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손대지 말아야 했나
알레스는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건들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려 버렸어….
세상엔 애초에 따지 말아야 할 꼭지가 있다.
이 작은 도자기 인형 같은 황녀는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재잘재잘 입을 놀리고 있었다.
곱게 자란 황족 아가씨가 말을 저 정도로 많이 하면 어지럼증을 일으킬 법도 한데.
로잘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공작 오라버니 얘기를 늘어놓느라 갈 생각을 안 했다.
“오라버니는 슈가 파우더가 뿌려진 음식을 먹을 땐 십중팔구 코나 입술에 하얗게 묻혀요. 얘길 안 해주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다닌다니까요.”
“며칠씩 전쟁터에서 지내다 오면 수염이 어디까지 나 있는 줄 아세요?”
“일 년에 한 번 정도 활짝 웃는데 웃는 얼굴이 엄청 예쁘면서도 상바보 같아요.”
“성 주변에 사는 눈고양이들에게 밥을 줘요. 이름을 붙여 준 고양이만 열한 마리예요.”
“언젠가 제가 손톱에 토끼를 그려 준 적이 있거든요. 손은 크고 울퉁불퉁한데 손톱이 엄청 예쁘지 뭐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면 요리를 먹을 때 눈빛이나 입술 모양이 이상하게 야시시해져요.”
“엉덩이에 사과가….”
알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귀에 쏙쏙 박힌다.
정말 진심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입에 달라붙어 흥얼거리게 되는 수능 금지곡 같은 얘기다.
“그런데 황녀님은 언제부터 공작님이 좋았어요?”
도무지 끝날 거 같지 않은 로잘린의 오라버니 타령을 뚫고 알레스가 물었다.
누굴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선을 긋기는 힘들겠지만.
“여섯 살 겨울부터요.”
로잘린은 숨도 쉬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엉? 그런 걸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가?
알레스는 황녀의 비상한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지만, 로잘린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엄마는 궁에서 살기 싫어했거든. 나만 아니었음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그날 로잘린은 후원에 숨어서 울고 있었고, 그 모습을 카이트에게 들켰다.
본궁에선 아카데미 입학 성적 우수자들을 초청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차피 다들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제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들로 북적거리는 자리를 빠져나온 메르세데스 공자는 혼자서 후원을 걷다 웬 여자아이가 울고 있는 걸 보았다.
그를 본 아이는 눈물을 매단 채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다짜고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아이는 카이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 시간은 족히 눈물을 쏟았다.
카이트는 꼼짝없이 거기 붙잡혀 있어야 했다.
로잘린이 우는 동안 그가 한 거라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아이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준 거뿐이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했다.
?사람들에게 미안한 거지? 그 마음 나도 알아.?
그렇게 그와는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브린 황자가 아카데미 동기이자 친우라며 소개한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 공자가 바로 그 아닌가.
살면서 5황자 오빠가 이보다 더 쓸모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여섯 살 겨울, 카이트의 바지에 눈물 콧물 범벅을 한 그때부터.
로잘린은 눈에 두터운 콩깍지가 씌었다.
가지 않으려고 미적거리는 황녀를 다음을 기약하며 억지로 떠밀어 보냈다.
메르세데스 공작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이 다 됐기 때문이었다.
“마사, 나 좀 나갔다 올게.”
“마차랑 호위를 요청할까요?”
“아니, 개인적으로 누굴 좀 만나야 해서…. 조용히 다녀오고 싶어.”
“벌써요? 누구요?”
“벌써… 라니. 참, 나가려면 변장이 필요한데.”
“누굴 만나시면 단장을 하셔야지 웬 변장입니까?”
괜히 김칫국을 마시며 들떠하던 마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조심하는 거야 늘 중요하지만, 특별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세요?”
“편지를 가져간 배후가 누군지 모르고, 뭔가 찜찜해서.”
알레스는 아까 스노브 후작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메르세데스 공작도 걱정했고 말이다.
호위 없이 다니는 건 위험할지 모르는데 호위를 붙일 형편은 못 된다.
연달아 황궁 호위를 빌리면 괜히 황제의 눈에 띄거나 일이 커질 거 같았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헤라클레스를 데리고 나가기도 좀 그렇다.
아직은 엄연히 로즈마리 궁의 파티시에이니 마음대로 일터를 이탈할 수는 없다.
또 호위 기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 보자며 메르세데스 공작이 매의 눈으로 달려들면 어쩔 건가.
무면허인 게 들통 나면 일이 복잡해진다.
가만, 헤라클레스의 옷을 빌리는 건 어떨까.
“마사, 파티시에 헤라클레스의 옷을 좀 빌려다 줄래? 변장하는 데 필요해.”
마사가 눈을 껌뻑이더니 물었다.
“너무 크지 않을까요? 파티시에의 셔츠를 드레스로 입으시게요?”
역시 현실 파악에 강한 유모다.
헤라클레스는 덩치가 커도 너무 크지.
그의 몸에 알레스 같은 레이디는 아마 다섯 명쯤 들어갈 테다.
“변장이 필요하시면… 아가씨랑 몸집도 그리 차이 나지 않고 두말없이 옷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자가 있죠. 전문직 종사자의 제복 어떠세요?”
마사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헤라클레스는 또 빵 반죽을 큼지막하게 떼 가서 혼신을 다해 내리쳤다.
황궁 내 서신 관리를 맡고 있는 수신사, 딜리포터는 자신의 제복을 곱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지키는 거도 나름 수호라고, 병사 제복 같았다.
탁한 자주색에 실버 메탈 투 버튼, 소매 끝에 은사로 비둘기를 수놓은 상의와 딱 붙는 크림색 하의였다.
알레스가 입으니 전반적으로 장난감 병정 같은 느낌이었다.
풍성한 핑크 브라운의 머리칼은 마사가 꽁꽁 묶어서 벽돌색 제복 모자 안에 감쪽같이 집어넣었다.
제복도 편한 옷은 아니지만 치렁치렁한 드레스보다는 훨씬 간편한 착용감을 선사했다.
알레스는 옷만큼 가벼워진 기분으로 황궁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왜죠?”
메르세데스 공작이 수신사 제복 차림으로 나타난 알레스에게 물었다.
“황궁에서 바깥출입을 제한하나요?”
황궁으로 말하자면, 알레스 본인이 다 받아내기 전엔 안 나간다고 버티고 있는 거지, 나간다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아니라, 신변 보호에 신경 쓰라고 하셨잖아요. 호위 대신 변장입니다.”
알레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공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제안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호위 기사를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실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럼 감사하죠. 기왕이면 희망 보수가 낮은 그룹으로 부탁드릴게요. 일은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고 두루두루 폭넓게 하는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면 좋겠습니다.”
알레스는 바라는 조건을 명시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말씀 나눠 볼까요? 어제처럼 골목에 있는 말라 버린 분수에서 할까요?”
“비밀스런 이야기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공작은 다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금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제도에 오면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기왕에 변장을 하셨으니, 괜찮으시다면 그리로 가서 얘기 나누면 어떨까 합니다.”
“좋습니다.”
“최근에 생긴 곳으로, 주로 귀족 남성들이 담력을 시험해 보러 간다더군요. 전망도 좋고, 대화 내용의 비밀 보장은 확실할 겁니다.”
최근에 생긴 귀족 남성들의 핫플에 도착한 알레스는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대관람차?
커다란 바퀴 모양의 구조물에 성인 두 명 정도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그란 통들이 줄줄이 매달린….
분명 놀이동산에서 보던 대관람차가 느릿느릿 회전하고 있었다.
“마정석을 이용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브린 황자가 타 보았는데 맨 꼭대기는 꽤 짜릿한 감각이 있다고 하더군요.”
주로 고위급 인사들이 비밀스런 정치 이야기나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데 쓰인다는 설명이었다.
레이디들에겐 부적합한 곳일지 몰라도, 오늘은 변장도 한 김에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용도로 쓰일 만했다.
도청은 웬만해선 힘드니 비밀 보장 확실하고.
멋진 전망을 구경하며 편히 앉아 이야기하면 공작이 저주에 관해 받아들이는 데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리고 1인당 5,000브릭스.
브릭스는 크루그 제국의 화폐단위인데, 10브릭스로 4인분의 큰 빵 하나를 살 수 있다.
황궁 음식 나눔장 운영 회의를 할 때, 헤라클레스가 말해 줬다.
그렇다면 대관람차 한 번에 큰 빵이 500개, 두 사람이면 큰 빵 1,000개!
공작님 책 써서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알레스는 이용료 생각만으로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행히 공작이 알레스 몫까지 이용료를 지불했고, 두 사람은 ‘비즈니스 라운지 18’이라고 쓰인 통 안에 착석했다.
통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두 사람 다 살집은 없었지만, 공작의 체격과 기럭지가 워낙 우월해서 관람석이 비좁게 느껴졌다.
자꾸만 무릎과 무릎이 닿는 게 신경 쓰였다.
관람석의 고도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서둘러야겠다.
“저, 어제 한 저주 얘기 말인데요.”
“네, 저주요.”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예.”
공작이 얌전한 강아지처럼 암청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는 꿈에도 모르시겠지만, 사실 전하는 저주에 걸렸어요.”
알레스는 눈을 질끈 감고 말해 버렸다.
별 반응이 없어 슬며시 눈을 뜨고 봤더니 공작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까.”
공작의 반응에 알레스가 오히려 당황했다.
어쩌면 충격이 너무 커서 얼이 나갔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놀란 표정은 아니고, 도리어 알레스를 조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듯했다.
그래서 알레스는 저주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걸 조목조목 설명했다.
<빌보아 차트>에 없는 거,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 등등.
“어제 그 아는 사람 얘기가 제 얘기였나 보군요.”
“불쾌하시다면 죄송해요. 전하를 우롱하려던 건 아니에요. 저도 자신이 없었거든요. 과연 알려드리는 게 옳은 건지.”
“이해합니다. 막상 꺼내려면 정말로 쉽지 않은 얘기죠.”
“어제 공작님 생각을 들어보니 그래도 알려드리는 게 맞다 싶었어요.”
“모른 척하지 않고 얘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레이디 페레티.”
공작은 시종일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에 걸렸다는데, 분하고 억울하지도 않나?
공작은 고개를 돌려 관람차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래, 겉으론 담담해도 속으론 많이 심란하겠지….
알레스가 공작을 곁눈질하고 있는데, 공작이 바깥 풍경에서 눈길을 거두고는 알레스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공작이 알레스에게 말했다.
“당신께 일을 하나 의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