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8화 (8/120)

8화

눈 뜨고 코 베인 5황자

“하나도 없다고? 몽땅 연회장에 있단 말이야?”

갑자기 말이 짧아진 알레스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으니 무릎까지 꿇으며 요란을 떨었던 거구나.

그래도 제 죄를 아니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럼 거기서 하나 가져오든지.”

알레스가 일부러 딴 곳을 보며 툭 던졌다.

“예?”

“연회장에 음식이 산처럼 쌓여 있을 텐데 빵 하나 집어간다고 야박하게 굴진 않겠지.”

“그게 좀….”

“내가 그저 빵 하나 먹자고 이러는 줄 아나? 내 뜻을 정말 모르겠어?”

“…….”

알레스의 억지에 지금껏 잠자코 있던 마사가 나섰다.

“아가씨, 안 됩니다. 황궁에선 음식을 사사로이 반입, 반출할 수 없어요. 연회 음식은 관리가 더 엄격하고요.”

남은 음식은 고용인들도 손댈 수 없었고 무조건 폐기 처분했다.

그 얘기를 들은 알레스가 분개했다.

“말도 안 돼!”

한동안 바닥만 내려다보던 헤라클레스가 불끈 나섰다.

“마님,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어쩌려고…요?”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음… 수고해요 그럼.”

* * *

다음 날, 알레스는 소중한 아침을 챙겨먹자마자 마사에게 등이 떠밀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서고에 슬쩍 머리를 디밀고 보니 낯선 얼굴의 사서 한 사람뿐, 도서관은 조용했다.

휴, 그럼 그렇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가 있을 리가.

알레스는 안도하며 조금 느긋해진 마음으로 서가를 둘러보았다.

기왕 온 김에 사기의 자양분이 될 지식들을 좀 쌓고, 마사의 <빌보아 차트>를 챙겨서 유유히 사라지면 되겠군.

한참 서가를 따라 걷던 알레스는 안쪽 열람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것’은 서실 깊숙한 곳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위험은 알레스보다 더 부지런히 이곳에 와서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거다!

알레스는 책 사이로 ‘그것’을 훔쳐보았다.

위험한 건 원래 겉모양이 아름답고 유혹적인 법.

별호처럼 고결해 보이는 이목구비와 우월한 몸의 실루엣이 매우, 사람 홀리게 생겼군.

‘푸른 불꽃의 고결’이란 별호는 누가 지은 건지, 익숙해지고 보니 꽤 그럴싸하다?

그때 한쪽에서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벌써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것’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습관이라….”

악마적인 습관이다.

“자, 커피에다 몸에 좋은 마법식을 좀 넣었어. 두고 보라고. 이 음료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올 거라고.”

“쓰고 검군.”

“발 빠른 카르티에가 벌써 외국의 커피콩 산지와 계약까지 한 모양이더라고.”

알레스는 풍겨오는 커피 향을 맡으며 납작 몸을 숙였다.

“어제 연회가 늦게 파하지 않았어? 황제가 한바탕 했다며?”

“그래.”

“연회장에 금족령을 내리고선 술잔을 연거푸 돌려 몇몇 표적 삼은 인사들을 괴롭혔다지?”

“음.”

“결국 진실게임 마도구를 꺼냈다는 게 사실이야? 아무리 마력을 최소화했어도 연회장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겠네?”

“그 자리에 있었던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군.”

“약점 잡힌 이들은 당분간 고개를 들지 못할 테고. 신하 길들이기인가? 남은 연회도 순탄치 않겠어.”

잠시 침묵이 흐르며 커피잔 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가판투스는 황태자를 제거하고 황제가 됐어.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지. 어렸을 때부터 집요한 면이 있었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알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가 그렇게 무서운 놈이었다니.

만만하게 생각하다 큰일을 당할 뻔했군.

아무래도 알레스 때는 너무 황당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거 같았다.

하지만 옹졸한 데다 뒤끝 있는 성격이라면?

나중에라도 보복할지 몰랐다.

‘대비해야겠어. 위자료 건도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해야겠고.’

이래서 도서관을 정보의 보물창고라 하나 보다.

조금 전까지 알레스는 두 사람 모르게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빌보아 차트> 외에도 이곳에서 얻어 가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알레스는 차트를 대출하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꾸물대면서 주의를 끌었다.

“레이디 페레티 아니십니까?”

역시 엉덩이 가벼운 5황자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순간 알레스의 눈이 한 사람을 더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다행히 그는 거기 계속 꼿꼿이 앉아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레스는 일부러 풀죽은 얼굴을 하고 의기소침하게 고개만 까딱했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황자가 알레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과드립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던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황자 역시 어제와는 달리 점잖게 말했다.

불과 하루 전날 서로를 향해 이죽거렸던 걸 생각하면, 이리 예의를 차리며 점잔을 빼는 둘의 모습이 좀 우습긴 했다.

“아니에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이죠. 심신도 미약한 데다 박색이라 폐하의 진노를 사고 말았으니….”

마지막 부분에선 목소리를 조금 떨어 줬다.

“아아… 아닙니다! 그건 아무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인데… 그런 걸 제가 떠들고 다닌 셈이네요. 부끄럽습니다.”

황자는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했다.

“제 소개도 제대로 하지 않았군요. 저는 5황자인 브린 페이지 맥켈란입니다. 돕고 싶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레이디께 뭔가 해드릴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사람이 다소 경박하고 속물스럽지만 이럴 때 보면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란 티가 난다고 할까.

“제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황자 전하의 도움을….”

조금만 더 조여 볼까?

“자격이요? 충분하십니다. 레이디께 미안한 것도 있고요.”

“그래도 어찌….”

“어려워 마시고 뭐든 얘기해 보세요. 황족의 명예를 걸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뭐든…요?”

“예, 예.”

“그럼….”

알레스가 순박한 얼굴로 말했다.

“면죄권 주세요.”

브린은 자기가 지금 뭘 들었나 싶었다.

“면죄권이요?”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 뜨고 코 베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뭐든 괜찮다고 하셔서… 제가 또 폭탄같이 굴었나요?”

알레스가 조금 울먹였다.

“그게 아니라….”

“의례적으로 하신 말씀을 제가 또 착각했나 보네요. 명예를 거신다는 말씀에 그만 눈치도 없이….”

황족의 명예까지 들먹였는데 어쩔 거야?

하여간 5황자 너는 방정맞은 그 입이 문제다 인마.

브린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면죄권’은 황족 최고의 특혜이기 때문이었다.

크루그 제국에선 황족과 개국공신 등 극소수 가문에만 1회 면죄권이 부여됐다.

황제가 아무리 눈이 뒤집혀도 황족과 개국공신의 후손을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는 참사만은 막기 위해 일종의 안전장치를 한 거였다.

한 번은 무조건 봐준다는 황제의 약속이었다.

그런 만큼 면죄권을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는 건 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자식이나 연인을 위해 양도되었고, 가끔 청혼에 쓰이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읽은 제국의 법령과 사례집에 나와 있던 내용이다.

역시 공부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황제 폐하의 보복이 두려워 부적처럼 지니고 있으려는 겁니다. 황자 전하께 위급한 일이 생기면 당연히 돌려드릴 거고요.”

브린은 내놓기 싫지만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쓰린 속을 애써 감추며 품에서 면죄권을 꺼내 건넸다.

옅은 푸른빛을 띤 증서였다.

황제의 금빛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알레스는 오른손에 면죄권을, 왼손에 <빌보아 차트>를 들고 당당히 도서관을 나섰다.

“카이트….”

공작은 친우가 부르는 소리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5황자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나 털렸어.”

* * *

아 상쾌해.

알레스는 자신의 꽉 찬 두 손을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입만 야무지지 의외로 물렁한 5황자 덕분에 면죄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옹졸한 황제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더라도 무사히 막아낼 갑옷이 생겼다.

꼭 그게 아니라도 사업을 하다 보면 살짝, 아주 살포시 암흑세계에 발을 걸칠 수도 있는 거고.

재수 없게 걸렸을 때를 대비해 면죄권 하나쯤은 확보해 두는 게 현명한 일일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손쉽게 해결될 줄이야.

그때 마침 마사가 문을 거칠게 열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에헤이 이 유모, 성격도 급하기는.

“오늘은 확실히 챙겨 왔거든. 자, 빌보아….”

“아가씨, 큰일 났어요!”

마사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빌보아 차트>는 안중에도 없는 듯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파티시에 헤라클레스가!”

“왜? 벌써 빵 구해 왔어?”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로군.

그러나 마사는 갑자기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투옥됐대요.”

알레스는 눈을 껌뻑였다.

“무슨 짓을 했기에?”

그 아까운 금손으로 조신하게 맛있는 빵이나 만들어 올릴 것이지, 어딜 싸다니면서 엄한 짓을 했기에 투옥씩이나 된 거야?

알레스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마사가 가슴을 쿵쿵 쳤다.

“그게 아니라, 본궁 주방에서 붙잡혔다니까요!”

“응?”

“아가씨께서 부탁한 그 천타빵을 손에 쥔 채로 현장에서 붙잡혔대요!”

“이런 미련 곰탱이 같은!”

알레스는 와락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마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떡해요. 손목이 잘리든 목이 잘리든 할 거래요.”

“마사답지 않게 왜 이래? 빵 하나 가지고 무슨 그런 소릴….”

“반, 반역죄로 투옥됐대요.”

세상에 이런 소린 처음 들어본다.

빵 하나 훔쳤다고 반역죄라니.

장발장보다 더 심하잖아!

“뜬금없이 왜 반역죄야?”

“황실 물건 절도죄만 해도 손목이 달아난다고요. 그러니 겨우 빵 하나 때문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이 어딨냐는 거죠. 분명 더한 음모가 있는 거라고….”

그런 무모한 사람 여기 있다.

“더한 음모라니?”

“…황제 독살 같은.”

“말도 안 돼.”

마사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아가씨, 현 황제께서 어떻게 황태자를 제거하고 황위에 올랐는지 아시죠?”

황태자가 독살됐다는 건 제국민이 다 아는 비밀이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독살로 일어선 자, 독살로 망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은 광기를 불러낸다.

지금까지 수사된 ‘황제 독살 미수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건장한 괴한이 본궁 주방에서 수상한 짓을 하다 신고를 받고 온 근위기사단에 제압당했다.

괴한은 파티시에라고 주장했으나 고도로 훈련된 근육질 몸은 위장한 암살자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둔기에서 토끼 문양이 발견됐는데 소속 암살단의 표식일 가능성이 크다.

괴한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연회 음식에 독을 타 황제를 시해하거나 황실의 명예를 실추하려 했다.

현재 황실 근위대와 보좌단이 황제 독살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연회 참석자들도 당분간 출궁이 금지돼 발이 묶였다.

일은 어이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저 천타빵을 맛보고 싶었을 뿐인데.

“목도 안 되고 손목도 안 돼. 그는 빵을 만들어야 한다고!”

알레스의 여전한 빵 타령에 마사의 얼굴이 굳었다.

“헤라클레스한테 빵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아. 그러니까 손목을 가져가나 목을 가져가나 마찬가지….”

“아가씨.”

방금까지 덜덜 떨던 마사의 목소리가 얼음 같았다.

“지금 그를 걱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가씨가 위험하다고요.”

“나?”

“아가씨가 황제 암살의 배후로 지목될 수 있다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