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저주를 아십니까?
‘레이디 페레티가 위험하다.’
사라진 편지 때문에 메르세데스 공작이 의심을 부풀리고 있을 때였다.
알레스는 공작이 걸린 저주에 관해 상상을 부풀리고 있었다.
양심에 난 털이 자꾸만 까슬까슬 거슬렸다.
‘내가 뭐라고…. 내가 오해하든 말든 뭐가 중요하다고….’
공작은 자신에게 오해 받지 않기 위해 저리 애쓰며 진심을 탈탈 털어 보여 줬는데.
저주에 걸린 공작을 모른 척하는 게 옳을까.
악녀 주제에 이제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우습긴 하지만.
게다가 제약이 많은 귀족 출신 이혼녀로 이 세상에 적응하고 돈도 벌려면 남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나.
내 코가 석 자인데.
자신이 처한 형편을 잘 알면서도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게 문제였다.
메르세데스 공작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게, 그가 차지해야 할 영광을 엉뚱한 이들이 누리고 있는 게 왜 이렇게 억울하고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정작 공작 본인은 전혀 신경 쓰는 거 같지 않은데.
생각해 보면 공작은 알레스의 선택을 미친 짓이라 비웃지 않고 지지해 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에 대해서도 과분할 정도로 높게 평가해 준 유일한 사람이고.
그래서 자신도 그에 대한 평가가 신경 쓰이는 걸까?
아니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지닌 선녀 DNA가 말썽인 걸까?
“유모가 기다린다고 하셨나요? 호위와 마차는 있으신 건가요?”
공작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황궁의 마차와 호위를 하루 빌렸어요.”
“곧 정식 호위 기사를 구하셔야겠습니다. 일일 호위는 그리 책임감이 없어서요. 개중엔 무면허도 있다고 합니다.”
윽, 헤라클레스에게 파티시에와 호위를 겸직하게 할 건데….
물론 무면허다.
생각해 보니 황궁 음식 나눔 소장도 헤라클레스에게 맡겨야 하는데.
역시 무리인가?
“유모가 기다리는 곳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어느새 재킷을 주워 걸친 공작이 말했다.
별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잠깐 함께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저주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자 싶었다.
뭐라고 시작하지?
‘공작님 저주에 걸린 거 아세요?’
‘뭐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닌데요, 저주에 걸리셨어요.’
‘아, 뭐예요. 저주 걸렸잖아요, 하하하.’
‘저주 걸려도 잘 산대요. 힘내세요.’
‘한 집 걸러 한 집이 저주라잖아요. 생각보다 흔한 일이래요.’
아무리 그래도 처음부터 ‘당신 저주 걸렸어.’ 하고 대놓고 말하는 건 좀 그렇다.
이럴 땐 ‘아는 사람’ 화법으로 운을 떼는 게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일 듯.
“저, 공작 전하. 저주라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주요?”
“제가 아는 사람이 저주에 걸려서요. 옆에서 보기엔 무척 안타까운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거든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좋을까요? 차라리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나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네요.”
“전하라면 어떤 걸 바라시겠어요? 모른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쪽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아는 쪽 중에서요.”
공작의 암청색 눈이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곧 알레스를 향했다.
“흠… 고통스럽더라도 진실과 마주하는 것, 그게 보통 산다는 거 아닐까요?”
“역시나 그럴까요?”
“저 역시 진실을 알기 두려워 주저한 적이 있지만, 결국 알고 싶어지더군요.”
“그런 적이 있었어요?”
“네, 오래전에요.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지낸다 해도, 결국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진실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더군요. 그런 건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내 불행과 행복을 누군가가 미리 판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내 몫은 나에게 맡겨 주었으면 합니다.”
역시 저주에 관해 얘기해 주어야 하나….
그런데 공작이 확실히 저주에 걸린 게 맞는지, 망설이게 하는 세 가지가 있었다.
알레스는 이 세 가지 의문점의 답을 찾을 수 없어 줄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째, 왜 자신은 공작의 매력을 알아보느냐.
둘째, 왜 로잘린 황녀는 공작에게만 들러붙느냐.
셋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팬클럽은 어떻게 존재하느냐.
공작이 ‘아싸의 저주’, ‘투명인간의 저주’에 걸린 거라면 어째서 이 세 가지 예외가 존재하느냐는 거다.
그중 세 번째는 조작이 가능하다고 치자.
예를 들면 브린 황자가 책을 많이 팔고 싶은 욕심에 가상의 팬클럽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푸른 불꽃의 고결’이란 별호도 그가 지어내서 퍼뜨린 걸 수도.
두 번째, 로잘린 황녀.
사랑의 힘?
저주도 깨뜨리는 고귀한 사랑의 힘 같은 설정 전래동화 같은 데 많이 나오잖아?
두 사람이 운명의 짝일 수도.
첫 번째, 나.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서?
이곳의 저주가 듣지 않는 걸 수도 있다.
그럼 우리가 운명의….
여하튼 이 세 가지 때문에 저주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조금 더 연구해 보고 내일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공작님, 말씀 감사합니다.”
“아는 분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네…. 저, 내일도 제도에 계시나요?”
“그럴 듯합니다.”
“그럼 혹시 내일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자연스런 애프터 신청.
조각 케이크 집 앞에서 서성이던 마사가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갈 때는 분명 카르티에 공작의 초대로 갔는데, 올 때는 메르세데스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오시다니!
우리 아가씨는 연애 천재?
* * *
다음 날 일찍 알레스는 급한 대로 다시 황실 도서관에 가 봤다.
저주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요량이었다.
다행히 브린 황자는 없었다.
자리에 잘 없어 만나기 힘들다더니.
지난번 알레스가 도서관에 왔을 때 그가 이곳에 있었던 건 한 사람에겐 마침 행운이요, 한 사람에겐 하필 불운이었던 모양이다.
알레스는 서가에서 크고 두꺼운 책을 뽑아 들었다.
<삽화를 곁들인 저주 사례집>.
삽화가 너무 실감나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공작이 걸린 저주와 최대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거기서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보통의 경우는 저주를 받아 누가 봐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기거나, 아니면 멀쩡한데 스스로 이상해 보이는 환각을 겪었다.
이렇게 누가 봐도 멀쩡한데 다만 그 사실을 집단으로 망각하는 건 매우 희귀한 경우인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얌체 같은 저주가 아닐 수 없었다.
무언가를 변형시키거나 괴롭히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없었던 일로!’ 한마디 외치며 혀를 쏙 내미는 느낌이다.
알레스는 아직 반도 못 본 책을 덮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서둘러 로즈마리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웬 귀족 무리와 마주쳤다.
알레스가 못 본 척 지나치려는데, 무리에서 가장 지체 높아 보이는 남자가 알레스를 불렀다.
“레이디 페레티 아니신가? 아직도 궁에 있었던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점도, 아니꼽다는 듯한 말투도 알레스는 전부 찜찜했다.
그 말을 한 남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이 세계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 인상이 제일 더러웠다.
단순히 못생겼다는 말이 아니다.
못생기기도 했지만 매우 음험하고 욕심 사나워 보였다.
황제보다 더 피하고 싶은 면상은 처음이다.
“아무리 황궁 안이라지만 수족 하나 없이 망아지처럼 들쑤시고 다녀서야 되겠나? 명색이 황제의 전 부인인데 조금은 품위를 지켜야지.”
응? 뭐라고?
원래 귀족 레이디에게, 제 말마따나 황제의 전 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망아지라는 말을 쓰나?
와, 이거 실화냐?
“품위를 중시하는 분이라면 누구신지 존함부터 밝혀 주시지요.”
알레스의 요청에 기피 면상 1위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페레티가의 둔녀가 말이 늘었다더니 소문대로군.”
아니, 이 영감이?
인상도 더럽더니 입에도 걸레를 물었나.
“내 이름을 알고 싶다? 스노브 후작이다. 그래,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머스코비 매먼 스노브 후작.
<귀족 연감>에서 본 기억이 났다.
음침한 상단을 여럿 운영하고 있는 게 뒤가 아주 구려 보였다.
“아, 궁에서 나가거든 무엇보다 호위를 잘 붙이시게. 바깥세상은 훨씬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다간 큰일 나지.”
그는 가다 말고 기억났다는 듯 이 말을 하고는 음침하게 웃었다.
메르세데스 공작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알레스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스노브 후작의 말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곧 큰일이 날 거라는 협박같이 들렸다.
정말이지 빅 똥을 밟은 느낌이었다.
투덜거리며 로즈마리 궁으로 돌아온 알레스는 당 충전이 절실했다.
어서! 헤라클레스의 탁월한 빵을 입 안으로!
그러나 알레스를 가로막은 건 뜻밖에도 도자기 인형이었다.
“얼마 후면 궁을 나가신다기에 들러 봤어요.”
로잘린 황녀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알레스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훑었다.
오늘은 생각지 못한 지뢰를 자주 밟는다.
하지만 이번 지뢰는 방금 전 것에 비하면 매우 깜찍한 지뢰다.
연적일지 모르는 상대를 염탐하러 온 소녀라니.
귀엽다, 귀여워.
“언니, 카이트 오라버니랑 친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황녀님.
“별로요.”
공작과 나름 깊은 얘기를 나눈 거 같긴 하다.
이제 곧 저주라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심각한 얘길 나눌 거기도 하다.
하지만 친하진 않다.
“그럼 어제 둘이 무슨 얘길 그리 오래 했어요? 친하지도 않으면서?”
어제 공작이 자신을 쫓아온 정황을 되짚어 보니 브린 황자와 로잘린 황녀를 커피하우스에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집필 얘기랑 영주의 의무에 대한 이야기요?”
말하고 보니 매우 재미없게 들린다.
그 점이 로잘린을 만족시킨 듯했다.
참, 그러고 보니 저주에 대한 의문점 중 하나를 풀 기회일지 모른다.
“저기…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황녀님 눈엔 메르세데스 공작님이 멋져 보이세요?”
미심쩍은 듯 가늘게 뜨고 있던 황녀의 눈이 활짝 커졌다.
알레스의 질문은 두 가지 점에서 로잘린을 기쁘게 했다.
우선 이 질문이 황녀의 귀엔 ‘공작님 난 별론데, 넌 어디가 멋져 보이니?’로 들렸다.
알레스에게 바짝 세웠던 경계의 날을 누그러뜨려도 될 거 같았다.
더욱이 로잘린은 공작 이야기를 하고 싶어 언제나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적당한 말 상대가 없어 슬픈 소녀였다.
‘한 사람만 걸려 봐.’ 하고 벼르던 차에 알레스가 톡 건드려 준 셈이다.
사실 이곳에 온 건 누군가와 함께 공작에 관한 수다를 떨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 로잘린으로선 알레스의 질문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멋지죠. 제국에서 최고로.”
로잘린이 주저 없이 말했다.
저주가 듣지 않는 사례 하나.
아니면 눈에 콩깍지 저주가 씐 사례 하나?
이건 이거대로 상태가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