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저주받은 공작의 편지
현장에서 범행을 딱 걸린 딜리포터 경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능청맞게 오리발을 내밀기 시작했다.
밥줄과 명줄이 걸린 일인데 그라고 아무런 각오가 없었겠는가.
황궁 고인물 20년이다.
“그동안 줄곧 편지를 빼돌렸단 걸 다 알고 왔어. 배후가 누구지?”
딜리포터가 현장을 덮친 이를 봤더니 레이디 페레티의 유모다.
유모라니. 그것도 잠깐 궁에 머무는 뜨내기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네.”
“가로챈 편지를 내놓고 순순히 자백하면 밥줄만은 붙여두지.”
“허허 참. 누가 천한 유모의 말 따윌 믿겠나? 아니면 막 감옥에서 나온 저 전과자의 말을 믿을까? 주제를 알면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지 그래.”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마사는 헤라클레스에게 턱짓을 했다.
헤라클레스는 앞치마에서 커다란 빵 반죽을 꺼내 탁자 위에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없이 반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팔뚝에 성난 힘줄이 솟았다.
내려치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탁자가 금방이라도 쪼개질 것만 같았다.
탕 탕 탕 탕….
헤라클레스의 저세상 반죽 치대기에 딜리포터의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한 마디.
“처음 들어갈 때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일도 아니지.”
탕 탕 탕 탕….
여기서 또 한 마디.
“곤죽을 만들어 버릴까.”
탕 탕 탕 탕….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딜리포터는 스륵 주저앉으며 품에서 편지 세 통을 꺼냈다.
모두 암청색 솔개 인장이 찍힌 편지로, 발신인은 메르세데스 공작, 수신인은 레이디 페레티였다.
대충 넘겨짚은 거였는데 정말로 편지 절도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니 마사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치밀었다.
내친김에 배후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편지를 가로챘는지 딜리포터를 족쳤지만, 그 역시 의뢰인의 정체를 모른다고 했다.
그저 정체불명의 사내가 접근해 와 놀라운 액수를 제시하며 그녀에게 오는 편지를 빼돌려 달라고 했고, 돈 욕심에 그리했다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공작의 편지를 겁 없이 가로챌 정도의 세력이 일개 수신사에게 일일이 비밀을 공유했을 거 같진 않았다.
“그동안 몇 통이나 되는 편지를 빼돌렸어?”
“방금 넘긴 거 빼고 열 통.”
거짓말….
공작이 영지로 떠난 지 보름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열세 통이나 되는 편지가 왔다고?
믿기 힘들지만, 상식적으로 자기 죄를 축소하면 했지 부풀리지는 않을 테고….
목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더는 허튼수작 말라고 딜리포터를 단단히 을러 놓은 뒤, 마사는 치맛자락을 들고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아가씨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바람처럼 달리면서 생각했다.
답장도 오지 않는 편지를 이렇게 줄기차게 보내다니, 공작님도 참 어지간하시네.
* * *
며칠 전, 황제는 측근인 부르댕 백작한테서 편지 뭉치를 전해 받았다.
알레스에게 붙여놓은 세작이 로즈마리 궁의 수신사를 매수해 최근 그녀에게 오기 시작한 서신을 입수했다는 보고였다.
‘황궁에 임시로 거처하며 이혼 수속 중인 레이디에게 편지가?’
그것도 한두 통이 아니었다.
발신인은 전부 한 사람이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는 순간 황제의 가슴에 불이 확 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메르세데스는 힘 있고 명망 있는 가문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할 만큼 눈에 띄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주 잊혔다.
메르세데스 공작 역시 자신을 기묘하게 잘 숨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불과 며칠 사이 그와 몇 번을 맞닥뜨리게 되는 건가.
그것도 모두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와 연관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목을 조여 왔다.
음모? 작당 모의? 반역일까?
그도 아니면 설마….
황제는 암청색 솔개 인장으로 봉해진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
몇 장으로 겹쳐진 꽤 두툼한 편지가 나왔다.
황제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탁하게 가라앉히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다음 편지, 다음 편지, 다음 편지를 급히 훑어 내려가던 황제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공작은 페레티를 괴롭히려는 건가?
무슨 보복 같은 건가?
편지는 대체로 매우 길고 길었는데, 황제가 보기에 읽는 이를 지치게 하려는 의도인 거 같았다.
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더욱 가관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최대한 절제했습니다. 짧은 글 속에 부디 내 마음이 충분히 담겼기를.’
* * *
“이게… 뭐야.”
알레스는 공작의 편지를 손에 든 채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마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 통의 편지를 건넸다.
전부 메르세데스 공작이 보낸 편지였다.
마사에게 편지에 얽힌 우여곡절과 모험담을 전해 들은 알레스는 급히 봉투를 열어 보았다.
마사는 편지를 읽는 아가씨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곁에서 두근두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아함 아니면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
알레스는 마치 저쪽 세상에서 ‘행운의 편지’를 받았을 때처럼 애매모호한 기분이었다.
편지는 딱히 나쁜 내용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칭찬과 격려도 형식적으로 무성의하게 던진 게 아니라 매우 꼼꼼하고 자상하게 썼다.
하지만 뭔가 빠져 있었다.
앞서 사라진 열 통의 편지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많이 퍼석퍼석했다.
어찌 보면 상대방이 답장 한번 하지 않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따박따박 적어서 보낸 이 공작도 참으로 강적이었다.
은근히 똥고집이 있는 타입인 듯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펼쳐 본 편지 하나가 읽을 만했다.
가장 힘을 빼고 쓴 편지랄까.
그런데 그 내용은 알쏭달쏭했다.
[기억을 못 하시는 거 같아 이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무척 망설였습니다.
레이디가 어렸을 때 우린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긴 그때 레이디는 네 살이었으니 기억을 못 하실 만도 하지요.
게다가 저 역시 사정이 있어 메르세데스라는 성을 쓰지 못할 때였으니까요.
사실 저는 페레티 가문에 큰 은혜를 입었고 큰 빚을 졌습니다.
레이디에겐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일지 몰라 망설였습니다만, 계속 함구하고 있는 건 레이디를 기만하는 일이라 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본 페레티가의 영애는 표정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당시 한참 위축돼 있던 저는 영애가 나를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느 밤 외로움에 몸을 고슴도치처럼 말고 있을 때 어린 영애가 다가와 내게 무언가를 건넸습니다.
작은 손에는 튤립 모양의 봉이 쥐어져 있었지요.
당시 어린 영애들 사이에 유행하던 장난감 요술봉이었습니다.
초급 마법식을 입력해 두어 휘두르면 길이가 길어지고 반짝거리는 궤적이 나타나는 장난감 마도구였지요.
영애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줄게.’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어린 사내아이였던 저는 왠지 자존심이 상해 거칠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영애도 화가 났는지 웅크리고 있던 제 등에 요술봉을 냅다 휘갈기고는 뛰어가 버렸습니다.
영애는 정말로 나를 싫어했던 거구나 싶었지요.
덕분에 쓸쓸함과 외로움은 조금 덜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영애가 내던지고 간 요술봉을 저는 페레티가를 떠날 때 가지고 나왔고, 지금껏 가지고 있습니다.
낡아서 이젠 휘둘러도 더 이상 길어지지 않고, 반짝이 궤적 대신 누렇고 희미한 궤적만이 생길 뿐이지만요.
우리의 기억을 레이디에게도 조금 나누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늦었지만 고마웠다는 말도 함께요.]
지금의 이 알레스는 그 알레스가 아니니 기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 알레스라는 처자는 어렸을 때나 커서나 심성은 고왔지만 귀염성은 없었던 거 같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남자 보는 눈은 있었군그래.
공작이 어렸을 때 페레티 백작가에 잠시 머물렀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마사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마사, 메르세데스 공작의 나이를 혹시 알아?”
“알다마다요. 올해 스물넷, 아가씨와는 다섯 살 차이세요.”
머릿속에 정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군.
“마사는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일했지?”
“제가 열여덟 살 때부터니까 아가씨가 두 살일 때네요. 첫 유모인 바네사 부인이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고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갔었죠.”
뭐야, 이제 보니 마사도 서른다섯밖에 안 됐잖아.
저쪽 세상 나이로 하면 언니뻘이네.
그건 그렇고.
“그럼 내가 네 살일 즈음에 우리 집에 아홉 살 정도 되는 남자애가 왔던 거 기억나?”
알레스의 물음에 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딱 떠오르는 게 없네요. 잠시만요….”
마사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그런 일은 없었던 거 같은데요?”
“아니면 언제가 됐든 다른 가문 아이가 우리 집에 온 적은 있어?”
“글쎄요… 백작님과 백작 마님 모두 형제자매가 안 계시거나 일찍 돌아가셔서 아가씨 말고는 성에서 나이 어린 영애나 영식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마사의 말을 듣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알레스는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혹시 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요술봉 기억해?”
“아, 그거요.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해요. 귀족 자제분들 사이에 워낙 유행이었거든요. 앙증맞은 튤립 모양이 지금도 기억나네요.”
나와 엮일 가능성 있는 영식들의 신상이라든가 각종 정보에는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는 마사.
예전 일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심지어 장난감 요술봉도 기억하고 있는 마사.
그런데 오직 메르세데스 공작과 관련된 부분만 마치 누군가 기억을 도려낸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다?
별호도 있고, 팬클럽도 있고, 집필한 책을 도서관에 가져다 놓으면 삽시간에 전부 대출되고,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데, <빌보아 차트>에는 없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알레스는 뭔가 인위적으로 왜곡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있다. 수상하다.
알레스는 얼마 전 읽은 마법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세계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란 걸 알게 된 후, 노력하는 악녀로서 책을 또 찾아보지 않았겠는가.
마법은 자강에게 너무나 생소한 분야이니까.
들어보니 원래의 알레스에게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거 같지만.
마법에는 세상을 편리하게 만드는 유익하고 미래지향적인 마법도 있지만, 암흑세계에서 뒷거래되며 세상을 좀먹고 망치는 흑마법도 있었다.
그 흑마법 중에는 빙의 전 소설이나 만화 같은 데서 본 ‘저주’라는 범죄도 버젓이 존재했다.
혹시 메르세데스 공작은 저주 같은 데 걸린 건 아닐까?
알레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공작, ‘아싸’의 저주, 아니면 ‘투명인간’의 저주라도 걸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