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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5화 (5/120)

5화

그런 책을 쓴 건어물 공작

“절 놀리는 거였군요.”

알레스가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그래요, 인정하죠. 내숭 좀 떨었어요.”

알레스는 사서를 향해 턱을 쳐들었다.

“솔직히 저런 고리타분한 제목을 단 책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어요. 됐나요? 제목뿐 아니라 내용까지 그렇다면 작가의 배짱이 대단하잖아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까댈 일은 아니었다.

저 능글능글한 사서 때문에 평정심을 잃은 게 컸다.

이제 보니 그는 사람의 신경을 살살 긁는 재주가 있었다.

알레스는 애꿎은 책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푸른 불꽃의 고오결? 딱 견적 나오네. 팬클럽 애들한테 책 팔아먹나 봐요?”

물론 치사하고 얄팍한 게 괜찮은 수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서는 알레스가 하는 말을 듣고도 당황하기는커녕 빙그레 웃었다.

“그 책의 내용은 훌륭하긴 합니다, 레이디.”

그는 여전히 즐거운 듯했다.

“하지만 가볍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 구미엔 맞지 않을 수 있지요.”

뭐야 이 멀쩡한 분석은.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책을 집어들게 하는 게 그분의 힘이고요.”

“아하, 알맹이보다는 인기 빨로 밀어붙인다? 책은 건어물처럼 뻣뻣하게 쓰는 작가가 독자들한테는 살랑살랑 애교 좀 떠시나 봐요?”

“호오, 레이디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서는 희희낙락이었다.

뭔가 굉장히 고소해하는 듯한데, 잘못 본 거겠지?

“아, 독자들 사이엔 이런 말도 있답니다. 딱딱한 도덕적 훈계도 그분이 하면 달콤한 사랑의 밀어로 들린다고요.”

웃는 낯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그를 향해 알레스는 미간을 좁혔다.

소름 끼치게 느끼하지만 미치도록 탐나는 비즈니스 마인드다.

그렇지, 돈이란 저렇게 저급하게 접근해야 벌 수 있는 거거든.

기회가 된다면 사업 얘기 좀 나누고 싶다.

알레스가 이중적인 감정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사서가 돌연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들었어, 카이트? 레이디께서 메르세데스 공작은 애교쟁이냐고 물으시는데? 흡, 크읍, 크하하하하.”

사서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쟁, 쟁이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메르세데스?

“봐봐, 고리타분하다잖아. 공작님이 하는 건 뭔들 좋다는 사람들 말고, 이렇게 솔직한 레이디의 평을 들어봐야 한다니까.”

낯선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등 뒤로 느끼며 알레스는 뒤통수가 싸해지는 걸 느꼈다.

“브린, 레이디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지만 말투는 건조했다.

알레스는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뒤통수를 보인 채 서 있고 싶었다.

이대로 등을 보인 채 게걸음으로 빠져나가면….

하지만 불가능한 일, 알레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돌아섰다.

목소리 주인의 키가 큰지 가슴 아래로만 보였다.

“친우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먼저 사과했다.

맞아요! 난 간악한 사서의 함정에 빠진 거라고요!

알레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리 심상하게 말하는 걸 보니 ‘고결 공작’일 게 확실한 목소리의 주인은 알레스가 한 말을 못 들었거나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카이트 라줄리 메르세데스입니다. 그런 책을 썼습니다. 고리타분한데 배짱이 넘치는.”

빠짐없이 다 들었고 매우 꽁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브린이라고 불린 사서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깐죽거렸다.

“이봐, 레이디한테 그 뻣뻣한 건어물 같은 말투는 뭐야? 애교 있게 말하지 못해?”

닥쳐, 이 사서 자식아!

속으로 절규한 알레스는 사서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당황해서 계속 허둥거려 봐야 저 녀석의 즐거움만 채워 줄 뿐이다.

뻔뻔하게 사과하고 얼른 튀어 버리자.

“독자들에게 줄 금언 두루마리는 다 쓰셨습니까, 푸른 불꽃의 고결 나으리.”

“더 이상의 우롱은 용납하지 않겠다.”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알레스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

결심한 알레스가 마침내 고결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봤다.

심해와 같은 암청색 눈이 강렬하면서도 차가웠다.

헉, 이 남자!

알레스는 뻔뻔하게 사과할 생각도, 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어째서 메르세데스 공작의 얼굴에 그 남자가 있는 거지?

눈동자 색이나 머리색 같은 거만 다를 뿐, 이목구비부터 표정이나 분위기까지 두 사람은 놀라울 만큼 닮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저 공작은 빳빳한 건어물인데, 그 남자는 차가운 냉동어라는 점?

한 사람은 물기가, 한 사람은 온도가 부족하다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알레스는 고결한 건어물 공작에게서 자신이 알던 한 남자를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 * *

자강의 삶에 짧고 굵게 등장한 적 있는 그는 사내 킹카였다.

자강과 입사 동기인 그는 이미 사내 유명 인사였다.

준수한 외모에 우월한 입사 성적,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등 어딜 가든 주인공을 꿰차는 그런 부류였다.

성격이 까칠하고 도도하여 찬바람이 일었지만, 그마저 매력이 되는 듯했다.

한마디로 자강과는 동선이 겹칠 일 따윈 없는 귀족층이란 뜻이었다.

그 일만 없었다면.

문제의 신입 연수 체육대회.

말이 체육대회지 임원들이 사원들의 적극성이나 패기, 근성 등을 평가해 부서 배치 등을 결정하는 자리라는 소문이 있었다.

아직 입사가 확정된 게 아니며 연수생 중 몇 프로는 탈락할 수 있다는 괴담까지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지나치게 과열됐다.

신입사원 양자강에게 떨어진 미션은 커플 게임.

남녀 사원이 짝이 되어 여자 사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지켜야 한다나.

반대로 다른 커플의 사원증을 빼앗으면 탈락시킬 수 있었다.

단, 자신들의 사원증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 게임의 룰. 손대는 순간 실격.

‘절대 안 뺏길 거야.’

사원증을 목에 건 자강은 굳게 결심했다.

끝없는 낙방과 계약 만료 끝에 겨우 정규직 발령이 코앞인데 여기서 틀어져선 안 되지, 절대!

자강이 요란한 결심을 마쳤을 때, 한 조가 될 남자 직원이 다가왔다.

당신은 하필… 사내 킹카 얼음왕자?

자강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인정사정없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킹카 자식 좀 보게.

게임에 영 성의가 없는 거다.

자신은 이깟 게임 떨어져도 직장 생활 하는 데 문제없다 이건가.

긴 팔다리를 얼음 조각상처럼 우아하게 놀리며 여유만만이다.

하지만 내 사정은 다르거든!

약이 오른 자강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차갑고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얼음 킹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자강의 목에 걸린 사원증은 맞붙은 두 사람의 가슴 사이로 꽁꽁 숨었다.

‘이 양자강의 합격을 어디 한번 가져갈 테면 가져가 보시지.’

철벽 방어에 스스로 흐뭇해하고 있는데 왠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얼음왕자의 추종자들이 이를 꽉 문 채 잇새로 저주의 말을 씹어뱉고 있었다.

“미츠은 그어 으아니야?”

더 기분 나쁜 건 사내 킹카의 표정이었다.

아주 잠깐 기다란 눈이 조금 커졌다 돌아온 거 말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이다.

놀라서 ‘어어’, ‘아악’ 같은 소리를 내지르지도, 그렇다고 ‘뭐하는 겁니까’, ‘이거 놓으시죠’ 같은 말을 하지도 않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겨 있는 킹카의 표정은 딱 이거였다.

‘너도인가?’

그거 아니거든요!

자강이 해명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드디어 여기저기서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킹카는 고이 놔둔 채 자강에게 달려들어 둘을 떼어내려 했다.

사나운 돌풍에 휩쓸린 듯 이리저리 치이던 자강은 급기야 다리를 건 누군가로 인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물론 킹카를 꼭 안은 채로.

그때 처음으로 얼음왕자가 근력과 순발력을 쓰는 게 꼭 붙은 몸을 타고 전해졌다.

분명 자강이 뒤통수를 땅에 부딪치며 장렬하게 깔리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킹카가 자기 아래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얼음왕자가 자기 몸 위에 누워 있는 자강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할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부탁드립니다.”

“그럼… 허리에 두른 팔을 좀 치워. 배겨서 불편해.”

“팔을 풀어도 밀착력에 문제가 없을까요?”

“…멍청아, 내가 두르면 되잖아.”

자강은 그날 최선을 다했다.

사내 킹카와 한몸이 되었다.

누구도 두 가슴 사이에 낀 합격의 증표를 빼앗지 못했다.

자강은 괜찮은 부서에 무사히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사내 왕따가 됐다.

* * *

“레이디 괜찮아요?”

공작의 턱을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바짝 곤두선 채 굳어 버린 알레스를 사서가 조심스레 불렀다.

이번엔 진짜 귀족으로 등장하다니….

알레스가 여전히 뚫어져라 쳐다보자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혹시… 내가 사과할 차례였던가?”

깝죽 사서도 능청스럽게 나불거렸다.

“레이디, 도서관에서 폭력은 절대 안 됩니다. 책이 아무리 재미없고 작가가 마음에 안 들어도 말이죠.”

퍼뜩 정신을 차린 알레스는 냅다 사과부터 했다.

“미안합니다. 실례했어요. 말이 지나쳤습니다.”

자, 그다음은 튀기!

이럴 땐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어랏, 그런데 왜 발이 떨어지지 않지?

진심이 1도 느껴지지 않는 알레스의 벼락 사과에 사서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화가 단단히 나셨나 본데? 이게 다 카이트 자네 때문이잖아.”

“역시 내가 사과할 일이었군.”

“레이디,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아까 건어물 얘기 참 잘했어요. 이 공작이 얼마나 뻣뻣하고 거만한가 하면요, 맨날 인기 없고 안 팔릴 짓만 골라서 해대는 거예요.”

사서가 진저리를 쳤다.

“편집국에서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아니, 요새 누가 내용 보고 책 사요? 제목이라도 좀 야리리하게 붙여 보자, 삽화를 좀 샤리리하게 넣어 보자 해도 꿈쩍을 안 해.”

그는 정말로 속상한 것 같았다.

알레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뻔했다.

“독자의 따끔한 충고를 들으면 달라질까 해서…. 곤란하게 만들어 미안해요. 다 저 건어물 공작 때문입니다.”

끝까지 공작 탓을 하는 사서에게 알레스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화난 거 아니고 진짜 사과하는 거예요. 제 말이 지나쳤어요. 공작 전하와 전하의 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저 꼴뚜기 사서가 약 올려서 발끈했을 뿐이라고요.

알레스가 다시 사과하자 공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반짝였다 사라졌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공작이 주저하다 쑥스러운 듯 덧붙였다.

“지금 심적으로 많이 힘드시잖아요.”

뭐지? 위로 비슷한 따스한 기운이 스쳐간 것 같은 이 느낌은?

알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서관에서 뵙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죠. 잘 이겨 내실 거 같군요.”

공작의 말에 알레스는 움찔했다.

나를 알고 있나?

설마… 당신도 나를 알아보는 건가?

정말로 사내 킹카?

여기까지 생각한 알레스는 속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의 눈빛이 묘했다.

꼭 자신을 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자강은 아주 오랜만에 사내 킹카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절대 그런 마음은 아니에요.?

?폐? 그런 마음??

?혹시나 부담 갖지 마시라고….?

?난 조금쯤 그런 마음인데.?

?…저기, 뭔가 의미가 잘못 전달된 거 같은….?

?아니, 의미는 분명하게 전달됐어.?

?…나한테 왜 이러세요? 사과드렸잖아요!?

?하아, 이제 기억날 때도 됐을 텐데….?

?……??

그때도 자강은 네 마음도 내 마음도 도무지 알 수 없어 일단 도망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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