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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6화 (6/120)

6화

만나선 안 될 사이

알레스와 메르세데스 공작, 둘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분위기에 사서가 수상하다는 듯 물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야? 레이디가 심적으로 힘든지 어떻게 아는데? 아니, 왜 심적으로 힘든 건데?”

둘 다 말이 없자 사서가 살짝 부루퉁한 얼굴로 나불거렸다.

“그래요,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레이디. 황태자파도 있는데요 뭐. 지금 그들만큼 세상이 무너지고 똥 밟은 기분인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요. 무슨 일로 괴로우신지 모르겠지만 황태자파만 아니면 다행인….”

공작이 갑자기 사서를 막아섰다.

“브린….”

“왜? 뭐? 비켜 봐. 레이디와 대화를….”

공작이 사서의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감쌌다.

사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카이트! 내 어깨를 으스러뜨려 놓을 셈이야!”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서를 암청색 눈으로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사서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명색이 책 쓴다는 인간이 말이야, 걸핏하면 말보다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들더라.”

어깨를 주무르며 도서관 한쪽에 세워진 거대한 괘종시계를 쳐다본 그는 화제를 돌릴 겸 말했다.

“황제의 연회가 시작됐네. 나야 상관없지만 카이트 자넨 잠깐이라도 얼굴 비추는 게 좋을걸. 기껏 입궁해서 도서관에만 있을 건 아니지?”

사서는 알레스에게도 말했다.

“레이디도 슬슬 연회에 가 보셔야죠. 아름다운 분이시니 조심하십시오. 황제가 후궁 하나 없는 홀아비 신세거든요.”

그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대공 시절에 혼인한 전 부인이 있는데 광란을 일으켰다던가, 황태자가 엄청난 추녀를 구해다 투척했다던가. 여하튼 지금은 이혼하고 홀몸….”

공작이 사서를 막아섰다.

“뭐야, 또 막아? 보자 보자 하니까, 카이트 너 요즘 자주 날 막는다. 어휴, 내가 조금만 더 성격이 모질었어도 먼저 독약 풀고 황제 되는 건데….”

공작이 이번엔 사서의 왼쪽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감싸고는 한 바퀴 돌렸다.

사서가 으악 소리를 질렀다.

“카이트! 어깨 빠졌다고! 내 어깨! 농담 아니야!”

공작이 알레스에게 말했다.

“나가시죠.”

두 사람의 활극을 지켜보던 알레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여기는 사서가 갑인가? 무슨 사서가 황제도 맞먹고 공작도 맞먹지?’

“야, 카이트! 내 팔 끼워 넣고 가!”

사서가 악을 쓰는 소리가 바람결에 아련히 들려왔다.

“흠, 저, 레이디 페레티….”

공작이 어울리지 않게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알레스는 공작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살짝 눈이 커졌다.

“저는… 당신의 선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생뚱맞은 소리였으나 공작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황제와 마주 선 레이디를 보았습니다. 제 눈에 졸렬한 건 황제였고, 위대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알레스는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건 저쪽 세상에서도 못 들어본 말이었다.

여긴 어떻게 된 세상이 급진적인 사람투성이인 거야?

“다른 사람의 눈보다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는 거,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지요. 당신의 선택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쑥스러워하던 공작은 이제 막힘이 없었다.

“레이디를 지지합니다.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반드시 뭘 보여 줘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이 아름다운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 주는 걸로 족하고….”

“…….”

알레스는 얼굴이 노랗게 뜨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그제야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왜 메르세데스 공작한테서 사내 킹카인 그를 보았는지.

그것은 본능의 외침이요 경고였다.

이 남자를 피하라는!

분수에 맞지 않는 남자와 엮이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잘 기억했다.

나는 사기꾼, 저 남자는 도덕책 공작.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주저치 마십시오. 메르세데스의 영지는 북부에 있지만, 겨울이면 이곳 제도에 자주 옵니다. 아까 도서관에서 본 친우와 상의할 일이 꽤 있어서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도움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역시 그러시군요.”

“안녕히 가세요.”

알레스는 꾸벅 인사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내뺐다.

빙의 전 삶에서 사내 킹카를 피해 줄행랑을 쳤던 것처럼.

‘그래, 다시 만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공작의 깊고 푸른 눈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았다.

‘없지, 없어. 패가망신한 이혼녀가 푸른 불꽃의 고결을 또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특급 유모 마사가 꼭 챙겨 달라고 부탁한 <빌보아 차트>도 내버린 채 알레스는 허우적거리며 달아났다.

* * *

“아가씨, 너무하세요.”

“어, 미안.”

“제가 금장 회중시계를 바랐나요, 레이스 스카프를 바랐나요. 그저 팔랑대는 <발보아 차트> 한 장 바랐을 뿐인데.”

“나도 꼭 챙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됐네.”

마사는 알레스에게 부탁한 <빌보아 차트>를 무척이나 기다렸는지 서운한 얼굴로 퉁퉁거렸다.

그나저나 마사가 아는 최고의 사치품이 회중시계랑 레이스 스카프인가?

돈 벌면 그거나 하나 안기고 마사의 코를 확실하게 꿰어야겠다고 알레스는 생각했다.

어중간한 고용인 열 명보다 마사 한 명 부려 먹는 게 나았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마사한테 투자하는 건 남는 장사였다.

“그 차트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다마다요. 보름마다 젊은 귀족들의 평판과 인기 순위를 매기는 차트잖아요. 젊고 돈 많은 영식들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요.”

역시 마사. 상류층의 움직임을 파악해 돈의 흐름을 읽으려는 건가.

하지만 특급 유모 마사에겐 한 가지 고질병이 있었으니.

“아가씨 배필 되실 분이 기왕이면 젊고 돈도 많고 능력도 출중하면 좋잖아요.”

오매불망 기다리던 <빌보아 차트>가 그런 용도였어?

“최고만 볼 거예요. 하나도 아쉬울 거 없어, 우리 아가씨는!”

“마사, 난 한 푼이 아쉬워. 그런 쓸데없는 데 재능 낭비 말라고.”

“제국 최고의 공자로다가….”

“마사,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

“아가씨 저는요, 외모도 볼 거예요.”

마사의 야무진 포부에 알레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마사… 자꾸 그러면 <빌보아 차트>는 없어.”

알레스의 단호한 말에 마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가씨도 참. 설마 제가 그것만 보겠습니까. 부자가 되려면 귀족에게 밥을 사라지 않습니까. 귀족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다 계획이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마사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돌아가는 걸 보니 급하게 둘러대는 말인 게 분명했다.

그래도 순발력 하나는 인정.

“요즘 세상에 고지식하게 하나만 파선 굶어 죽기 딱 좋지요. 겸사겸사, 두루두루란 말이 왜 있겠어요.”

세상의 고용주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할 자세로군.

“마사는 어디다 떨어뜨려도 잘 살 거야.”

알레스는 아까 도서관에서 나름의 교훈을 얻었다.

사람 사는 곳은 여기나 저기나 대충 비슷하다는 거.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나 욕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

사실, 여기 귀족들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그러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벌써 잊었던 걸까.

비즈니스에선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대라도 방심은 금물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내일은 꼭꼭 챙겨다 주세요.”

마사가 간절한 얼굴로 부탁했다.

내일? 설마 고결 공작이 내일도 도서관에 있진 않겠지?

그 사서란 작자는 좀 성가시고 거슬리긴 해도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빠진 팔은 무사히 끼워 넣었나?

“그런데 마사, 대체 귀족 순위를 어떻게 매기는 거야?”

마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읊었다.

“가문의 영향력, 영지 운영 실적, 재력, 전공 분야 성취도, 사회 기여도, 매력, 인기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고 들었어요.”

대답이 거의 인공지능 비서급이다.

“그걸 누가 어떻게 조사하는데?”

“전령 길드인 헤르메스에서 하잖아요. 탈라리아 메신저라고, 마법 통신구의 일종인데 그걸로 조사한다던데요. 처음 나왔을 때 꽤 화제였는데.”

“마법 통신구? 그러니까 마법이란 게 막 주문 외우고 지팡이 휘젓는 그 마법?”

알레스의 말에 마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젊디젊은 분이 저희 할머니 같은 말씀을. 하긴 아가씬 원래 마법 쪽으론 특히 약하셨죠.”

마법이라….

생각보다 터프한 세상에 떨어졌다.

“신성학과, 마법학과, 예술학과, 검술학과 중에서 특히 마법학과랑 안 친하셨죠. 마법식 공포증이 있으셨잖아요. 결국 아카데미 입시도 세 번이나 떨어지시고….”

“뭐 잘하는 건 없었어?”

“착하셨습니다.”

“…….”

괜찮아. 아직 창창한 열아홉인데 뭐.

“하긴 사람이 전부 다 잘하긴 힘들죠. 신성학, 마법학, 예술학, 검술학, 통칭 ‘신마예검’에 모두 통달한 수재는 제국에서도 4공작가의 몇 분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4공작이라면 아까 그 도덕책 공작도 들어가는 건가?

“물론 전부 못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알레스의 눈에 힘이 들어가자 마사가 장난스레 웃었다.

“에이, 농이에요, 농. 요즘 아가씨를 보면,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다른 데 재능이 있으셨단 생각이 들어요. 틀에 박힌 귀족 교육이 아가씨한테 맞지 않았을 뿐이죠.”

“흥, 재능 없다는 소릴 대놓고 하네.”

“무례를 저질렀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중요한 건 차트니까 내일은 꼭 챙겨 주세요.”

“어차피 보름마다 새로 나오는 거라며. 뭐가 그렇게 급해?”

이번엔 마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급할 수밖에요! 황실 연회가 열리고 있단 말이죠. 그것도 보통 연회가 아니라 황제 즉위 축하연이란 말이에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재수 없는 황제 놈이 연회를 열든 말든.

황실 연회면 잔칫상도 뻑적지근하게 차릴 텐데.

지척에 있으면서 잔치 음식 하나 돌리지 않는 거 봐봐.

하여간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이라니까.

“무슨 상관이냐뇨. <빌보아 차트>에 있는 공자들이 전부 여기 온다는 얘기라고요!”

그게 뭐? 연회 음식도 못 얻어먹는데 무슨 의미가 있니?

“평소 연회에 잘 나타나지 않던 귀족들도 이번만큼은 모두 얼굴을 비칠 거라고요.”

“그런데?”

“실물 영접을 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흔치 않은 기회라고요! 연회가 열리는 닷새 동안 실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벌써 하루가 날아갔잖아요.”

실사라니….

이쯤 되면 마사가 그냥 그 사람들 보고 싶은 거 아니야?

혹시 그중에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설마 ‘푸른 불꽃의 고결’ 멤버 같은 건 아니지?

“거기다 이제 곧 옮겨갈 저택을 정해야 하잖아요. 차트 내용을 직접 확인해 보고 어느 위치에 집을 구하면 좋을지 알아봐야죠.”

알레스가 눈을 끔뻑이자 마사가 한숨을 쉬면서 설명했다.

“기왕이면 가능성 있는 분과 이웃이 되면 좋잖아요. 오며 가며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잦을 테고, 이웃이니까 서로 초대할 수도 있죠.”

대단한 집념이다.

맹자네 엄마도 울고 갈 지리적 판단력이야.

“그러니까 내일 오전 일찍 도서관에 다녀와 주시면 고맙겠어요. 아가씨만 바쁘신 게 아니라고요. 저도 여기 있는 동안 할 일이 태산이라고요.”

유모 등쌀에 또 거길 가야 하네.

사람 잡는 메르세데스 공작과 주책바가지 사서 콤비를 떠올리자 아까 의아했던 게 생각났다.

“마사, 도서관 사서는 어떤 사람들이야? 황실 도서관 사서는 사람이 좀 이상하더라고.”

알레스의 질문에 마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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