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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9화 (9/120)

9화

내가 황제 암살의 배후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황제 암살의 배후라니. 그럴 이유가 없잖….”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로즈마리 궁에 묵고 있고, 하필 헤라클레스는 로즈마리 궁의 파티시에로 일했다. 혹은 시각에 따라 위장 취업했다.

나는 얼마 전 헤라클레스를 식당으로 따로 불렀다.

고로 은밀히 뭔가 사주했을 수 있다.

나는 황제에게 박정한 대우를 받아 이혼을 택했다. 혹은 시각에 따라 이혼 당했다.

고로 앙심을 품을 수 있다.

여하튼 나는 유명한 황태자파 중 한 명이고.

일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뭐라고 자백했대?”

“…아무리 고신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답니다.”

아아.

뭐라고 말하겠는가.

빵에 눈이 돈 레이디가 본궁에 가서 빵 훔쳐 오라고 시켰다고?

말하자니 부끄러워 혀를 깨물고 싶고,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

그러게 애초에 왜 멍청하게 붙잡히냐고!

이제 보니 손만 빵을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머리마저 빵이었네.

“어떡해요, 아가씨?”

마사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쩌지….

알레스는 잠시 고민하다 소리쳤다.

“아! 마침 나한테 면죄권이 있잖아?”

이러려고 마사는 아침부터 내게 도서관에 가라고 등 떠밀었나 보다.

숨죽이고 있다 여차하면 면죄권을 들이밀면 되는 거잖아.

“정말이지 다행이에요, 아가씨.”

면죄권에 대해 얘기해 주자 마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휴, 십년감수했네.”

알레스도 그제야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안도의 미소를 짓던 두 사람은 이내 어색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알레스와 마사의 머릿속에 같은 사람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 * *

헤라클레스 브레이브는 결국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자의 목을 치기 전에, 소소한 놀이를 하나 해 보자 싶었다.

황궁에 발이 묶인 귀족과 대신들을 연회장에 불러 모아 그자의 몰골을 구경시켜 줄 생각이었다.

연회 참석자 사이에 섞여 있을지 모를 배후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동요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도 귀족과 대신들에게 좋은 경고가 될 터였다.

“끌어내라.”

황제가 명하자 손이 묶이고 발에는 족쇄를 단 헤라클레스가 끌려 나왔다.

순간 레이디들 사이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무지막지한 고신으로 끔찍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할 말이 없나?”

황제가 발아래 엎드려 있는 헤라클레스를 향해 말했다.

“…….”

그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동도 없었다.

그러자 황제가 사악한 웃음을 띤 채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이자를 위해 나서 줄 이가 있는가?”

사방이 고요했다.

방금 황제가 던진 말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절차상 묻도록 되어 있는 말이었다.

곧 형이 집행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기요, 저요! 지금 나섭니다.”

갑자기 고요를 깨며 나선 이가 있었다.

거기 있던 수많은 눈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런 순간에 정말로 누군가 나선 경우는 지금껏 없었다.

황제의 자수정 같은 눈이 번뜩였다.

좌중을 헤치고 나온 것은 황제의 전 부인, 정확히는 대공 시절의 전 부인인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레이디였다.

그녀의 커다란 에메랄드 그린 눈동자와 구불거리는 핑크 브라운 머리칼이 오늘따라 좀 달라 보였다.

이 레이디가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것만도 충분히 황당하고 놀라운 일이었는데, 놀랄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마님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일입니다! 마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연회장을 흔들었다.

투옥된 이후 처음으로 헤라클레스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고집스러운 입이었다.

그는 남은 힘을 쥐어짜 처절하게 소리쳤다.

알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마님이 전부 다 시킨 일이라고 자백하지 그러냐.

하여간 빵 머리 아니랄까 봐.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건가?”

황제가 물었다.

“아, 위자료와 관련해 폐하께 요청드릴 것이 있어 왔는데, 때를 잘못 맞춘 것 같습니다.”

알레스가 천연덕스럽게 연회장을 두리번거렸다.

황제의 고개가 삐딱해졌고, 주변에서 비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미친 여자가 아닐 수 없다니까.

“하지만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이걸 좀 써 볼까 하는데요….”

그녀가 곁에 있던 유모에게 손을 내밀자, 유모가 치맛자락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저 죄수가 제가 지내는 로즈마리 궁 파티시에인데 솜씨가 꽤 쓸 만하거든요. 그래서….”

알레스가 유모에게 건네받은 것을 내밀었다.

“이걸 저자를 위해 내놓을까 합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체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옅은 푸른색에 황금빛 인장이 찍힌 증서였다.

면죄권!

황제의 자수정 눈에 파문이 일었다.

알레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얼굴로 면죄권을 흔들며 말했다.

“원래는 폐하께 다른 것을 주십사 부탁드리러 왔는데, 면죄권을 바치고 저자까지 함께 받아 갈까 합니다.”

황제의 눈이 알레스를 천천히 뜯어봤다.

대체 저 여자는 왜 매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을 어이없게 만드는 걸까.

미쳤는데 흥미로워.

황제가 애써 흥미를 감추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대가 원래 달라고 하려던 건 뭐지?”

“아, 원래 폐하께 청하려던 건….”

알레스도 철가면을 단단히 고쳐 쓰고 말했다.

“황궁에서 버리는 음식입니다.”

황제가 아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연회 때나 평소 식사 때 버려지는 음식들을 제게 달라고 청원하러 왔습니다.”

주변에서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레이디 페레티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몇몇 고상한 레이디들이 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참을 수 없이 역겨운 청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레스는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황궁에서는 남은 음식을 모두 폐기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손도 대지 않은 멀쩡한 것들이라지요. 요즘처럼 큰 연회가 있을 때는 그런 음식이 더욱 많을 테고요. 그걸 버리는 대신 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 그마저 먹으려는 건가? 지금도 식사는 섭섭지 않게 제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좀 먹기도 할 거다.

특히 헤라클레스가 만든 천타빵 같은 건 꽤 챙기겠지.

하지만 황제가 빈정거리든 말든 알레스는 계획이 다 있었다.

“제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눠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보육원 같은 곳에 실어다 줘도 좋을 것 같고요.”

술렁이던 연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황제가 고요를 깨고 말했다.

“그 음식들을 버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해도 남이 먹고 버린 음식을 달가워할까? 그거야말로 제국민을 모욕하는 행위가 아닌가?”

아무리 상류층이라 해도 서민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건 언제나 위험했다.

“그거야 말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레스가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말했다.

“버린 음식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제국의 태양께서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베푸신 음식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더구나 폐하께서도 즐겨 드시는 음식이라면? 백성들에겐 매우 은혜로운 일로 기억될 겁니다.”

제법이군, 하지만.

황제는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돌려 물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음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게 과연 은혜로운 일일까?”

“역시 제국의 태양이십니다. 폐하께서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알레스의 말에 저도 모르게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낼 뻔했다.

“폐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매우 중요한 문제인 거 같습니다. 음식을 나눠주는 장소나 음식 포장에 경고문을 넣는 건 어떨까요?”

“경고문?”

“예를 들어… 황실 음식의 특성상 위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거나 지나친 황실 음식 섭취는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식의 문구로 주의를 주는 거지요.”

“…지금 짐을 우롱하는 건가?”

“제가 어찌 감히. 저는 그저 위험은 숨길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알레스가 이 말을 하며 슬쩍 황제의 얼굴을 살폈더니 급소를 잘 골라 찌른 것 같았다.

그럼 한 번 더, 찌른 데 또 찌르기.

“그런 경고문을 보고서 가장 식은땀이 날 사람이 누구일까요? 폐하이겠습니까, 백성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음식으로 장난치려는 자들이겠습니까?”

황제에게 미끼를 던진 알레스가 이번엔 헤라클레스를 보았다.

얻어터져서 부어오르고 충혈된 눈에 감동의 빛을 가득 담고서 자신을 우러르고 있었다.

“물론 전문가가 잘 관리해야 탈이 없을 테지요. 아무리 뜻이 좋은 일이어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도리어 욕을 먹기 십상이니까요.”

알레스는 다시 한번 면죄권을 흔들며 헤라클레스를 가리켰다.

“저자의 재주가 마침 그 일에 적합하니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한번 주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설령 저자가 정말로 암살자라 하더라도 제가 관리하는 음식에 독을 탈 수는 없겠지요.”

알레스는 겉으론 화사하게 웃었지만 속으론 이를 부득 갈았다.

아, 아까운 내 면죄권….

이게 어떤 물건인데!

헤라클레스 이 인간아, 그 잘난 손목이랑 빵피 때문에 피 같은 면죄권을 날린 걸로도 모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까지 벌였다고!

당신은 죽을 때까지 내 곁에서 빵 반죽을 치대야 할 줄 알아!

능구렁이 황제의 의심을 피하려니 면죄권 외에도 더 큰 스토리가 필요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고, 한번 황제를 속이려 들자 사기의 스케일이 점점 커졌다.

빙의 전 삶에서 본 ‘푸드 뱅크’까지 흉내 내게 되다니.

여하튼 사업 얘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그만 빠지도록 할까.

“남은 음식에 관한 얘기는 폐하께 따로 상의드려도 될지요. 이곳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아서요. 가문의 일이니 좀 은밀히 처리하고 싶습니다.”

지금껏 연회장 한가운데서 별별 소리 다 해 놓고 더 은밀히 할 얘기가 남았다고?

황제는 기가 찼지만 일단 허락했다.

“그리하라.”

왜냐하면 남은 음식보다 더 황제의 심기를 긁어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알레스의 손에 들린 면죄권.

그 때문에 황제는 슬슬 언짢아지고 있었다.

페레티 가문엔 면죄권이 없다.

그렇다면 저건 누구한테서 온 거란 말인가?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런 여자가 아니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 총기도 재능도 없고 심약하기까지 한, 황태자가 손수 심혈을 기울여 고른 여자였는데….

황궁에서 지낸 불과 며칠 사이에 그런 여자에게 ‘자기 사람’이란 게 생겼다.

제 목숨까지 내놓으며 충성을 바치는 수하가 생겼다.

귀한 면죄권을 양도할 정도로 그녀를 아끼는 황족이나 귀족이 있다.

분명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제가 가장 참을 수 없어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면죄권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반드시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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