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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7화 (17/120)

17화

그래서 당신을 쫓아왔습니다

“만인의 연인인 카르티에 공작께서 마음의 교류를 나누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브린 황자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물론 내가 교류를 좀 즐기긴 하지. 하지만 레이디 페레티는 매우 특별한 분이더군. 그래서 특별한 교류를 해 볼까 해.”

카르티에 공작이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말했다.

사람을 앞에다 앉혀놓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커피에 뭘 탔나?

알레스가 멀건 눈으로 카르티에 공작을 쳐다봤다.

조금 뻔뻔하고 살짝 양아치 같은, 특별하다면 특별한 거래를 하긴 했지만.

그게 저렇게 느끼한 눈빛과 요염한 목소리로 흐느적거리며 할 얘기인가.

알레스가 황당해 하든 말든 카르티에는 눈빛을 더욱 그윽하게 뭉개며 말했다.

“마치… 정처 없이 떠돌던 마차가 마침내 주차할 곳을 찾아 안도한 느낌이랄까? 내 영혼의 주차장을 찾은 거 같아.”

아, 진짜 드럽게 우려먹네!

쿨한 척 주차장을 내줄 땐 언제고,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나?

알레스는 발끈했지만, 없는 형편에 감정에 휘둘려 다 잡은 주차장을 내줄 순 없었다.

한편 카르티에 공작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겐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느끼한 말을 잘도 해대는군.”

브린 황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커피 잔만 응시했다.

로잘린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붉은 물보라의 매혹께서 드디어 영혼의 반려를 찾으신 건가요? 그거야말로 축하드릴 일인걸요. 그런데 저한테는 소개도 안 시켜 주실 건가요?”

황녀는 알레스를 향해 눈짓했다.

“아, 이런 실수가 있나. 두 분 서로 인사 나누시지요. 이쪽은 로잘린 샹들리 맥켈란 황녀이십니다. 이쪽은 레이디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이시고요.”

로잘린 황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워낙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들었다 놨던 이름이기에 겨우 열다섯 살인 황녀조차도 이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새언니가 될 뻔한 알레스와 시누이가 될 뻔한 로잘린의 대면은 머쓱하기만 했다.

로잘린이 카르티에 공작에게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뭐예요, 공작 전하. 다 장난이었군요. 이분과는 그럴 리 없잖아요.”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닌 줄 알겠다.

남들은 속으로만 생각하거나 돌려 말하는 걸 이 해맑은 아가씨는 머리에서 곧장 입으로 꺼내놓은 거뿐.

하지만 알레스는 어쩔 수 없이 살짝 빈정이 상했다.

사회 통념상 제국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귀족이자 <빌보아 차트> 1위에 빛나는 카르티에 공작이 별 볼 일 없는 이혼녀를 선택할 이유는 별로 없을 거다.

거기에 딱히 불만은 없다.

하지만 선택권이란 양쪽에 공평하게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잘난 사람만 선택권이 있냐? 못난 사람도 선택권이 있다!

못난 나에게도 물어봐 달란 말이지.

그럼 대답해 주리라.

나도 저런 느끼한 공작은 내 스타일 아니라고.

줘도 싫다고.

카르티에 공작에게 바라는 건 오직 마차를 세워 둘 주차장뿐이라고.

그는 나에게 주차장만큼의 의미라고.

하지만 아무도 알레스에겐 묻지 않으리라.

불만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로잘린.”

그때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메르세데스 공작이 입 밖에 낸 건 황녀의 이름뿐이었지만, 그 안에 찬바람이 가득했다.

로잘린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파르르 떨렸다.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자기 말이라면 뭐든 미소로 받아 주었던 카이트 오라버니가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설마 저 여자 때문에?

황녀의 비상한 촉이 발동했다.

어려서부터 새침데기였던 로잘린 황녀는 친오빠인 황자들에게도 낯을 가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5황자의 친우였던 메르세데스 공작에게만은 잘 들러붙었다.

그는 차갑고 까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가가기 편한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 이런.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카르티에 공작이 분위기를 수습하는 척 나섰다.

사실 그는 진작부터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도 안 되게 오버하며 느물거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수십 채 이불 아래 있는 콩 한 알을 알아채는 공주의 예민함.

그런 공주의 예민함을 지닌 카르티에 공작이 아니던가.

그는 한눈에 매우 재밌는 걸 발견하고 남몰래 루비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오로지 돈 생각밖에 없는 듯했던 레이디 페레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어떠한 일에도 무반응이던 메르세데스 공작이 동요하는 걸 보았다.

남녀 목석 대표라고 해도 좋을 두 사람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왜?

이런 빅 재미를 놓칠 카르티에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자신 같은 속물에게 번번이 무관심의 쓴 잔을 들이민 두 사람이 아닌가.

조금 골려 줄까?

카르티에는 일부러 메르세데스의 심기를 살살 긁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눈에서 새파란 빛을 뿜으며 달려들 기세다.

카르티에는 완전히 감동해 버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세상천지 모든 것에 무덤덤한 시선을 던지던 메르세데스를 자신의 손에 쥐고 짤짤 흔드는 날이 오다니.

카르티에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이 녹안의 여인이 무적의 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만한 황제를 얼빠지게 만들지 않나, 푸른 불꽃의 고결을 붉으락푸르락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지 않나.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여자다.

흥미로운 여자는 곁에 가까이 두어야지.

아무래도 마차 주차장과 관련된 거래는 이미 성사된 듯했다.

“실은 이 거리에 집을 보러 온 거예요. 유모가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알레스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일어섰다.

“그렇다면 제가 에스코트하지요. 다음 일정이 있기도 하고요.”

카르티에 공작도 따라서 일어섰다.

“괜찮아요, 공작 전하.”

그러나 커피하우스 밖으로 나온 알레스는 카르티에의 에스코트를 사양했다.

“제 발로 잘 걸어 갈 수 있는 데다 공작 전하와 함께 가다가는 오히려 제 명대로 못 살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알레스는 무릎을 까딱하고 쌩하니 돌아섰다.

그 냉정한 뒷모습을 보며 카르티에는 생각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도 싫다, 인기의 정점에 있는 이 몸에도 관심 없다.

그러더니 좋아하는 게 금욕주의 목석?

취향 한번 특이하군.

역시 기분 나빠.

알레스는 조각 케이크 모양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걷는 속도를 점점 높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왜냐하면 집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메르세데스 공작의 모습을.

아무래도 알레스를 쫓아오는 거 같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매우 민망하겠지만.

알레스가 치맛자락을 들고 뛰다시피 하자, 그도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다리가 길어서 금세 거리가 좁혀졌다.

저거 봐. 쫓아오는 거 맞네.

그런데 왜 쫓아오는 거지?

나는 또 왜 도망가는 거고.

알레스는 달리면서 생각해 봤다.

지금은 왠지 메르세데스 공작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면 화가 날 거 같았다.

막 따지고 싶을 거 같았다.

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알레스는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이곳은 최신 트렌드를 이끄는 제도에서도 가장 핫하고 힙한 거리.

알레스는 그 길을 미친 여자처럼 내달렸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숨이 가빠 왔다.

아직도 따라오나 슬쩍 뒤를 보니 공작은 이를 앙다문 채 거의 등 뒤에 와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알레스가 속도를 낮추자 공작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허리를 굽힌 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알레스는 자신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작은 골목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몇 발짝 떨어진 맞은편에서 공작이 무릎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단단한 가슴이 역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암청색 눈을 들어 알레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체, 하아, 왜 그렇게 달려요, 하아, 하아….”

“취미예요, 후아, 후아, 전력질주하면 잡념이, 후아, 사라지거든요, 후아, 후아….”

“아마, 하아, 제국에서 제일 잘 달리는 하아, 레이디일 겁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느라 한참을 들썩이던 공작의 넓은 어깨가 이제 다른 의미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시죠?

제국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한 거리에서 대낮 추격전을 벌이다니.

기가 차서 웃음밖에 안 나오실 거예요.

알레스는 웃고 있는 공작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웃는 얼굴은 처음인가?

그전에도 희미하게 웃은 적은 몇 번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제 보니 공작은 소년처럼 웃었다.

웃을 때 얼굴이 소년같이 청량했다.

새벽 숲의 삼나무 향은 여전했다.

저주 때문에 저런 모습도 그동안 안 보였던 걸까?

알레스는 넋을 놓고 쳐다보다 물었다.

“…그런데 왜 쫓아오셨어요?”

“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뭐가요?”

“멜로먼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는 사이신가요?”

“네?”

“그래서… 답장을 보내지 않은 건가요?”

공작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알레스는 자신이 처음에 왜 뛰기 시작했는지, 왜 공작을 피하고 싶었는지, 그제야 이유가 떠올랐다.

“공작 전하야말로 영지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요. 제도에서 정혼자와 오붓한 시간 보내고 계셨더군요.”

당신은 이미 정혼자가 있잖아!

이게 정신 나간 달리기의 시작이었다.

물론 정혼자가 있다는 게 죄는 아니었다.

알레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암청색 눈이 왠지 모르게 활기를 띤 거처럼 느껴졌다.

마치 수수께끼를 맞힌 아이같이 초롱거렸다.

“오해하실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쫓아왔습니다.”

“오해라니요? 제가 오해하고 말고 할 일이 있나요?”

알레스는 마음을 들킨 거 같아 괜히 큰소리쳐 봤다.

알레스를 내려다보는 공작의 눈이 간절해졌다.

“변명할 수 있게 해 줘요.”

“…….”

“오해… 받기 싫습니다.”

“…오해 안 한다니까 자꾸 그러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떻게 오해하든 관심 없었습니다. 해명하고 싶은 적도 없었고요.”

네, 그게 당신이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한텐 오해 받기 싫어졌어요.”

이건… 무슨 말이죠?

공작은 심해 같은 눈으로 알레스를 응시하며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이 나를 오해할까 봐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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