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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6화 (16/120)

16화

정혼자가 있었어?

“주인이 누군데요? 제가 지금 좀 바쁜데.”

조각 케이크 집이랑 주차 문제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나는 중이란 말이죠.

알레스의 말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한 발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르티에 공작 전하십니다.”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마사가 펄쩍 뛰며 알레스를 재촉했다.

“아가씨, 가 보세요. 집은 제가 살펴보고 있을게요. 이웃이 될지도 모르는 분인데, 어서요.”

여차하면 등이라도 떠밀 기세다.

‘이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알레스의 머릿속에서 팟 하고 섬광이 터졌다.

“좋아요, 잠깐 시간 내 보죠.”

남자는 주인이 기다린다는 커피하우스로 알레스를 안내했다.

더 코스모스.

커피하우스의 이름이었다.

고위 귀족들을 상대로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입구에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카르티에 공작은 2층 창가의 가장 좋은 자리에 기대 앉아 있었다.

바깥에서 공작의 모습이 매우 잘 보이는 자리였다.

몇몇 ‘붉은 물보라의 매혹’ 멤버들이 그 모습을 훔쳐보며 몸을 파르르 떨거나 작게 한숨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거였다.

카르티에는 다음 일정을 떠올리며 잠시 굽이치는 백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저 아래로 커피하우스로 들어오는 레이디 페레티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여자인지 빨리 만나고 싶었다.

조금 전 상한 기분을 가능한 한 빨리 만회하고 싶으니까.

콩 한 알을 놓고 그 위에 수십 겹의 솜이불을 쌓아도 불편함을 느낀다는 공주의 예민함.

카르티에는 그 공주의 예민함을 지닌 남자였다.

그의 안목과 감각은 바로 그 예민함에서 나왔다.

그랬기에 그는 금세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까 거리에서 모두가 동경과 연모의 눈빛을 보낼 때, 유독 한 사람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훑고 있다는 걸.

그 역시 미소를 유지하면서 노련한 곁눈질로 그녀를 관찰했다.

가소롭다는 표정에, 중요한 대목에선 피식 웃기까지?

자신의 치밀한 연출에 감탄을 해도 모자랄 판에 웃어?

카르티에 공작은 기분이 확 상했다.

아니, 차갑게 쏘아보고 조소를 보내는 건 그나마 나았다.

그녀는 금세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딴 일에 골몰했다.

인상을 쓰면서 이마를 벅벅 문지르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뭔가 중얼중얼하면서 손가락을 꼽았다.

감히 나 카르티에 공작이 눈앞에 있는데 딴 데를 봐?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명치에서 짜증인지 웃음인지 모를 게 부글부글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저 야릇한 녹안과 웨이브 진 핑크 브라운의 머리칼을 어디서 본 듯한데….

아, 아아아!

황제의 전처, 이혼하겠다고 나선 페레티가의 레이디로군.

카르티에 공작은 사교계의 별로서 중요한 연회엔 빠지지 않았지만, 황제의 즉위 축하연에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

연회에서 벌어질 일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회 전에 열린 즉위 후 첫 국무회의엔 참석했는데, 덕분에 알레스가 오만한 황제의 얼을 빼놓는 진풍경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날 그런 눈으로 쳐다봤지.

조금 이상한 여자잖아?

그래서 그랬구나.

카르티에 공작은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알레스가 자리에 도착했을 땐 기분이 완전히 좋아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한 뒤, 알레스 쪽 창에 손수 커튼을 쳤다.

“강한 볕도 가릴 수 있고 따가운 관심도 가릴 수 있죠.”

그 목소리는 다정하고 달큰했다.

눈빛은 은근하면서도 살짝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마음이 급한 알레스가 인사도 싹둑 잘라 먹고 말했다.

“이런, 무서워라. 긴장 풀어요, 레이디.”

카르티에 공작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국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분과 커피 한잔 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화내실 건가요?”

넌 이미 그렇게 말했고, 난 화는 안 낼 거지만 짜증이 이만큼 났단다.

인기 있다는 말이 알레스에겐 다른 뜻의 비웃음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카르티에 공작은 황제의 연회엔 안 갔어도 알레스에 대한 소문은 빠짐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인기야 카르티에 공작님을 따라갈 수 있나요.”

이렇게 나름 비위를 맞춰 보는 건 얻어내려는 게 있어서다.

때마침 커피가 나왔다.

“여기 커피 맛이 아주 좋아요. 우주의 맛이라고 해두죠.”

알레스는 유혹적인 액체가 담긴 잔을 내려다보았다.

저쪽 세상에 살 땐 빵과 커피가 살이요 피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과 카페인으로 버텨온 나날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카르티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실은 기회가 된다면 사업 얘길 좀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사업, 좋지.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이미 착수하신 사업이 있나요?”

레이디 페레티가 황궁 음식 나눔장을 연다는 소식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아, 실은 집을 좀 보러 왔어요.”

“우리가 이웃이 될 수도 있겠군요. 사업을 시작한다면 저를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 사양치 마시고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자강의 신조가 ‘밥값은 하자’라면, 카르티에 공작의 신조는 ‘공짜는 없다’일까.

공작이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알레스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럼 사양 않고 부탁 좀 드릴게요.”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알레스의 기세에 카르티에는 멈칫했다.

“실은 이 거리에서 본 집 하나가 맘에 드는데, 주차 문제가 심각하더라고요.”

“요즘은 어디 가나 주차가 골치죠.”

“제가 이혼하면서 마차를 세 대나 뜯어, 받기로 했거든요.”

“잘하셨네요.”

“아름답고 드넓기로 소문난 카르티에 저택 부지 자그마한 귀퉁이에 마차 좀 세워 두면 안 될까요?”

카르티에 공작가의 영지는 동부에 있었지만, 제도에도 매우 으리으리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알레스가 사려고 하는 조각 케이크 모양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깨비 뺨치게 느닷없는 알레스의 드러눕기에 카르티에의 나긋하던 목소리가 툭 꺾이며 ‘허’도 아니고 ‘억’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날강도 같은 요구도 요구지만, 더 기가 막힌 게 있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카르티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저리 부끄럽고 뻔뻔한 부탁을 하면서 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주차장을 따내야 한다는 절박함, 오직 그거밖에 없는 듯했다.

살면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야.

카르티에는 기껏 살아났던 기분이 다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 여자와는 진짜 사업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뵈는 게 돈밖에 없는 여자니까.

“좋습니다.”

카르티에 공작이 쿨하게 웃으며 흔쾌히 말했다.

약간의 우격다짐과 실랑이가 뒤따르리라 예상했던 알레스도 이 대목에선 멈칫했다.

“저택의 한쪽을 내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와, 대인배.

“그럼 레이디는 어떻게 보답하실 건가요? 저는 절대 공짜로 무언가를 내드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렇지.

“…세를 낼까요? 형편상 많이는 못 드려도 어느 정도의 주차비를 드릴 각오는 했습니다.”

“아니오, 저는 대가보다 거래를 좋아합니다.”

“거래요?”

“네, 오고가는 거래 속에 싹트는 마음의 교류를 추구합니다.”

자연스런 만남 추구도 아니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뭘 해야 하죠?”

“주차장은 내어드렸고, 무엇을 돌려주실지는 천천히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레이디.”

카르티에가 웃으며 덧붙였다.

“기왕이면 한쪽만 일방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 양쪽이 다 이익이면서 만족스러운 방법이길 바랍니다.”

알레스는 이 <빌보아 차트> 1위가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주 보통이 아니게 사람을 성가시게 만든다.

그래도 골치 아프던 주차 문제를 가뿐히 해결했고.

사업을 하려면 카르티에 공작과 가까이 지내서 나쁠 건 없지.

알레스는 흡족한 마음으로 남은 커피 맛을 음미했다.

구수하다, 구수해.

“커피 맛 어떤가요?”

“좋네요.”

“앞으로 커피 사업에 손댈 생각도 있습니다.”

누구나 동경하는 회원제 커피하우스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그것도 레이디와 마주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카르티에도 생각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조용히 커피 맛을 음미하던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오더니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훤칠한 남자 둘과 치장이 화려한 여자 하나.

그들을 본 알레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중 둘이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 하나는 브린 황자.

나머지 하나는 북부의 영지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야 할 메르세데스 공작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방정맞은 브린 황자가 가장 먼저 알은체를 했다.

“카르티에! 레이디 페레티?”

“5황자님 아니신가. 메르세데스, 오랜 만이군. 아름다운 황녀님을 뵙습니다.”

“어머, 카르티에 공작 전하를 뵙다니 운이 좋네요.”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투가 익히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알레스는 떠들썩하게 오가는 인사 속에서 메르세데스 공작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난처한 거 같기도 하고 당황한 거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거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카이트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제가 끌고 왔지요.”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메르세데스 공작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메 공작은 자신의 팔을 그녀에게 덜렁 내어주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알레스는 마신 커피가 역류하는 거 같았다.

이제 보니 그 잘나신 신체 일부 아무한테나 잘도 내어주시네….

물론 그때 잡은 건 팔은 아니었지만.

“역시 황녀님이시군요. 그렇게 어려운 걸 해내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카르티에 공작이 쿵짝을 맞춰 주었다.

카 공작과 같은 백금발에 황손임을 상징하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새침한 인상과는 달리 꽤나 재잘댔다.

“그럼요, 전 이미 메르세데스의 안주인이나 마찬가지인걸요. 오라버니가 제 청혼도 받아 주셨어요.”

“이거 축하를 드려나 하나요?”

카르티에는 짐짓 놀란 시늉을 했지만 어째 재밌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로잘린, 그만해. 그러다 카이트 정말 화낸다.”

친우의 눈치를 살피던 브린이 여동생을 말렸다.

“흥, 브린이나 그만해. 오라버니는 나한테 절대로 화 안 내.”

“네 진짜 오라버니는 나거든? 어이가 없어서.”

“어쨌든 세 분 모두 무척 반갑군요. 좋은 소식도 듣게 되고. 카이트, 정말로 축하하네.”

카르티에의 축하 인사에 메르세데스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주고받음과 살살 긁기가 오가는 동안 알레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혼자가 있었어….’

로잘린 황녀라는 그녀는 아직은 앳돼 보였지만 여러 모로 메르세데스 공작과는 어울리는 상대였다.

“그건 그렇고 레이디 페레티를 여기서 뵙게 될 줄 몰랐네요. 그것도 멜로먼 버터와 함께 계실 줄은.”

브린 황자가 알레스와 카르티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아, 우리.”

카르티에 공작이 쓸데없이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역시나 쓸데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의 교류를 나누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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