게 빨리 구하는 게 중요하지, 보기 좋게 구하라는 건 어느 나라 도리냐.

하지만 문제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는 거.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거.

“전하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레이디는 넘어지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게 문제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공작에게 알레스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제 비에커가에서 카르티에 공작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걸 봤고, 나름 그걸 참고해서 자신이 하려는 일에 접목해 보았다고.

설명하다 보니 오늘 일은 공작의 품성이나 가치관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그런 허술함이 오늘의 삑사리를 낳은 거다.

공작은 고지식한 고객이었다.

하지만 고객에게 알아서 맞추라고 요구할 순 없다.

싫으나 좋으나 자신이 맞춰야지.

알레스는 나름 귀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 일하는 데 보탬이 될 거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작의 사정은 달랐다.

알레스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공작은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카르티에처럼 되길 원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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