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면죄권 돌려막기 신공
“페레티 백작가에는 면죄권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대에게 면죄권을 양도한 너그러운 이가 누군지 궁금하군.”
황제의 말투는 심상했지만 알레스는 그 안의 가시를 감지했다.
초점이 왜 면죄권에 맞춰진 거야?
5황자에게 강탈, 아니 받은 거라고 사실대로 얘기해도 되지만….
알레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황제의 저의가 무엇인지.
여기서 5황자와 엮이는 것이 과연 현명할지.
알레스의 본능이 빨간 경고등을 켰다.
어째 느낌이 싸한 게 이야기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우선 한 장뿐인 면죄권을 저 미련 곰탱이를 위해 써 버렸으니, 황제가 검을 겨누면 알레스도 5황자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알레스는 새삼 황좌에 앉은 아가판투스 아메시스트 맥켈란을 바라보았다.
고귀한 혈통임을 드러내는 순금색 머리칼과 신비로운 자수정 빛깔 눈동자, 남성적인 라인과 당당한 풍채.
거기에 황제라는 신분 프리미엄까지 더해져 솔직히 나쁘지 않은 껍데기였다.
하지만 저래 봬도 매우 집요하고 잔인한 성미라지 않은가.
1황자였던 황태자도 제거한 마당에 다른 형제들이라고 곱게 보이겠는가.
이참에 눈엣가시인 5황자와 알레스를 엮어서 한 번에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다.
고로 면죄권의 출처를 숨겨야 한다!
순식간에 머리를 너무 굴린 탓일까.
심하게 당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알레스가 입을 열었다.
“그분이 밝히길 원치 않으셔서요. 부디 제가 배은하지 않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누가 자신이 이빨 빠진 호랑이란 걸 밝히고 싶어 하겠습니까.”
여기서 더 캐물으면 당신은 아주 치졸한 인간 되는 거야.
보는 눈도 많은데 이쯤 하고 넘어갑시다, 쫌.
아, 저기 산처럼 쌓여 있는 빵 하나만 집어 먹었으면….
갑작스런 황제의 변덕에 알레스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있을 때였다.
반대로 황제의 눈은 먹이를 잡아채기 전의 맹수처럼 번뜩였다.
“오랜만에 아우 브린이 보고 싶군.”
너무나 금세 황제의 입에서 나와 버린 5황자의 이름.
알레스의 등줄기로 한기가 지나갔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린이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하하, 폐하, 웬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저는 크고 화려한 연회는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갑작스런 황제의 호출, 연회장의 중심에 선 문제적 레이디, 그리고 떡이 된 덩치의 모습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브린은 넉살 좋게 말했다.
“글쎄, 문득 아우의 근황이 몹시 궁금하더군.”
“하하, 그렇습니까. 제가 워낙 골방에 처박히는 걸 좋아해서요.”
연구나 출판 등 자기 분야에선 활발히 활동했지만, 사교계에선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든 그였다.
그래서인지 브린이 등장한 직후부터 귀부인들과 영애들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웬만한 미녀 뺨치는 곱상한 외모를 지닌 데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마법식 천재인 그를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알레스가 빙의 전 살던 곳이었다면 모두 스마트폰을 높이 쳐들었을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분위기와는 별개로 알레스는 무척 당황했다.
황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면죄권이 5황자에게서 나왔다는 걸.
해맑게 실실거리고 있는 브린의 모습을 보자 알레스는 당이 떨어지다 못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면죄권을 어이없게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 귀한 게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는 걸 알면 그는 아마도 뒷목을 잡고 쓰러지겠지.
게다가 황제가 그 면죄권의 출처를 파헤치고 있다는 걸 알면….
“브린, 면죄권을 좀 볼까?”
황제는 알레스가 걱정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직격탄을 날렸다.
갑자기 웬 면죄권 검사?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렁대다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알레스도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게 됐네, 5황자.
내 곧 뒤따라감세.
황제는 실은, 아니 어찌 보면 당연히 알레스에게 감시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알레스가 도서관에 갔으며, 5황자와 메르세데스 공작을 만난 사실도 보고 받았다.
개국공신 가문인 메르세데스에도 면죄권은 있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 공작은 호락호락 면죄권을 내어줄 위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세작의 보고에 따르면, 공작이 페레티에게 무슨 싫은 소리를 했는지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그를 피해 달아났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친화력 좋고 다소 물렁한 구석이 있는 브린이 면죄권을 줬을 가능성이 컸다.
“브린, 당장 면죄권을 보여라.”
황제가 다시 한 번 명했다.
황제의 명에 브린은 알레스를 쳐다보았다.
알레스가 눈으로 잔뜩 미안한 마음을 실어 보냈다.
그런데 왜 꼭 밀회를 즐기다 들킨 내연남녀가 된 기분이지?
가만, 이혼서류에 도장은 찍었던가?
위자료 목록이 확정되지 않아 아직 도장 찍기 전인가?
그런 심란한 생각들을 하던 알레스는 다음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황제는 설령 자신과 브린이 정말로 눈이 맞았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줄곧 자신을 벌레 보듯 했다.
지금도 벌레 밟듯 콱 밟아 버리려고 저리 벼르고 있지 않은가.
그저 벌레 옆에 있다 엄하게 같이 밟히게 된 5황자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 뿐.
주책맞고 경박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아무리 마법식 천재라도 이런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겠지?
알레스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락 말락 하고 있는데, 비운의 황자가 품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뒤적거리면 뭐합니까.
거기 있던 면죄권은 이미 황제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그러나 브린은 품에서 빈손이 아닌 무언가를 꺼냈다.
옅은 푸른색에 황금빛 인장이 찍힌.
흡사 면죄권처럼 보이는?
“폐하의 명인데 당연히 보여 드려야죠.”
브린은 공손한 자세로 면죄권을 황제 앞에 대령했다.
“소중한 것이니 늘 이렇게 품에 지니고 다닙니다.”
“진품이 맞군.”
황제가 확인했다.
알레스는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까 자신이 헤라클레스를 위해 바친 면죄권도 진위 확인을 거쳤다.
면죄권을 돌려받은 브린은 여유 만만한 태도로 알레스에게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브린으로선 알레스가 면죄권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알레스가 이미 황제에게 실토했다면 기껏 면죄권을 지니고도 난처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그러나 면죄권을 보여 달라는 황제의 재촉과 연회장 분위기를 보고 한눈에 파악했다.
레이디 페레티가 의리를 지켰다는 것을.
친우의 우정과 그녀의 의리 덕분에 5황자는 이렇게 또 한 번 황제의 덫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 * *
“카이트… 나 완전히 털렸어.”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브린이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레이디 페레티에게 면죄권을 빼앗긴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브린의 하소연을 들은 공작은 품에서 면죄권을 꺼내 조용히 내밀었다.
“뭐, 뭐야, 카이트?”
“자네한테 더 필요한 듯하여.”
“면죄권이야 누구한테나 필요한 거잖아. 사람 괜히 민망하게….”
“받게. 살벌한 황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네한테 더 필요한 물건일 테니.”
브린은 친우가 내민 면죄권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카이트, 너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도덕책 공작이라고 죄를 짓지 않을 거 같아?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죄목쯤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공작이 심해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을 들어 브린을 응시했다.
“황제가 메르세데스를 친다면 어차피 면죄권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브린은 움찔했다.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한 듯한 친우는 가끔 무서운 말을 했다.
틀리지 않은 말이긴 했다.
메르세데스는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가문이었다.
개국공신으로 신망이 두터운 데다 북쪽의 영지는 외세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철의 요새였다.
메르세데스의 가주는 대대로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가졌음에도 늘 중립을 지켜 온 가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한 가문이었다.
공작의 말대로 황제가 메르세데스를 적으로 삼는다면, 황제의 용서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브린은 슬그머니 면죄권을 받아 챙겼다.
* * *
그때 일을 떠올리며 브린은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혼란에 빠진 듯한 레이디 페레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주 고소했다.
닭 쫓던 개 꼴이 된 황제도 아주 쌤통이었다.
그러나 브린은 오래 희희낙락할 팔자는 못 되었다.
황제는 브린 다음으로 메르세데스 공작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정말로 그인가?
황제 역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알레스가 만난 사람 중 면죄권을 가진 이는 브린과 그밖에 없었다.
황제의 눈이 암청색 눈을 가진 훤칠한 남자를 찾았다.
그는 희한하게도 자신을 숨기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 눈에 들어오면 결코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남자였다.
“메르세데스 공작.”
황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브린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보좌관마저도 황제를 만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순간 알레스는 느긋하던 5황자의 얼굴이 하얘지는 걸 보았다.
그렇구나!
알레스는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황자의 면죄권은 친우인 공작에게서 온 것임을.
자신이 황자의 면죄권을 가로채고, 황자가 공작의 면죄권을 가로채고….
이 무슨 면죄권 돌려막기도 아니고!
그렇다면 공작은 지금 돌려막을 면죄권이 없는 무방비 상태란 건데….
그의 이름이 지금 막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참이었다.
알레스는 웬일인지 황자의 이름이 나왔을 때보다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차피 누군가 한 사람 당해야 한다면 그냥 황자가 당하는 게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공작은,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 데다 성격이 건어물처럼 꼬장꼬장하고 빳빳해서 이런 수모를 감당할 만큼 비위가 좋지 못할 테니까.
그에 비해 황자는 싸대기 몇 대쯤은 거뜬히 받아낼 넉살이 있지 않나?
무엇보다 공작이 그런 일을 당하는 건 그림이 영 아니다.
단정한 얼굴선과 고상한 콧대, 파르라니 그윽한 눈매와 어딘지 요염한 입매, 단단할 곳은 단단하고 쭉쭉 뻗을 곳은 쭉쭉 뻗은 몸 어디가 그런 험한 일과 어울린단 말인가.
다급한 상황이 되자 그가 지닌 특장점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알레스의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여하튼 황제에게 지독한 일을 당하기엔 너무 스타일이 좋았다.
“예, 폐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먼저 대답하고, 기품 있는 실루엣이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에게 쏠리는 주변의 시선 역시 뜨거웠다.
이번엔 스마트폰이 아니라 대포카메라 수십 개는 치켜들 열기였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푸른 불꽃의 고결’이 아니었다.
황제 앞에 선 메르세데스 공작은 예를 갖추었다.
황제도 가벼운 인사와 덕담을 건넨 뒤 공작에게 요청했다.
“갑작스러울 테지만, 공작의 면죄권을 보여 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