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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3화 (13/120)

13화

이런 개떡 같고 물엿 같은

헤라클레스가 할 말이 있다며 엉거주춤 손을 들자, 마사는 속으로 응원했다.

그래요, 할 말은 하고 삽시다, 파티시에 헤라클레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조금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다른 건 다 하겠는데 호위 기사는 좀…. 제가 싸움은 젬병이라. 만일의 경우 마님의 안전이 걱정됩니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 나오면 어떡해.

다른 건 다 하겠다니!

마사가 속으로 가슴을 쿵쿵 쳤다.

알레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라클레스 님,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내 곁에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효과가 위협적일 거예요.”

“감, 감사합니다, 마님.”

물론 알레스도 그가 우락부락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곱고 연약한 심성을 지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사람을 다방면으로 쥐어짜야 하는 형편인걸.

말하자면 그는 경찰관 인형 같은 역할이었다.

저쪽 세상에선 과속이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도로 곳곳에 경찰관 인형을 세워 두었다.

인형인 만큼 상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순 없지만, 시각적인 효과는 분명 있었다.

“황궁에서 나가면 한 푼이 아쉬울 텐데, 우리 함께 허리띠를 졸라 봅시다!”

알레스가 선동적인 구호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마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편지의 행방을 꼭 찾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회의가 끝난 후 알레스는 <빌보아 차트>를 펼쳐 보았다.

젊은 귀족들의 평판과 인기 순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차트.

마사가 입이 닳도록 중요성을 강조하며 애독하는 그 차트 말이다.

물론 마사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살펴보려는 거지만.

차트를 훑어 내려가던 알레스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더니 급기야 불만이 터져 나왔다.

“뭐 이런 개떡 같은 차트가 있어?”

옆에서 위자료 목록을 점검하던 마사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흥분을 좀 가라앉히세요.”

“순위가 왜 이따위야? 이거 믿을 수 있는 거야?”

사실 알레스는 차트에 오른 귀족들을 다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조작의 구린내가 풀풀 풍겼다.

지난번 마사에게 들었던 순위 선정 기준은 가문의 영향력, 영지 운영 실적, 재력, 전공분야 성취도, 사회 기여도, 매력, 인기도 등이었다.

“황제가 무려 2위인 데다 촉새 브린 황자도 10위 안에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뭐요?”

“…아니야.”

황제는 그래도 황제니까 뭐 신분빨이 있긴 하겠지.

게다가 황후와 황비 자리도 아직 비어 있는 미혼 황제니까.

5황자도 방정맞긴 하지만 마법식 천재인 데다 그만하면 예쁘게 생긴 편이고.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어째서 메르세데스 공작은 아예 순위에 없는 거냐고.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오징어도 꼴뚜기도 순위에, 그것도 상위에 버젓이 올라 있는데, 건어물은 왜 없는 거냐고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이라고 하기엔 ‘푸른 불꽃의 고결’ 같은 유명한 별호까지 있지 않은가.

그렇다는 건 어느 정도 따르는 무리가 있다는 건데….

맞아, 황실 도서관에 꼿꼿이 앉아서 신작 독자에게 줄 금언 두루마리도 쓰고 있었잖아.

무엇보다 생긴 걸 보면 인기가 없을 수 없는데 말이지.

지금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야?

“마사, 이 차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점이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져 있다거나 순위가 납득이 안 간다거나.”

마사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후후 하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열아홉 영애시란 말이죠.”

말 사이사이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해 빠진’, ‘온실 속 화초’ 같은 말이 생략된 듯한 느낌?

이곳에 와서 두 번째로 당하는 애송이 취급이다.

“아가씨, 세상의 모든 차트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마사가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차트의 순위는 돈과 권력으로 사는 게 가능하죠. 높은 층일수록 비싸고요. 설마 정말로 순수하게 인기순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럼 뭐 하러 이런 걸 열심히 봐? 조작된 건데.”

마사가 낮게 웃었다.

뭔가 전문가 포스가 팍 풍겼다.

“조작된 건 조작된 거대로 무언가를 말해 주니까요. 이 차트는 적어도 누가 돈과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야심이 있는지 보여 주죠.”

응? 마사는 그런 걸 보려던 게 아니잖아?

“그냥 재미나 사교계 화젯거리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그 안에 숨겨진 암시를 놓치지 않죠.”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마사를 알레스는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마사… 나랑 돈 많은 집 영식을 엮고 싶어 혈안이 돼 있었잖아.

알레스는 이 방면 전문가님께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싶었다.

“멜로먼 퐁파두르 카르티에는 어떤 사람이야?”

황제도 제치고 당당히 차트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찬란한 이름.

대체 얼마나 으리으리한 사람이기에.

“아니… 아무리 아가씨가 세상일에 무심하시다지만 설마 그분에 대해 물어보실 줄은 몰랐네요. 당황스러워라.”

하긴 <빌보아 차트>의 첫 번째를 차지할 정도면 엄청난 사람이긴 하겠지.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라 어디서부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 ‘카르티에’는 사람들의 대화나 도서관에서 읽은 사교계 가십 잡지에 자주 오르내리던 가문이었다.

“카르티에 공작 전하를 칭하는 별호로는 ‘붉은 물보라의 매혹’이 있고요. ‘갓티에’라고도 많이 부르죠.”

이거 봐봐. ‘푸른 불꽃의 고결’이랑 뭐가 다르냐고.

별호도 비슷비슷한데 왜 이 사람은 1위고, 메르세데스 공작은 아예 차트에 없냔 말이야.

“모든 게 다 이분으로 통한다고 보시면 돼요. 외모면 외모, 매너면 매너, 재능이면 재능, 감각이면 감각. 어디 한군데 빠지는 곳이 없는 분이죠. 그냥 다 가진 분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분명 남모르는 성격적 결함이 있거나 변태일 거야. 그도 아니면 사람이 아니거나.

애초에 차트 자체가 썩을 대로 썩어서 신뢰도가 바닥인걸.

메르세데스 공작이 없다는 게 그 확실한 증거라고.

“그뿐 아니라 ‘걸어 다니는 상단’이라 불리기도 하세요. 이분이 입거나 두르면 곧바로 유행이 되고, 이분이 손댔다 하면 대박이 터지고, 이분과 엮이면 바로 ‘멜로먼 굿즈’가 되죠.”

이 대목에서는 알레스도 귀가 쫑긋해졌다.

이 세계에서 돈을 벌려면 무조건 그와 엮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의 손짓 하나 눈길 하나에 수억이 오락가락한단 말이렷다.

그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차트의 1위를 차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몸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몸에 수많은 사람과 가문의 이익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이 그 많은 사업의 광고판이자 홍보 전략이라는 말이었다.

알레스는 다시금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중세 귀족들을 얼간이 호갱 취급한 자신은 그 얼마나 교만하고 안일한 인간이었나.

이보다 더 치열한 욕망덩어리들이 없거늘!

수면 위로 보이는 우아하고 고고한 몸짓만 보고 방심하고 있었다니.

수면 아래로 사활을 건 발버둥과 피 튀기는 발길질이 오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그래도 재미는 더 있겠어. 정신 바짝 차리자, 알레스.’

카르티에 공작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차트가 믿을 만하든 주작이든, 주시해야 할 인물인 건 분명했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어떡해서든 가까워져야 하는 인사인지도.

그렇다 해도 <빌보아 차트> 때문에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온갖 협잡으로 엉뚱한 자들이 자리를 강탈해 꿀을 빨고 있는 형국은 언제나 거슬리고 아니꼬웠다.

그럴 때면 ‘어차피 정의는 없다’, ‘남 일에 상관 않는다’, ‘참견은 시간 낭비’ 등 악녀의 철칙이 조금 흔들리고는 했다.

물론 그렇다는 거뿐, 참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없는데… 그런데… 메르세데스 공작!

편지도 떼먹은 그 인간이 왜 이리 뒷덜미에 찝찝하게 달라붙는지 모르겠다고 알레스는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사내 킹카만큼 위험한 남자다.

* * *

“파티시에 헤라클레스,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요.”

마사는 몰래 주방으로 가서 그와 접선했다.

“아가씨가 깊은 상심에 빠져 계신답니다.”

“예? 마님이요?”

“받으셔야 할 매우 중요한 서신이 있는데 아무래도 중간에서 자꾸만 사라지는 거 같아요.”

헤라클레스가 놀란 얼굴로 치대고 있던 빵 반죽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런 무서운 일이! 마사 부인, 확실한 겁니까?”

헤라클레스의 반응이 조금 과하긴 했지만, 황궁 내에서 편지가 사라지거나 훼손되는 건 분명 사소한 일은 아니었다.

음성이나 영상을 주고받는 고가의 마법 통신구가 귀족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황궁 내에선 사용 금지였다.

황궁의 주요 통신 수단은 여전히 서신이었다.

더욱이 황명을 담은 서신이나 황제나 황족 앞으로 오는 서신은 매우 신중하게 취급되어야 했다.

그건 매우 중요한 기밀이거나 정보이기도 했으므로 따로 취급하는 ‘수신사’라는 관리가 있었다.

“로즈마리 궁의 수신사는 딜리포터 경인데….”

“네, 그자가 아가씨의 편지를 빼돌린 정황을 포착했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돌려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찐빵 같은 소리 작작 하세요. 편지를 훔치는 건 중죄고 밥줄이 달아날 일이라고요. 누가 호락호락 자기 죄를 인정하겠어요?”

“그럼 어쩌죠?”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제가 말로 압박할 테니 파티시에님이 옆에서 힘으로 위협해 주세요. 저 혼자 가면 그자가 우습게 볼 거 같으니까요.”

“아아, 부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싸움은 젬병입니다. 위협 같은 건 서툴러요.”

“그건 걱정 마세요. 가만히 서 계시다가 제가 부탁드리는 대로만 해 주시면 돼요. 말은 딱 이 두 마디만 하세요.”

* * *

딜리포터는 오늘도 짙푸른 솔개 인장이 찍힌 편지를 슬쩍 감추었다.

그새 벌써 세 통을 모았으니 한 번 더 그 사내에게 전달할 때가 됐다.

편지는 참으로 줄기차게도 왔다.

편지 봉투는 올 때마다 두툼했다.

뒷돈을 받고 편지를 빼돌려 주기로 했지만 이렇게 많은 편지를 빼돌리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 메르세데스 공작이 레이디 페레티에게 보낸 편지였다.

의뢰인이 꽤 높은 금액을 추진비로 걸기에 역모나 정치적 음모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편지가 와도 너무 왔다.

이 방면에 잔뼈가 굵은 그의 촉으로 짐작컨대 이 정도 양과 빈도를 뽑을 수 있는 건 연애편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의 연애편지를 빼돌려서 뭘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혹시 치정에 얽힌 일일까, 딜리포터는 남몰래 짐작해 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멈추는 게 신상에 좋을 걸, 딜리포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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