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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21화 (21/120)

21화

저주에 걸린 몸이라도 그대에게

“의뢰요?”

저주에서 의뢰란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게다가 무엇을?

저주라면 사제나 마법사와 상의해야 하지 않을까.

“저도 그 일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공작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저주에 걸린 입장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느는 건 달갑지 않습니다.”

“네, 아무래도요. 저라도 그럴 거예요.”

알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레이디께 부탁하는 겁니다. 제가 걸린 저주에 대해 좀 더 알아봐 주신다거나, 저주의 해결책이나 보완책을 마련하는… 이런저런 일들을 말입니다.”

“그걸 저한테 의뢰하신다고요?”

“네, 정식으로 의뢰하고 싶습니다.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정식 계약! 비용 지불!

욕심난다.

저주라는 게 하루 이틀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잘하면 고정 수입 창출?

궁에서 나가는 대로 불안정한 자영업자나 계약직 프리랜서가 될 예정인 알레스에게 고정 수입이 생긴다는 건 대단한 유혹이었다.

역시 따박따박 월급 받는 게 최고여.

저쪽 세상에서 회사를 그만둔 후에야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긴 한 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일단 따 놓고 봐야 하나?

“뭘 보시고 제게 그런 일을….”

“버려지는 황궁 음식을 처리하시는 솜씨를 보고요. 제 일도 그런 거 아닐까요?”

“설마요. 남은 음식이랑 전하가 어떻게 같아요?”

황제나 스노브 후작이라면 모를까.

“레이디가 그때 여럿을 살리는 걸 봤거든요.”

그냥 나 살려고 발버둥 쳤을 뿐인데?

“목이 날아가기 직전의 사내도 살려내고, 멀쩡하게 버려지는 음식들도 살려내고, 굶주린 백성들도 살려내고, 거기에 황실과 황제의 체면과 명분까지 살려내셨죠.”

공작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알레스는 자신이 정말로 굉장한 일을 한 것 같았다.

저렇게 포장술이 좋으면서 자기 자신은 왜 포장을 못 하는 거야?

“제 저주를 푸는 일도 비슷한 거 아닐까요? 원래의 제 모습을 살려내고, 제가 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

설득된다.

내가 막 훌륭한 사람인 거 같다.

역시 책 쓰는 사람이라 뻥튀기를 잘한다.

“뭐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살리는 데 재주가 좀 있죠.”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알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우월한 유전자와 소양은 다 갖춰져 있으니.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강렬하고 신선한 방법을 써서 지속적으로 노출하고 자극하기!

그렇게 ‘무명’의 저주와 싸우는 거야.

홍보실 직원이나 연예인 매니저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군.

알레스는 열심히 잔머리를 굴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 모습에 공작은 알레스가 망설이는 줄 알고 덧붙였다.

“매달 5,000브릭스의 사례비에 추가로 호위 기사 문제를 해결해 드리면 어떨까요? 좋은 사람을 소개하는 건 물론이고 호위와 관련된 일체의 비용을 메르세데스에서 대겠습니다. 안전이 보장돼야 더 자유로이 움직이실 수 있을 테니까요.”

매달 5,000브릭스에 호위 기사까지!

미끼를 스윽 들이미는 게 이 공작 딜 좀 해 본 솜씨다.

놓치지 말아야 할 대어지만, 그렇다고 너무 환장해서 달려들면 안 되지.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조건이네요. 행사나 뒷공작 등에 드는 추진비는 그때그때 추가로 지불하셔야 하는 거 아시죠?”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5,000브릭스면 고급 관리의 봉급이다.

“참, 계약은 연 단위로 하는 게 업계 불문율인데.”

업계가 있기는 한 건지.

“좋습니다.”

“저주라는 게 아무래도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고용이 보장돼야 맘 놓고 튼튼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절대 오해는 마세요.”

“오해 안 합니다. 저도 레이디한테 오해받는 거 싫으니까요.”

아 참, 오해에 관해서는 집요하시지.

“이 일에만 매달리실 필욘 없습니다. 다른 사업을 하는 틈틈이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계약서는 따로 작성해야겠지만, 일단은 이걸로 파트너가 된 겁니다!”

알레스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파트너가 아니라 갑을 관계가 된 거지만.

공작이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지만, 저쪽 세상의 기억과 경험, 마사의 지혜와 정보력, 헤라클레스의 빵과 충성심이면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알레스는 희망의 밑그림을 그려 보았다.

공작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관람차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번 계약은 메르세데스 공작에게도 매우 흡족했다.

그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거 같아 레이디 페레티의 안전이 걱정되던 차였다.

하지만 그녀 곁에 다가갈 명분이 없어 고민하던 중 훌륭한 구실이 생겼다.

이렇게 계약까지 맺어 믿을 만한 호위를 붙여 둘 수 있게 되었고, 일을 핑계 삼아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저주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창 너머로 향한 공작의 암청색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다시는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그때는 너무 어려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일뿐.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후회라면 지긋지긋하게 했다.

다시는 잃지도, 자책하지도 않으리라.

알레스도 관람석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하느라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꽤 높은 데까지 올라온 듯했다.

‘그러니까 이 관람차 한 번 타는 데 내 한 달치 급여가 필요하단 말이지.’

관람차 1인 1회 이용료가 자신이 매달 받기로 한 금액과 같은 5,000브릭스란 걸 떠올리고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귀족들 놀음이라지만….

그렇게 비싼 전망은 어떤지 감상해 볼까.

알레스는 기왕 탄 거 본전을 뽑자는 생각에 관람석 창에 코를 바짝 붙였다.

히악!

심장이 아래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관람석은 사방이 막혀 있는 구조인데도 몸이 꼭 창밖으로 휘청 떨어지거나 바닥을 뚫고 빠질 거처럼 불안해졌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설마, 나 고소공포증이 있었던가?

두려움이 점점 커졌지만 왠지 공작에게 들키기 싫었다.

좀 창피한 느낌이랄까?

파트너로서 강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버티면 한 바퀴 돌아서 언젠가 아래로 내려가겠지.

알레스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달랬다.

모든 건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초장부터 비실비실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건 클라이언트의 신뢰를 잃는 일.

카리스마 넘치고 거침없는 불도저 사업가의 면모야 솟아라!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과 평정을 잃지 않는 프로의 근성아 날을 세워라!

“어디 안 좋으십니까?”

공작이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알레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티 안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지?

“안색이 안 좋고 식은땀을 흘리시는 데다….”

아까부터 다리를 심하게 달달 떠는데, 서로의 무릎이 맞닿아 있어서….

“무엇보다 지금 거의 뒤로 눕다시피 하고 계신데요. 혹시 그때와 같은 증상인가요?”

공작의 물음에 알레스는 잊고 있던 흑역사가 떠올랐다.

황제의 연회장을 나와 숙소로 가는 길에 저혈당증이 왔고, 길바닥에 쓰러져 허우적댔던 일이.

맞다. 그때 이미 못 볼 꼴을 다 보였지.

사람은 원래 같은 걸 두 번만 봐도 ‘매우 여러 번’, ‘자주’, ‘걸핏하면’이라고 인식하는 법.

벌써 두 번이나 이런 허약한 꼴을 보였으니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알레스,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렇다면 단 걸 드셔야 할 텐데….”

“아니에요. 그런 거.”

알레스의 뾰족한 목소리에 공작이 멈칫했다.

“그런 증상은 정말이지 어쩌다 한 번,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에요. 혹시나 자주 그런다고 생각하실까 봐….”

뭔가 초라한 변명을 하면서도 단 게 간절했다.

저혈당증은 아니지만 단 거라도 먹으면 마음이 진정될 거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변장을 하느라 비상용으로 챙겨 다니던 달다구리들을 전부 놓고 나왔다.

없다고 생각하니 미친 듯이 간절해졌다.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알레스의 까칠한 반응에 공작이 조금 물러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휘이잉 후우웅.

거센 바람이 불어와 관람차를 흔들었다.

공중에 매달린 관람차가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은 끈덕지게 관람차를 놓아 주지 않았다.

알레스는 하얗게 질린 채로 아예 좌석에서 내려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렇게 되자 어쩔 줄 모르게 된 건 공작이었다.

알레스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게 확실했다.

그냥 조금 무서운 게 아니라 스스로 두려움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거였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공작은 당혹스러움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시 한번 관람차가 크게 흔들렸다.

웅크린 알레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공작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는 알레스의 머리를 당겨서 가슴에 꼭 안았다.

“이번에도 빌려 써요. 제 신체 일부.”

장기밀매의 냄새가 물씬한 공작의 대사에 알레스는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비록 저주에 걸렸지만, 레이디 혼자서 버티는 것보다는 쓸 만할 겁니다.”

이런 멘트라니, 정말.

공작은 저주에 걸린 게 확실했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다 보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떨리던 몸도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무엇보다 저주에 걸린 몸이라도 따뜻했다.

이렇게 얼굴을 묻고 있으니 언제나처럼 새벽 숲의 삼나무 향이 느껴졌다.

좋은 향에 포근한 감촉….

매트리스로 쓰면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할 거 같았다.

언젠가 사교계에서 공작을 띄운 뒤 굿즈로 ‘메르세데스 공작의 향기’라는 향수를 만들어 팔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알레스는 또 웃음이 나왔다.

공작이나 자신이나 참 못 말리는 족속들이다.

알레스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자, 난리 통에 모자가 떨어져 나간 머리 위로 공작의 손이 가만히 내려왔다.

큰 손이 위로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근한 매트리스에 조금 더 폭 잠기고 싶었다.

‘그럼 사양치 않고 조금만 더 빌릴게요.’

알레스는 가느다란 팔을 들어 공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공작의 몸이 흠칫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싫어도 좀 참으세요.

기왕 빌려 주신 거.

대관람차가 한 바퀴 돌아 지상에 닿을 때까지 두 사람은 멀쩡한 좌석을 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관람차에서 내릴 때가 되자 그제야 알레스는 슬슬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땅에 가까워지자마자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너무나 멀쩡해진 게 아닌가.

제정신이 돌아오자 방금까지 대관람차의 좁은 통 안에서 온갖 유난을 떨며 심각한 영화를 찍은 게 너무나 창피해졌다.

이래서 사람은 뒷일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알레스는 민망함과 창피함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러느라 공작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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