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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2화 (12/120)

12화

나 없을 때 아프지 말기

메르세데스 공작의 병문안이라….

심히 부담스러웠다.

일단 아프지도 않은 데다, 공작은 좀 그런 유형이랄까.

어떤 유형이냐면, 머릿속으로 떠올리거나 훔쳐보기는 좋으나 막상 대면하려면 부담스러운 유형.

그래서 ‘푸른 불꽃의 고결’ 같은 멀고 아련한 이미지로 존재하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

게다가 지금처럼 면역체계가 엉망으로 꼬인 상황에서 공작이 지난번처럼 걱정하는 듯한 말을 늘어놓는다면?

알레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요망하게 움직이는 그 입술을 뭔가로 막아 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아가씨,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좀 하시렵니까?”

마사가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지금 이상해?”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사람 꼴만 갖추면 됐지.”

“예? 그래도 아가씨 기왕이면….”

“그보다 차를 좀 준비해 줘. 차에 맛있는 쿠키나 구움과자를 듬뿍 곁들이고. 왜 마들렌, 휘낭시에, 까눌레 같은 귀여운 애들 있지?”

마사는 실망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알레스는 손으로 옷을 몇 번 툭툭 털고 부하게 뜬 머리카락을 살짝 눌러 앉힌 후 침실을 나섰다.

긴장되고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는 덴 맛 좋고 모양도 예쁜 구움과자지.

혹시라도 도덕책 공작의 설교가 길어지면 마음을 다스리기에도 좋고.

그러나 공작은 오늘따라 말수가 적었다.

아니, 각오했던 거에 비하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평소에도 말수가 많은 건 아니었다.

말은 주로 곁에 있는 5황자가 재잘재잘 다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세상 누구보다 말을 길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아는 알레스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실망했나….’

귀족의 예법이라는 게 있으니 억지로 병문안은 왔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하긴 단 걸 찾아 허덕이는 모습도 꼴사나웠을 테고, 자신의 신체 일부를 함부로 주물럭거린 것도 불쾌했을 테지.

아, 어쩌면 내가 사과를 해야 할 타이밍인 걸까?

내게 사과할 기회를 주려고 여기 온 걸까?

알레스는 오물거리던 휘낭시에를 조용히 내려놓고 말했다.

“저어… 아까는 죄송했어요. 불쾌하셨죠?”

알레스의 말에 공작의 심해같이 망망하던 눈에 물결이 일었다.

“불쾌요?”

“자기 몸 하나 챙기지 못해 폐를 끼친 것도 모자라 무례하게 공작 전하의 신체 일부를 함부로 범한… 결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믿어 주세요.”

저쪽 세상에서 사내 킹카에게도 이 비슷한 말을 한 거 같은데.

누가 들으면 상습범인 줄 알겠다.

“그럼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까 혹시 상하신 데는 없으세요?”

“예? 상하다니요. 아니오,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왜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건데요?

차라리 뭐라고 꾸짖어 달라고요!

“참, 아까 황궁의 남은 음식 처리에 관한 제안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아 그거요. 멀쩡한 음식들이 아깝잖아요. 그런 걸 버리는 건 죄악이죠.”

복도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마사는 ‘저게 뭐야’ 하는 얼굴이었다.

둘 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대책이 없잖아!

사실 공작은 말조심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너무 일방적으로 말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반가움의 표시였으나 레이디 페레티는 부담스러워 하는 거 같았다.

원래 말보다는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편한 자신이었다.

짧은 얘기는 편지로 쓰고, 긴 얘기는 책으로 썼다.

지금껏 마음 편하게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기도 했고….

그랬는데 그날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말이 나왔다.

공작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간직된 장면이 있었다.

선대 공작이었던 부친과 공작부인이었던 모친이 잠자리에 들기 전 난롯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부친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자신의 아내와 마주한 그 시간만큼은 말을 꽤 했다.

물론 모친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말하고, 부친은 주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쪽이었지만.

대화의 내용은 ‘카이트가 오늘 정원에서 여우콩을 선물로 가져왔어요.’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공작은 언젠가 자신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하루를 보내며 함께 사소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사람을.

자신답지 않게 말을 너무 많이 한 그날,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그 따스한 난롯가에 레이디 페레티를 앉혔는지도 모르겠다.

그 혼자만의 망상이 민망한 나머지 오늘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도.

사실 파티시에를 구하기 위해 면죄권을 쓰고, 아깝게 버려지는 음식을 백성을 위해 활용하자고 제안한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다.

연회장에서 알레스의 제안을 듣고 공작은 홀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낭비되는 음식이 아까워 연회 때 준비하는 음식의 양을 줄이자고 청원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과시를 좋아하는 황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레이디 페레티는 저보다 훨씬 나은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황실의 과시욕을 적당히 맞춰 주는 정도가 아니라 황제의 평판을 높이고 황제의 고민까지 해결해 주면서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의 제안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해 밤새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몸도 좋지 않은 레이디 페레티에게 부담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편지로 남기자.

역시 말보다는 글이 나을 것이다.

메르세데스 공작은 까눌레를 한입에 밀어 넣고 양 볼을 부풀린 알레스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물론 그의 생각처럼 말보다 글이 더 나을 때도 있을 것이다.

단, 그 글이 상대방에게 무사히 전달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 말이다.

“레이디는 언제까지 황궁에 머무르시나요?”

“글쎄요… 폐하와 계산할 거 계산하고, 주고받을 거 주고받고, 바깥에 살 집을 마련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그렇다고 질질 끌진 않을 거예요.”

“제도에 저택을 구하시나요?”

“아무래도요. 황궁 음식 나눔 사업 때문에라도 멀린 못 가는 데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려면 역시 제도가 낫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 사업은 추진하는 것으로 폐하와 얘기가 잘 됐군요.”

“처음에만 제가 관여하고 헤라클레스에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에요. 아, 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그 파티시에 말이에요.”

돈도 안 되는 그런 일은 헤라클레스에게 맡기고 얼른 돈 되는 사업을 벌여야 하거든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던 마사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로맨틱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잖아!’

마사가 꿈꾸던 ‘아가씨의 설레고 휘몰아치는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재주로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말기 연애세포 결핍 환자들이었다.

“저는 내일 영지로 돌아갑니다. 레이디의 소식엔 계속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아, 돌아가시는군요.”

갑자기 멀리 간다고 하니 서운하네.

알레스는 앞에 앉은 남자를 새삼 찬찬히 뜯어봤다.

그렇다면 저 잘난 얼굴을 충분히 봐 둬야지.

안구정화… 힐링… 피로회복… 자양강장….

“레이디 페레티, 건강을 잘 챙기십시오. 사업도 좋지만요.”

예, 예, 지금 챙기고 있습니다.

이 보양식 같은 얼굴, 영양제 같은 몸 선이여.

그런데 보면 볼수록 왜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지….

알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밥 때가 된 것 같았다.

“또 쓰러지시는 일 같은 건 없으면 좋겠습니다.”

공작이 안아 들었을 때 레이디 페레티는 너무 가벼웠다.

그래서는 사업은 둘째 치고 서 있기도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또 쓰러진다면 그땐 자신이 여기 없을 텐데.

레이디 페레티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그 남자의 신체 일부를 움켜쥐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부터 레이디 페레티가 자신을 구석구석 쏘아보는 게, 그만 가 달라는 눈치인 것 같았다.

“언제 한번 북부로 여행을 오시면 좋겠습니다. 나도 제도에 다시 오게 되면 레이디의 황궁 음식 나눔장에 들러 보겠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멋진 워킹을 선보였다.

로즈마리 궁을 벗어나기 전, 공작은 잠시 머뭇거리다 알레스에게 물었다.

“편지… 해도 되겠습니까?”

* * *

편지해도 된다고.

분명히 그렇게 대답한 거 같은데.

제가 먼저 물어 놓고 감감무소식인 건 대체 무슨 경우지?

알레스는 메르세데스 공작과 작별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혹시 혀가 미끄러져서 잘못 말했나?

아니면 공작의 귓구멍에 이상이 있나?

그도 아니면 여기서 ‘편지해도 될까요?’는 ‘언제 밥 한번 먹자’와 같은 건데, 너무 큰 의미를 둔 걸까?

알레스는 마사에게 물었다.

“나한테 편지 같은 거 온 거 없지?”

“왜 그러세요, 아가씨? 혹시 기다리는 편지라도 있으세요?”

“아니 뭐… 황제가 독촉장이나 고소장 같은 거라도 보냈을까 봐.”

“그럴 리가요.”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럴 땐 역시 탄수화물이다.

“헤라클레스는 완전히 털고 일어난 거야?”

“아휴, 주방에 복귀한 게 언젠데요. 엊그제도 빵 맛이 돌아왔다며 기뻐하시고선.”

마사는 살짝 타박하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덜컹했다.

아가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빵에 관해서라면 저리 무심할 아가씨가 아니었다.

예전의 아가씨가 투정과 엄살을 달고 다녔다면, 요즘의 아가씨는 말은 더 잘하게 되었는데도 정작 말하지 않는 게 많았다.

마사가 알아서 잘해야 했다.

아가씨가 평소 같지 않은 건 아마도 편지 때문일 것이다.

메르세데스 공작이 작별인사를 할 때 편지 얘기를 꺼낸 걸 마사도 엿들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특급 유모 마사는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다며 눈을 번뜩였다.

편지가 오지 않자, 아가씨는 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아댔다.

먼저 회의란 걸 많이 만들었다.

자립회의, 기획회의, 점검회의, 분석회의, 특별회의, 긴급회의, 임시회의 등등.

그래 봤자 회의에 참석할 사람은 마사와 헤라클레스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걸핏하면 불려 와서 알레스에게 시달렸다.

처음에 헤라클레스는 마님이 여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불려 다니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역시 지쳐갔다.

“귀족이 반드시 고용해야 할 사람이 누구누구죠? 최소한으로 말이에요. 이미 유모, 하녀장, 집사, 비서관이랑 파티시에, 요리장, 호위 기사, 마부는 있고….”

알레스는 회의 땐 경어를 썼는데, 그게 더 오싹했다.

“예? 그 사람들을 언제 다 구하셨는데요?”

알레스가 마사와 헤라클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저희 둘이서 다 하는 겁니까?”

“마사 님, 형편이 어려운데 어떻게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하겠어요? 더욱이 여러분 같은 인재라면 겸사겸사, 두루두루 해야죠.”

“저렇게 많은 일을 시키시고 급여는 얼마나 주시려고요? 파티시에 헤라클레스는 거의 무급 노예 계약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연봉은 비밀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 님이 해먹은 면죄권을 생각해 보세요.”

잠자코 있던 헤라클레스가 근육질 팔을 조신하게 들어올렸다.

“저… 할 말 있습니다,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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