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카르티에 저 자식
저주에 걸린 공작이라.
한번 그쪽으로 상상력이 발동되니 알레스의 가슴은 미지에 대한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한편 마사도 조용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마지막 편지에 뭔가 나온 게 분명했다.
마사가 기대한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리고 화끈화끈 알싸한 내용이!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아가씨의 얼굴에 저리 홍조가 떠오를 리 없지 않은가.
메르세데스 공작이시여, 실망시키지 않으시는군요.
“그런데 말이야, 이 편지를 가로챈 건 누구고 왜 가로챈 걸까?”
혹시 공작에게 저주를 건 검은 세력은 아닐까?
알레스는 심지어 그의 편지까지 사라지게 하려는 저주의 위력과 치밀함에 전율을 느꼈다.
세 통이나마 자기 손에 들어온 건 그야말로 특급 유모가 이루어 낸 기적 같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를 음해하려는 자들일까요?”
연애편지를 가로채다니 정말 지독한 인간들이지요.
우리 아가씨가 새 출발 좀 해 보려는데 그걸 두고 보지 못해 훼방 놓으려는 못돼처먹은 자들 같으니라구.
“아무래도 우릴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있는 거 같아요.”
마사가 불만스런 얼굴로 투덜거렸다.
말해 뭐 하겠어.
강한 자에겐 비굴하고 약한 자에겐 잔인한 이들이잖아.
이혼녀에 가문도 후져, 정치적 왕따에 심신 미약.
딱 씹고 밟고 흔들기 좋은 먹잇감이지.
그래도 ‘우리’라고 해주니 고맙네, 마사.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거 같은지, 마사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아가씨, 내일은 저택을 보러 가요.”
“여기서 나가 살 집 말이야?”
“예. 제가 그동안 후보지들을 면밀히 검토해서 추려 보았거든요. 가장 추천드리고 싶은 집부터 둘러보시죠.”
“추천의 이유는?”
“제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지역에 있어요. 물가가 높은 제도에서도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곳인데도 집이 없어서 못 구한답니다.”
“그 정도야? 왜 그렇게 인기가 좋은데?”
“카르티에 공작가가 근처에 있거든요. 그야말로 최신 정보와 유행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지요.”
저쪽 세상에서 쓰던 말로 하면 ‘핫플’이란 거로군.
“괜히 비싸기만 한 거 아니야? 비싼 집 이고 지고 사느라 허리만 휘는 건 아닐까?”
저쪽 세상에서 쓰던 말로 하면 ‘하우스 푸어’ 되는 거 아니냐고!
“아가씨가 조신하게 중매로 재혼을 하실 거라면 굳이 번잡한 제도에 사실 필요도 없습니다. 교외로 나가 정원 딸린 널찍한 저택에서 여유롭게 사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안 그러실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결혼보다는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게 목표니까.
사업이든 장사든 아무래도 유행을 선도하는 핫플에서 벌이는 게 유리하긴 하겠지.
지리적 콩고물이라는 게 있잖아.
“그렇죠. 아가씨는 운명을 직접 개척하는 분이시죠. 그런 뜨뜻미지근한 중매가 아니라 격정적인 연애로 반려를 찾으세요.”
“…….”
잊을 만하면 도지는 완벽한 유모의 몹쓸 고질병 같으니라구.
“그러니까 집은 제도에서도 유행의 정점에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 만남도 사고도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만남은 그렇다 치고, 사고는 뭔데?
알레스가 심통 가득한 얼굴을 하자 마사는 얼른 덧붙였다.
“물론 사업을 하는 데도 거기가 딱이지요. 그 동네에서 하는 건 금세 유행이 되니까요. 거기서 뭘 하기만 하면 따라 하려고 대기 중인 촌뜨기들이 줄을 섰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렵게 구한 매물이에요. 게다가 그 동네 집치고는 이상할 만큼 싸게 나왔고요. 다른 사람이 채 가기 전에 얼른 보러 가요, 아가씨.”
* * *
이래서 매물은 반드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크게 낭패를 보게 될 수 있다.
크루그 제국의 제도 크루글라르슈에트리앙에서도 가장 핫하고 힙한 곳인 비에커가.
알레스와 마사는 황궁의 마차와 마부, 일일 호위 기사를 빌려서 황궁 밖으로 나왔고 지금 그 거리에 있었다.
비에커가 221B번지 앞에 서서 집을 올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
‘이러니 빈 집이 남아 있었던 데다 집값까지 쌌던 거구나.’
저택이라 하기도 뭣한 그 3층 건물의 전면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좁다랗긴 했지만 그런대로 정상이었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면적이 좁아지더니 급기야 건물의 후면은 벽이 아닌 뾰족한 모서리만 남게 되었다.
이등변 삼각형, 조각 케이크 모양의 집이었다.
그것도 인심이 박한 케이크 집의 매우 얄상한 조각 케이크.
한마디로 부동산 노다지이니 자투리땅이라도 그냥 놀릴 수는 없다고 배짱을 튕기는 듯했다.
어떤 땅이든 건물을 욱여넣어 돈을 뽑아내겠다는 심보가 돋보였다.
이 근방엔 그런 식으로 지어 올린 기기묘묘한 집이 몇 채 있었다.
마사는 실망과 민망함에 얼굴이 푸르죽죽해졌지만 알레스는 담담했다.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데?”
무엇보다 위치에 비해 매우 저렴한 집값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만하면 평민 상점가에 자리를 봐둔 황궁 음식 나눔장과도 가깝고, 음식을 받아와야 할 황궁과도 가까운 편이었다.
위치상으로는 이 조각 케이크 집과 황궁과 황궁 음식 나눔장이 대략 균형 있는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었다.
왔다 갔다 하며 쓰는 푼돈 교통비도 아무 생각 없이 쓰다 보면 돈이 줄줄 새는 구멍이 되기 마련.
그런 관점에서 세 지점이 효율적으로 모여 있는 건 바람직했다.
“그래도 집 모양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들 아가씨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을 텐데….”
마사가 울상이 되어 걱정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씹어대긴 하겠지.”
“그냥 다른 집을 더 보러 가요, 아가씨.”
“흔치 않은 모양이지만 확실히 버리기 아까운 장점이 있긴 해.”
알레스는 다시 찬찬히 건물과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 마차는 어디다 세워 놓지? 세 대나 달라고 할 참인데. 주차가 문제네.”
말이 나온 김에 마차 얘기를 좀 하자면, 이곳의 마차는 말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정석으로 움직였다.
예전처럼 무식하게 말을 학대했다가는 몰상식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사교계에서 매장당할 수 있었다.
마력이 깃든 돌인 마정석을 연료구에 넣으면 마차가 동력을 얻어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마정석은 천연 광물로 매장량이 한정돼 있었다.
그래서 값도 비싸고 자원 고갈도 야기했으며, 마정석에서 흘러나온 마력 부스러기가 대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의 폐로 들어가면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크루그 제국은 ‘하겐배라’라는 크림 형태의 자원이 풍부해 연료로도 사용했는데, 값은 쌌지만 부작용은 마정석보다 더 심각했다.
그럼, 마차에 말은 왜 달려 있는 걸까?
운치랄까, 감성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장치였다.
없으면 보기에 썰렁하니까.
심지어 기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을 마차에 몇 마리나 달았느냐로 가문의 재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여하튼 마차를 굴리려면 마부 월급도 있어야 하고 마정석 살 돈도 있어야 하고, 심지어 장식용인 말을 돌보고 먹일 돈까지 있어야 했다.
마차에 들어가는 유지비가 어마어마했지만 다른 귀족들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레스에게만 문제가 될 뿐.
황제가 마차 유지비까진 안 주려고 하겠지?
마차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현금화할 건데,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게 가장 이득일까?
제도에서 가장 멋지고 화려한 거리.
그곳에서 알레스는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머릿속이 바쁘고 복잡했다.
명색이 황제랑 이혼하는 건데도 이렇게 쪼들리니, 다른 이혼녀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이래저래 머리를 굴렸더니 또 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알레스가 챙겨 온 사탕을 찾아 손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끼아아아악!”
높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끼악 끼악 끼아아아악!”
한두 명의 소리가 아니었다.
“무슨 까마귀 소리야?”
알레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분인가 봐요. 역시 여기 살아야 할까 봐요, 아가씨!”
마사가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거리 여기저기서 잘 차려입은 영애 무리들이 튀어나왔다.
두 손을 꽉 모아 쥐고 어쩔 줄 몰라 하거나 까마귀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분? 이 열띤 분위기….
어째 빙의 전에 많이 보고 들은 장면 같다.
길 건너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영애들이 일사불란하게 손에 든 부채를 펼쳤다.
그러자 나타나는 여덟 글자.
붉, 은, 물, 보, 라, 의, 매, 혹.
영애들이 부채를 파르르 흔들었다.
‘이건….’
알레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술렁이는 거리를 바라봤다.
마침내 거리 끝에서 요란한 비명 세례를 받으며 그분이 나타났다.
“멜로먼 퐁파두르 카르티에 공작 전하아아아!”
말 안 해도 알 거 같았지만, 마사가 돌고래 소리를 내며 굳이 확인시켜 주었다.
광채를 발하며 굽이치는 백금발, 루비처럼 새침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
대리석을 깎은 듯한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매끄러운 피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촉촉한 입술과 거기 걸린 우아한 미소.
모델 워킹을 떠올리게 하는 멋들어진 체격과 체형.
입고 있는 옷이며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 모두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과연 <빌보아 차트> 1위의 위엄이었다.
카르티에 공작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카롭게 훑은 알레스는 생각했다.
‘메르세데스 공작이랑 뭐 비슷하잖아. 조금 더 기생오라비 같은 느낌이 있다 뿐.’
하지만 그의 표정과 동작엔 확실히 메르세데스 공작에겐 없는 퇴폐미 같은 게 줄줄 흐르긴 했다.
“안녕, 레이디.”
카르티에 공작이 달콤한 목소리로 주변에 모여든 까마귀와 돌고래들에게 골고루 인사했다.
우아함과 퇴폐미를 적절히 반죽한 미소로 사람을 녹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알레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카르티에 공작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저 머리는 올해 하반기 헤어 경향이 될 테고.
셔츠에 들어간 저 패턴과 커프스 버튼, 재킷의 라인은 패션계 이슈가 될 테고.
디자인이 독특한 저 구두와 색감이 눈에 확 띄는 저 스카프는 품절 임박이군.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잔하기 좋은 날씨네요.”
아하, 오늘의 주력 상품은 커피인가?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렇게 알레스가 열공 모드를 취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쪽에서 영애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카르티에 앞에 풀썩 쓰러졌다.
“구, 구두굽이….”
얼씨구?
카르티에 공작은 우아하면서도 친절한 얼굴로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제 손을 잡으세요.”
“가, 감사해요, 공작 전하.”
“괜찮아요? 많이 놀라셨죠?”
자상하게 영애의 상태를 살핀 공작은 곁에 있던 수하에게 말했다.
“굽이 부러진 구두는 치우고 레이디께 맨올로 블래닉으로 한 켤레 가져오게. 참, 하반기 신상 라인인 샤이닝 레드로.”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공작이 구두 브랜드와 신상 정보를 또박또박 발음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영상 마도구의 불빛이 팡팡 터졌다.
카르티에의 산책을 취재하는 기자들이었다.
훌륭해.
일타쌍피.
신상 구두 홍보와 미담을 동시에 챙기다니.
알레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티에는 느끼하긴 하지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알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조각 케이크 집에 관한 계산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단정한 복장을 한 남자가 다가왔다.
“레이디, 저희 주인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커피 타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