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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7화 (7/120)

7화

별궁 파티시에는 근수저?

“아가씨 정말. 마탑이 도서관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요.”

마사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입시 준비하실 때도 제가 입이 닳도록 말씀드렸는데 건성으로 들으시더니….”

“마탑? 거기 사서 한 사람밖에 없던데?”

“황실 도서관이니까요.”

“그게 뭐?”

“황실 도서관은 엄밀히 말해 마탑은 아니에요. 황궁에선 황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마법을 엄금하잖아요. 극소량의 마력으로 작동되는 생활용품이나 오락기구 같은 거만 허용돼요.”

“아, 그래서 황궁같이 으리으리한 곳에서도 마법을 마구 쓰지 않고 사람 손을 빌리는구나.”

“그렇기도 하고요, 마법엔 돈이 많이 들어요. 아무리 황궁이라 해도 그렇게 헤프게 쓸 수는 없는 거죠. 따라 해 보세요.”

“응?”

“마법은 돈.”

“마법은 돈?”

“네. 마법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부 다 돈이란 걸 기억하세요.”

“역시 돈이 문제네. 그럼 황실 도서관은 사서도 다른 데랑은 달라?”

마사는 잠시 머릿속 정보를 조합하는 듯했다.

“보통 사서들은 마법사들이거든요. 그것도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요. 황실 도서관은 마법사 대신 5황자께서 관장을 맡고 계세요.”

5황자? 그러고 보니 그 사서 눈 색깔이 황제랑 같은 보라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5황자까지 알아? 마사는 모르는 사람이 없네.”

“굉장히 유명한 분이거든요.”

아가씨만 모르실 뿐.

“5황자님은 마법식의 천재라 불리는 분이에요. 타고난 마력은 약하시지만요.”

“마법식 천재?”

“황실 도서관은 다른 마탑 도서관과 달리 극소량의 마력과 정교한 마법식으로 돌아간대요.”

황궁 보안 때문에 마법사를 쓸 수는 없고, 황족이면서 마력이 약한 그가 사서로 적임자였겠군.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대단한 분이잖아요?”

마사가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사, 대단한 건 그 주책바가지가 아니라 당신이야.

당신은 왜 유모인 거야?

아카데미엔 적성도 흥미도 없는 주인 아가씨가 아니라 마사가 진학했어야 했어.

알레스는 마사의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에 감탄했다.

“아가씨가 도서관에 갔을 때 설마 계시진 않았죠? 그럴 거예요. 매우 바쁘신 분이라 명목상 도서관장이지 뵙긴 힘들다 하더라고요.”

거기 죽치고 있던데? 매우 한가해 보이고.

여하튼 궁금증은 풀렸다.

어째서 사서가 황제한테도 공작한테도 덤빌 수 있었는지.

마사라면 그 도덕책 공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테지?

물론 멀리하긴 할 건데, 상대에 대해 알아둬야 제대로 멀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뭐 그런 거랑 비슷한 얘기다.

그런 거다.

‘그 황자 사서랑은 친분을 좀 쌓아두는 게 좋겠어.’

마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라는데, 사업을 하다 보면 마법을 끌어다 쓸 일이 분명 있을 거다.

지금부터 친해 두면 나중에 마법이 필요할 때 지인 찬스를 쓸 수 있을지 모르잖아?

마도구나 마법식의 단가를 반값에 후려칠 수 있을지도.

알레스는 음흉하게 웃었다.

* * *

저녁이 되자 약속한 식사와 주류 1병이 제공됐다.

잔치 음식의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전날 제공된 것과 비슷한 메뉴였다. 물론 이 음식들도 맛있긴 했지만.

특히 처음 맛보고 놀랐던 빵은 언제나 훌륭한 수준을 유지했다.

빵 반죽에 분명 뭔가 있어!

알레스의 식탐 유전자가 부르짖고 있었다.

“마사, 파티시에를 좀 불러 주겠어?”

“왜 그러세요, 아가씨?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면 환장하게 맛있다는 게 문제야.

“아니, 솜씨를 치하하고 싶어서.”

마사가 주인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는 걸 매우 성가시게 생각하던 아가씨였다.

특히 빵은 몸을 둔하게 만든다고 꺼리셨는데….

착하디착하던 과거의 아가씨도 애틋했지만, 마사는 지금의 아가씨가 더 좋았다.

먹는 걸 밝히고 빵을 좋아하면서부터 아가씨의 눈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예, 조리장에게 얘기해 놓을게요.”

마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알레스는 오늘의 주류 1병을 바라보았다.

거의 고급 와인이거나 코냑이거나 샴페인 아니면 위스키였다.

매우 고급지고 황송한 주종이긴 했으나 가끔 퇴근 후 혼자 먹던 치맥이 생각났다.

고독한 악녀의 소울 푸드였던 와삭바삭 치킨아, 기포 빵빵한 맥주야.

너희들이 무척 그립구나.

알레스는 되돌아온 마사에게 물었다.

“마사, 맥주라는 거 알아?”

“글쎄요, 들어본 적 없는데요. 뭔가요?”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에 마사가 살짝 자존심 상한 얼굴로 되물었다.

“보리로 만든 술인데.”

“네에? 보리빵이랑 보리커피라는 차는 들어봤어도 보리로 술을 만든다는 소리는….”

아무래도 여긴 맥주가 없나 보다. 한국식 치킨은 더더욱 없을 테고.

퇴직자 90프로가 열었다가 93프로가 망한다는 그 치킨집을 여기다 열어야 하나?

“제공된 주류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다른 술을 찾으시고…. 제가 따라 드려요?”

“따르긴. 마시려고 받은 게 아니야. 잘 뒀다가 급할 때 요긴하게 쓰려고 받은 거지.”

마사의 얼굴에 정체 모를 아쉬움이 떠올랐을 때, 한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바위산처럼 크고 단단해 보이는 상체에 팔다리 근육이 울퉁불퉁한 거구의 장정이었다.

“우린 기사가 아니라 파티시에를 불렀는데….”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은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했다.

“예, 로즈마리 궁 파티시에 헤라클레스 브레이브입니다.”

소림사 주방장도 아니고….

저 쓸데없는 근육은 다 뭐람?

“당신이 이 빵을 만든 사람 맞아요?”

알레스가 식탁 위에 있던 빵을 집어 들고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파티시에 헤라클레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고용인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 있었다.

로즈마리 궁에 묵고 있는 마님은 황제에게 이혼당하고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괜히 잘못 걸렸다간 이혼녀의 히스테리를 옴팡 뒤집어써야 한다고.

‘후우, 이번엔 내가 분풀이 대상인가….’

헤라클레스가 난감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알레스는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저 솥뚜껑같이 크고 두꺼운 손으로 그렇게 말랑말랑 귀여운 빵들을 만들었다고?

“비결 좀 들어봅시다. 그렇게 맛있는 빵을 만드는.”

그가 바위산 같은 어깨를 움찔하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비꼬는 거 봐. 빵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무서워.

그는 한없이 쫄아들었지만 눈치 없는 몸뚱이는 위풍당당하기만 했다.

“내가 웬만한 빵은 다 먹어 본 사람이거든. 그런데 이건 확실히 달라요. 뭐랄까, 빵피에 영혼이 깃들었달까.”

헤라클레스는 어리둥절해졌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보들보들하면서도 촉촉해. 완벽한 아기 엉덩이야.”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도 아니었다.

마님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지금껏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없었다.

아주 가끔 화려한 장식이나 희귀한 속재료에 관심을 주는 이는 있었지만, 언뜻 평범해 보이는 빵피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수십 년간 수련과 연구를 거듭하며 진정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건 빵피였다.

“아주 훌륭해요. 별 세 개야.”

그는 두툼한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맛있다는 걸 ‘별이 세 개’라고 표현하다니, 너무 로맨틱해.

단지 칭찬받았기 때문에 감격한 건 아니었다.

과분한 칭찬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뻤지만 그를 더욱 감격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웬만한 빵은 다 먹어 본’ 사람.

위대한 정신이었다.

그런 분이 제 빵을 맛있다고 평가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었다.

“…영광입니다.”

헤라클레스는 가까스로 이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알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런 훌륭한 솜씨를 지녔는데 왜 본궁에 있지 않고 구석진 별궁에 있는 거죠?”

“그건….”

어차피 황궁 내에 빵 맛 따위를 음미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잠시 식탁 위를 장식하다 폐기 처분되는 게 대다수 빵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주방에 적합지 않은 용모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별궁 주방에서 일하게 된 것만도 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한적한 별궁에서 자신만의 비법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자식 같은 빵을 먹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슬펐지만.

그동안의 일을 생각하니 헤라클레스는 새삼 눈물이 솟구칠 거 같았지만, 얼마 전 새로 장만한 거품기와 밀대를 떠올리며 참았다.

손잡이 끝에 귀여운 토끼를 새겨 넣은 물건이었다.

“제 솜씨가 모자랐던 거지요.”

그렇지만 누가 자신의 하찮은 사정 따위를 일일이 알고 싶겠는가.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저 그렇게만 대꾸했다.

“그거 혹시 겸손이면 도로 집어넣도록 하죠.”

마님의 까칠한 반응에 그는 움찔 놀랐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나요? 훌륭한 솜씨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나? 아니면 내 안목을 못 믿겠다는 건가?”

“예?”

“아, 됐어요, 됐어. 뻔하지 뭐. 그 인간들이 뭘 알겠어. 잔치 음식도 나눌 줄 모르는 센스로 빵 맛인들 알겠어? 그런 막입들에겐 당신 빵이 아까워요.”

알레스는 연회 음식에 대한 미련과 황제에 대한 분노로 부르르 끓어올랐다.

역시 먹는 걸로 빈정 상한 건 오래간다.

그때였다.

“마님!”

헤라클레스가 돌연 돌덩이 같은 무릎을 바닥에 꿇은 건.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는 꿇은 무릎 위에 솥뚜껑 같은 손을 얌전히 포개 얹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바위산 같은 어깨가 들썩였다.

태어나 처음 가져본 제 편이었다.

위대한 정신께서 네 솜씨는 누가 뭐래도 훌륭하며 그걸 몰라보는 인간들이 덜떨어진 거라고 주저 없이 말해 주었다.

‘이날을 위해 나는 시련을 견디며 지금껏 빵을 만들어 온 게 아닐까.’

헤라클레스는 엄청난 감동과 전율에 휩싸였다.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마님, 아까 낮에 본궁에 불려가서 연회에 쓰일 빵을 만들었습니다.”

“연회 음식을 만들었다고요?”

알레스의 눈이 활짝 커졌다.

“연회 음식은 어때요? 다른 음식이랑은 뭐가 좀 다른가?”

식탐왕 알레스가 궁금증을 쏟아냈다.

생각지 못한 격한 반응에 잠시 주춤하던 헤라클레스가 알레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제가 본궁에서 천타빵이란 걸 만들었는데, 반죽을 천 번 치대서 만든 빵입죠. 언젠가 꼭 마님께 그 빵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반죽을 천 번!”

그 탁월한 빵피의 비밀은 저 거구로 무지막지하게 치댄 반죽에 있었구나!

“맛이 궁금하네. 좀 남았지요?”

알레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말투가 상냥해졌다.

“그게….”

헤라클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천타빵엔 제가 직접 배양한 발효종이 들어가야 합니다. 백일종이라고 백 일간 공을 들여야 하는 건데, 그걸 몽땅 써 버렸습니다. 연회에서 인정받고 싶단 욕심에….”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봐야 그 빵은 황족과 귀족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게 뻔했다.

마님께 자신이 만든 천타빵을 지금 당장 선보이고 평가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될까.

이분은 그 진가를 누구보다 잘 알아주실 것이다.

아니 그 진가를 알아줄 유일한 분일지 모른다.

후회가 너무 채운 크림처럼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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