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당신이 보이기 시작해요
알레스는 마음의 선반에서 뭔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매우 크고 무거운 게 떨어진 건 틀림없었다.
바닥이 아작 난 거 같았다.
깨진 틈으로 바람 같은 게 비집고 들어와 모든 걸 엉망으로 휘저었다.
소름이 돋았다.
공작과 겨우 한 발 더 가까워졌을 뿐인데, 그전엔 안 보이던 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암청색 눈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어둡고 냉철하게만 느껴졌던 파랑에서 강렬한 무언가를 보았다.
휴식과 흥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푸른 불꽃.
매우 유치찬란한 표현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 말고 슬슬 다른 것까지 보였다.
예를 들면, 눈동자 조금 위에 달려 있는 의외로 길고 예쁜 속눈썹이라든가.
사실 키 차이 때문에 눈보다는 과즙미 넘쳐 보이는 입술과 유난히 도드라진 울대뼈가 더 잘 보였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셔츠 안에서 가슴 근육도 강한 존재감을 발하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도덕책 쓰는 공작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 거지!
매우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이걸로 공작이 저주에 걸렸다는 건 더욱 분명해졌다.
전부 다 원래부터 공작의 몸에 달려 있었겠지만, 지금껏 아무도 몰랐을 테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못할 신체 일부들이 아닌가.
이 대목에서 알레스의 머릿속에 세 가지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하지만 언제까지 정지화면일 순 없기에 대충 흐름에 어울리는 대사를 주워섬겼다.
“…변명해 보세요, 그럼.”
그리고 얼른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떨군 메르세데스 공작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셨을 테지만, 제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예, 뭐.”
알레스는 조금 찔려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계속 서서 변명을 들어야 할까요?
뛰느라 안 쓰던 근육을 써서 온몸이 쑤시고요, 다리도 좀 아프고, 코앞에서 올려다보느라 목도 아프고….
메르세데스 공작이 갑자기 재킷을 벗었다.
휘휘 둘러보더니 말라 버린 분수의 가장자리 돌 위에 재킷을 펼쳤다.
돌로 만든 괴수의 머리 조각과 수조 등 오래된 분수의 흔적들이 제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레이디, 여기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이 펼쳐진 자신의 재킷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옷이 구겨지고 더러워질 텐데요? 그냥 맨바닥에 앉아도 괜찮아요.”
어디든 앉기만 하면 만족이겠어요.
“어차피 늘 뒹굴고 부대끼느라 남아나지 않는 옷입니다. 야외에서는 곧잘 여러 용도로 사용하지요.”
보통 서재나 도서관 같은 데서 글 쓰지 않나요?
뒹굴고 부대낄 일이 뭐가 있지?
“앉으시면 좋겠습니다.”
공작이 재차 권하자 알레스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린 두 개의 괴수 머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은 앉고 공작은 서 있는 구도가 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란히 함께 앉기엔 자리가 좁기도 하고,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니까.
이렇게 변명을 관람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자리에 앉고 보니 의도치 않게 공작을 감상하기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선 공작의 모습이 종합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재킷까지 벗고 서 있으니 비율과 라인 등 체형적 장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몸 구석구석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들은 도저히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들었다.
평소 운동을 챙겨서 하는 편인가?
알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야외에서 할 일이 많으세요?”
정원의 꽃을 돌보거나 텃밭에서 방울토마토에 물이라도 주시나?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던진 이 질문이 그의 마음에 뭔가 파문을 일으킨 거 같았다.
마음에 일어난 파문은 변명을 앞두고 진지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도 점점 퍼져 나갔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눈이 장난꾸러기처럼 빛나는 걸 알레스는 분명 봤다.
“야외에서 할 일이 좀 많습니다. 영지의 접경 지역에서 연중 이백 일 이상 말썽이 일어나거든요.”
메르세데스령은 크루그 제국의 북쪽 끝에 위치한다.
국경과 맞닿아 있어 외세를 막는 제국의 성벽, 제국의 방패로 불렸다.
알레스가 도서관에서 읽었던 <귀족 연감> 중 개국공신 명문가 편에 이런 내용이 나왔던 거 같다.
“말썽이라면… 막 폭력이 오가는, 무력 충돌 같은 건가요?”
공작의 파란 눈이 동그래졌다.
“폭력… 그렇지요. 말로 해결된 적은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보통 전투라고 하지요.”
“그럼, 전하도 전투에 나가시나요?”
공작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왜 무슨 말만 하면 물범처럼 눈이 동그래지는 거야?
“전투를 이끌고 영지를 지키는 게 영주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아….”
“메르세데스는 대대로 ‘수성’ 방면에서 전문성과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알레스는 그제야 공작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티끌 없이 고상해 보이는 얼굴과는 꽤나 대조적인 손이었다.
손마디와 힘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
저 손으로 펜을 쥐고 금언 두루마리를 쓰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연중 이백 날이 넘게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며, 그 사태를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면?
“책은 대체 언제 쓰시는 거예요?”
공작이 날마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쓸 거라 생각했던 알레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 입김이 얼어붙는 계절에요.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공기 중에 반짝반짝 결정들이 생기는 때는 싸움도 잠시 쉴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요? 그렇게 추운가요? 그래도 예쁠 거 같아요.”
공작은 자랑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북부의 겨울은 냉혹하지만, 덕분에 잠깐 평화가 깃듭니다. 그 잠깐의 휴전 기간 동안 책을 쓰지요. 겨울에 한번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추운 곳은 추울 때 겪어야 제맛이니까요.”
알레스는 하얗게 얼어붙은 북부의 메르세데스령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 속에 서서 반짝반짝한 입김을 쏟아내는 파란 눈의 남자도 떠올렸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낡은 갑주를 벗고 검도 내려놓았을 것이다.
검과 고삐를 잡던 상처투성이 손으로 펜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알레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공작에 대해 심하게 오해하고 있었잖아?
세상의 더러움과는 거리를 두고 고고하고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알고 보니 그는 세상의 진흙탕에 누구보다 발을 푹 담근 채 사투를 벌이며 세상 속에 자신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러니 방금 자신이 한 질문은 얼마나 혀를 찰 것이었나.
공작의 눈이 동그래질 만도 했다.
이런 오해 역시 아무래도 저주 탓인 거 같다고 알레스는 꿍얼거렸다.
‘이것 봐, 저주 탓이 아니잖아. 네 얄팍함 때문이잖아.’
아까부터 알레스가 모른 척하려던 이가 자꾸만 등을 톡톡 두드렸다.
저리 가, 저리 가.
‘그때 공작이 쓴 책을 보고 킬킬거리며 놀림거리로 삼은 게 누구였더라?’
끄응.
며칠 전의 알레스가 지금의 알레스에게 하는 소리였다.
외면하려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알레스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살벌한 전투가 일상인 곳.
마침내 입김이 얼어붙는 휴전기가 와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면, 과연 어떤 걸 남기고 싶을까?
아마도 삶에서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대상에 대해 쓰지 않을까.
한가한 말 따위 쓸 여력이 없겠지.
어떤 걸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전투에서 돌아온 그는 하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도덕적으로 사는 길>이란 책을 썼다.
솔직히 지금도 약간 적응이 안 되고 한쪽 입꼬리가 비싯 올라가려는 걸 참았지만.
알레스, 하여간 인간이 덜 됐어.
악녀가 인간이 됐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니 알레스는 스스로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느껴졌다.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던 공작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매우 큰 오해 하나를 해결했다.
“저… 변명해도 될까요?”
자신이 이미 크게 한 탕 해명했다는 걸 모르는 공작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잘린은 아주 예쁜 동생입니다.”
아, 맞다.
로잘린이 있었지.
알레스는 도자기 인형처럼 예뻤던 황녀를 떠올렸다.
“저도 로잘린을 아끼고 로잘린도 저를 잘 따릅니다. 실은 황실 연회가 있던 날 제가 지니고 있던 면죄권도 로잘린이 준 거였죠.”
아하, 드디어 면죄권 돌려막기의 비밀이 풀렸다.
알레스가 브린 황자의 면죄권을 빼앗고, 황자가 메르세데스 공작의 면죄권을 넘겨받고, 공작이 로잘린 황녀의 면죄권을 건네받은 거였다.
“제가 브린에게 면죄권을 양도한 걸 어떻게 알고는 숙소에 자신의 면죄권을 몰래 놓고 갔습니다.”
그냥 놓고 가기만 한 건 아닐 텐데요?
그 위에 청혼의 뜻도 함께 살포시 얹어놓고 갔을 텐데.
“얼핏 새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착한 아이고, 엉뚱한 면도 있거든요.”
공작님 한정 아닐까요?
“돌려주려 했지만 그 아이가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당시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겨 우선 복귀했지만 반드시 돌려줘야 할 거였죠. 매우 중요한 증서라 직접 전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이 혼인하면 그 면죄권은 공작님의 소유이자 로잘린 황녀의 소유가 되니 문제가 싹 해결되잖아요.
“그 아이를 걱정하고 좋아하지만, 정혼은 아닙니다.”
로잘린 황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요.
로잘린은 공작을 오라버니로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 아까 가졌던 세 가지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잘 들었습니다. 그게 마음에 걸리셨군요.”
공작의 변명을 청취한 알레스가 말했다.
알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작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전하가 저기 괴수 머리 사이에 앉으세요.”
공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오해는 공작님이 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제가 해명을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씀해 보십시오. 서서 듣겠습니다.”
“실은 답장을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요….”
“아, 괜찮습니다. 답장이라는 게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면 선뜻 내키지 않을 때가 많지요. 이해합니다.”
공작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멜로먼 이야기를 꺼낸 건 주제넘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편지를 도둑맞았어요!”
“도둑? 황궁에서?”
“제 유모가 편지 절도 현장을 덮쳐서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래서 전하가 보낸 열세 통의 편지 중 마지막 세 통만 제 손에 들어왔죠. 그것도 겨우 어제요.”
알레스의 해명에 공작의 암청색 눈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다.
사라진 열 통의 편지.
그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설마 또 페레티를 노리고 있는 거야?
황제의 세작이 편지를 가로챈 줄은 꿈에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공작은 다행히 자신에 대한 오해 몇 가지는 풀었지만, 대신 전혀 새로운 오해를 더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오해가 이상한 경로로 사실에 가까워질 줄은 공작도, 그자들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