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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11화 (11/120)

11화

거긴 제 신체 일부입니다

“면죄권 말씀입니까?”

공작의 담담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고고하게 울려 퍼졌다.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왠지 울림이 좋았다.

이 판국에 이런 말 하긴 좀 뭣하지만, 매우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이런 건 왜 항상 너무 늦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알레스는 생각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공작이 몸을 곧게 펴자 상체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그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있으니 당당한 어깨와 탄탄한 가슴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긴 합니다만.

뒤진다고 뭐 나옵니까?

당신 몫의 면죄권은 황자에게 줬잖아요.

황자는 이미 그 면죄권을 돌려막는 데 써 버렸고요.

그러나 메르세데스 공작의 손이 품에서 나온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알레스와 브린의 눈이 마주쳤다.

“폐하께 면죄권을 보입니다.”

공작이 기품 있는 동작으로 품에서 꺼낸 것은 황금빛 인장이 찍힌 옅은 푸른색 증서였다.

알레스와 브린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아니, 또 돌려막아?

정말이지 놀랍고도 신비로운 면죄권 돌려막기의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공작의 손 안에 있는 저 면죄권은 또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진품이군.”

황제가 확인했다.

이로써 레이디 페레티가 헤라클레스를 위해 바친 면죄권은 브린 황자가 준 것도, 메르세데스 공작이 준 것도 아니란 게 증명됐다.

이건 더 큰일이었다.

황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알레스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얘기니까.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황제가 전처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알레스는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인가 싶어 황제를 바라봤다.

“집무실로 오도록. 사업 얘기를 마무리 짓겠다.”

먼저 자리를 뜨던 황제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금족령을 해제한다. 그리고 헤라클레스 브레이브를 사면한다.”

집무실에서 마주한 황제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대가 암살의 배후인가?”

알레스는 무릎이 푹 꺾이는 걸 느꼈다.

저 혐의를 피하고자 지금껏 별의별 짓을 다 하며 여러 사람까지 끌어들여 한바탕 생쇼를 펼쳤는데….

역시 연기는 체질이 아닌가 보다.

물렁한 5황자나 그런 발연기에 넘어가 줄까.

더 이상 머리를 굴리기엔 혈중당도가 바닥난 알레스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말했다.

“아마 제국에서 그 누구보다 폐하의 안녕을 바라는 사람이 저일 겁니다.”

황제는 알레스의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제 형편을 아시지 않습니까? 가문은 망하기 일보직전이요, 기댈 데 하나 없습니다. 바랄 건 오직 이혼하면서 한몫 챙기는 것뿐. 아직 위자료를 받지도 못했는데 폐하가 잘못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황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너무 솔직해서 화도 나지 않는군.”

“남은 음식 활용하는 사업도 하든 말든 폐하 맘대로 하십시오. 솔직히 돈도 별로 안 될 거 같고 귀찮아요.”

알레스는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그저 이 말씀은 한 번 더 드리고 싶네요. 몇몇 특정인만 먹으니 독도 타고 그러는 거예요. 누가 먹게 될지 모르는 음식에 굳이 독을 타는 모험을 감행할까요? 비용 회수도 불확실한데.”

알레스의 말에 황제가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돈줄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고로군.”

황제는 새삼 알레스의 청명한 녹안을 바라보았다.

귀찮다, 그 사업이 귀찮다라….

그렇다면 그 일을 꼭 맡겨야겠군.

나는 너를 최대한 귀찮게 만들고 싶다.

“위자료 목록에 황궁의 남은 음식 처리권을 넣도록 하지.”

* * *

알레스가 본궁을 떠난 후 아가판투스는 헝클어진 자신의 심사를 가닥가닥 들추어보고 있었다.

연회의 남은 일정을 점검하러 보좌관인 부르댕 백작이 황제의 집무실을 찾았다.

확인을 끝낸 황제가 물었다.

“백작이 보기에, 짐이 남자로서의 매력은 좀 부족한가?”

부르댕 백작이 흠칫 놀랐다.

함정인가….

자신이 업무 중에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급히 되짚어 보았다.

티 나게 당황하는 백작을 보고 황제는 질문을 거두었다.

“됐네, 나가 보게.”

혼자 남은 아가판투스는 방금 한 멍청한 질문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남자에는 통 관심이 없는 거 같더니.

혹시 거구에 근육질이 취향인가?

아니면 계집애처럼 곱상한 얼굴에 머리 좋은 놈?

돈 좋아하니까 어쩌면 고지식하고 뻣뻣해도 가문 좋은 녀석이 최고일지 모르겠군.

이런 얼간이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처음에 그녀는 그저 자신의 발목을 잡는 혐오스런 여자였다.

그러다 점점 흥미를 일으키는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흥미를 넘어 위험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위험한 여자는 어찌 해야 하나?

방법은 두 가지일 터였다.

내 사람으로 만들어 옆에 두든지, 아니면 없애든지.

* * *

본궁을 벗어나는 알레스는 불안했다.

예전과 같은 증상이 찾아올 것 같았다.

세상이 바뀌고 몸이 바뀐 이후 딱히 신경 쓰지 않던 그 증세.

그럴 만도 하지.

당 충전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 쓸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가장 충격적인 건 이 난리를 피우고도 지금껏 천타빵을 단 한 입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천타빵과는 인연이 없는 걸까?

당이 떨어지니 우울한 생각이 정신을 점령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쏟아졌다.

손이 떨리더니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진짜 알레스는 평소 먹는 걸 소홀히 했다.

그래서 몸에 비축된 당 같은 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었던 불쌍한 지지배.

알레스는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 스스로를, 아니 몸의 옛 주인을 욕했다.

함께 왔던 마사는 어디로 간 거지?

아, <빌보아 차트> 실사에 푹 빠져 있으려나?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마법식 천재 5황자도 원 없이 봤겠네.

금장 회중시계랑 레이스 스카프 꼭 사 주고 싶었는데….

헤라클레스는 아주 피떡이 됐던데. 애를 어쩜 그렇게 만드냐….

시야가 좁아지면서 알레스의 몸이 스륵 기울어졌다.

빙의 전의 자강에겐 저혈당증이 있었다.

악착같이 챙겨 먹으면서 자신의 저혈당증을 숨겼다.

악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너무 고소해 할까 봐 숨긴 것도 있었다.

동물의 세계도 아닌데, 몸이 약하다는 건 직장에서도 큰 약점이 됐다.

물론 대놓고 차별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약하다고 배려해 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배려만은 아니란 걸 자강은 금세 알게 됐다.

중요한 순간에, 경쟁자들은 선량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양자강 씨는 몸이 약하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날아온 그 말은 자강에게서 꽤 많은 기회를 앗아갔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악착같이 잘 먹으면서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

“…페레티, 레이디 페레티….”

새벽 숲의 삼나무 향.

이 향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한번 꽂힌 후 집에서 쓰는 디퓨저 향은 늘 이것이었다.

사내 킹카를 닮은 것도 그렇고,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것도 그렇고.

그는 자꾸만 이전 삶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괜찮습니까? 정신을 좀….”

품 안이 매우 아늑했다.

가끔 심한 저혈당증이 와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을 때, 매우 편안한 마음이 될 때가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훌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우 달콤한 유혹이었다.

다음 생엔 나비가 좋겠어.

경쾌하게 날아다니며 꿀도 빨고.

“맥이… 너무 약해. 알레스, 알레스! 내 목소리 들려요? 의원을 불렀으니….”

아니지!

나비가 빠는 꿀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인간으로 살면서 빵, 과자, 초콜릿, 푸딩 같은 걸 원 없이 먹는 게 더 달콤하지.

포기할 수 없어, 포기 안 할 거야!

알레스는 살고자 허우적거리며 삶을 움켜잡았다.

살려줘! 도와줘!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꽉 움켜잡았다.

“아, 레이디의 정신이 좀… 음… 돌아온 거… 같다. 의원은 아직인가….”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음, 레이디? 거긴… 음, 지금 잡고 계신 곳은… 제 신체 일부인데….”

음?

알레스가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빼자 공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잡고 있어요, 그냥….”

“…….”

“놓지 말아요, 정신을.”

“…도와줘… 필요해 …거….”

“필요하다고요? 뭐가?”

“…다안 …거….”

“단 거?”

* * *

주스와 핫초코와 빵과 쿠키를 잔뜩 먹은 지금, 알레스는 팔짝팔짝 뛸 수도,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하라면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하지만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신없을 때 보인 흉한 몰골도 창피하고, 너무 금세 멀쩡해진 것도 창피하고, 하여간 이래저래 다 창피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흡흡. 제가 엉뚱한 데 정신을 파느라 아가씨가 이렇게 되시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마사는 치맛자락에 눈물 콧물을 찍어내며 미안해했다.

한참 눈물을 찍어내던 마사가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를 안고 오신 분이 메르세데스 공작님 아니십니까? 푸른 불꽃의 고결….?

?응….?

마사의 눈이 갑자기 번쩍번쩍 빛났다.

?그분은 또 어디서 만나셨어요? 꽤 가까워 보이시던데.?

?가깝긴. 온갖 추태를 가까이서 보여 주긴 했지.?

마사가 ‘호오’ 하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속상하세요? 그분께 추태를 보여서요??

?그럼, 당연한 거 아냐? 나도 낯짝이 있는 사람이라구.?

마사는 이번엔 ‘후우’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마사 때문에 그때의 공기, 온도, 습도가 불쑥 떠올랐다.

쓸데없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알레스는 이불 속에서 킥을 날렸다.

“아, 정말. 어쩌려고. 히약! 아윽윽!”

이불킥 사이사이에 의미도 없는 괴성을 집어넣었다.

이 열아홉 이혼녀에 깃든 서른의 영혼은 이 방면으론 숙맥이었다.

초등학생에게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구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 자강이 만난 남자들이라곤 대부분 경쟁자였으니까.

그것도 매우 치사하고 지질한 수법을 구사하며 자강의 뒤통수를 치던 이들이었다.

알레스의 영혼은 위기 상황에 처했다.

이전 삶에서라면 지금과 같은 감정은 반드시 초전박살을 내야 할 위험 요소였다.

마치 몸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오면 면역체계가 필사적으로 몰아내려 하듯이, 온몸으로 거부하고 분해해 버려야 할 감정이었다.

사내 킹카의 착각계도 잘 피해 갔잖아? 이번에도….

그런데 아무래도 몸이 바뀌면서 감정의 면역체계에도 혼선이 생긴 거 같았다.

아니면 면역체계가 단체로 파업에 들어갔나?

뭔가 단단히 고장이 나긴 했는데, 알레스에겐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참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마사가 헐레벌떡 침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메르세데스 공작 전하께서 병문안을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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