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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4화 (4/120)

4화

도서관에서 지뢰를 밟을 확률

아가판투스는 기분이 이상하게 나빴지만 딱히 자신에게 불리한 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허락하마.”

막 즉위한 그에겐 이 일 아니라도 해치워야 할 골칫거리가 산더미이기도 했고.

알레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냉큼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머지 요청 사항은 며칠 후에 제출해도 되겠는지요?”

“…좋을 대로.”

“그건 서면으로 비서, 아니 보좌관에게 제출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다시 저와 대면하는 불편은 없으실 겁니다.”

“고맙군.”

고맙긴요. 피차 얼굴 봐서 좋을 거 없죠.

어차피 폭탄과 대왕 오징어 아닙니까.

괜한 트집 잡지 말고 내가 낸 서류에 인장이나 꽝꽝 시원스레 찍어 주길.

알레스는 황제와의 딜을 나름 만족스럽게 마치고 접견실을 나섰다.

위자료 청구 목록은 마사와 함께 작성하기로 했다.

알레스가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물으면 ‘그것보다는 저것이 더 시급합니다.’ 하고 마사가 현실에 맞게 바로잡아 주었다.

그뿐 아니라 대신들과 귀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표현도 추천해 주었다.

‘황제 폐하의 관대함과 인품을 제국민이 칭송할 수 있도록’ 고용인 최저 임금을 보조해 달라.

‘귀족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고 신분제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귀족 상조회에서 호위 기사를 배정해 달라.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아가씨, 마차는 괜히 달라고 하는 건 아닐까요?”

“왜?”

“생각해 보니 마부 임금이며 말 관리 비용이며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드네요. 필요할 때마다 불러다 쓰는 게 적게 먹히지 않을까요?”

마사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심했다.

“아냐, 받아 둬. 나중에 팔아서 현금화 하면 돼. 오히려 두세 대쯤 달라고 할까 봐. 황궁을 거친 물건이니 값을 비싸게 부를 수 있어.”

며칠 적응하다 보니 이곳에 떨어진 게 굉장한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살벌한 도시 정글에서 살아온 자신이라면 어수룩한 이곳 사람들을 찜 쪄 먹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특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무 노력 없이 호의호식해 온 귀족들.

사치나 부리고 가식이나 떠는 그 멍청이들은 훌륭한 호갱이 될 터였다.

더구나 자기가 누구였나.

회사에서도 악착같기로 유명했던 악녀 양자강이 아니었나.

새롭게 태어난 알레스의 눈앞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

‘나는 이곳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기꾼이 될 수 있겠어.’

알레스는 지체 없이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성공한 사기꾼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거지.

알레스는 황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 * *

사기는 99%의 정보와 1%의 순발력으로 치는 것.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소리다.

자강은 언제나 노력파였다.

빽 없이 악녀 노릇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주로 집안 빵빵하고 돈 있는 애들이 악역을 도맡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런 애들은 편하게 소리만 빽 지르고 물만 좀 끼얹어도 됐으니까.

하지만 자강 같은 자수성가형 악녀들은 계략이란 걸 짜야 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자기관리도 게을리 하면 안 됐다.

근성 없는 애들은 악녀 될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었으면 한다.

노력형 악녀인 자강에겐 무엇보다 낯선 세상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다.

황실 도서관이라면 제국 최고의 지식 창고가 아니겠는가.

물론 사교계나 거리의 소문을 수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언제 또 황실 도서관을 구경하겠냔 말이지.

황궁에 머무는 동안 살뜰히 뽑아먹어야지.

도서관엔 서적뿐 아니라 최신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신문과 잡지도 몇 종 있다고 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기를 치려는 의욕으로 알레스는 손끝까지 저릿저릿해졌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고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도서관은 한적했다.

알레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어 책 냄새를 맡았다.

‘황궁을 떠나기 전에 얼마나 읽을 수 있으려나?’

한시가 급한 알레스는 팔을 걷어붙이고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제국의 역사와 신화, 황실 계보, 귀족 계보, 제국의 법률, 산업 구조, 레이디를 위한 예법 등은 기본으로 봐야겠고.

사교계 최신 동향을 접할 수 있는 <주간 사교계>와 <월간 귀족의 자격>도 훑어볼 생각이었다.

참, 특급 유모 마사가 꼭 빌려다 달라고 부탁한 <빌보아 차트>도 잊지 말고 챙겨야지.

귀족의 평판과 인기 순위를 보름마다 집계하는 차트라나.

알레스는 책들을 욕심껏 쌓아놓고 정보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개국황제 스페이 몰트 맥켈란 이후 천 년을 이어온 맥켈란 황조는….’

‘크루그 제국에는 4공작 가문이 있는데….’

‘귀족 신분의 여성은 사업이나 취업 등으로 영리를 추구할 수 없다. 단, 이혼한 여성은 예외적으로 경제활동을 허락….’

‘제국의 축복받은 토지엔 거의 모든 것의 동력원이자 생필품의 원료가 되는 질 좋은 하겐배라가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점도 높은 크림 형태의 물질로….’

‘성인식을 치른 레이디들은 공개석상에서 식사할 때 벌린 입의 크기가 손가락 한 마디를 넘어서는 안 되고….’

알레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고기든 채소든 너무 잘게 자르면 맛과 향이 달아나는 법.

통째로 들고 뜯어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건 진리 중 진리인데!

아무래도 이 제국은 식탁 위의 정의부터 바로 세워야겠군.

콧김을 뿜뿜 내뿜던 알레스는 저쪽 책상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사람이 있었나? 아까는 왜 못 봤지?’

황실 도서관이니 아마 황족이나 귀족일 터였다.

아니면 관료인가?

알레스가 부주의하게 달각대고 중얼거렸는데도 그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꼿꼿하게 앉아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조심해야겠다.’

알레스는 머리도 식힐 겸 사교계 가십 잡지들을 뒤적였다.

‘29대 황제로 즉위한 아가판투스는 선황의 3황자로 모친은….’

전남편과 시월드 얘기로군.

‘금년 하반기의 헤어 경향 역시 카르티에 공작이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상반기에 공작은 백금발에 그린 컬러 브릿지를 넣어 레몬처럼 상큼한 분위기로….’

흠, 역시 비즈니스를 하려면 언론을 바람잡이로 써야 해.

영향력 있는 신문과 잡지에 줄을 대야겠어.

알레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메르세데스 공작의 신작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도덕적으로 사는 길>. <금욕의 기쁨>을 잇는 2년 만의 역작! 공작 전하가 직접 쓰신 금언 두루마리를 오십 분께….’

알레스는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가려는 걸 얼른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 이 부끄러움 어쩔 거야?

도덕적으로 사는 길이라. 설마 반어법인가? 혹시 비꼬는 거?

이런 책이 통하는 세상이라니.

후후, 귀엽네, 귀여워.

책 내용이 궁금해진 알레스는 서가를 뒤져 보았다.

짓궂은 호기심이 동한 것도 있지만, 사실 사업을 하건 사기를 치건 제국민의 정서나 의식 수준을 파악하는 건 중요했다.

그런데 그 깜찍한 책이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간이라 그런가?

알레스는 사서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이 책은 아직 안 들어왔나요?”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이며 묻자 사서가 눈을 번뜩였다.

“아이쿠, 레이디도 이 책 찾으시는구나. 어쩌죠? 열 권이나 들여놨는데 다 대출됐어요.”

“네?”

“그분 책이잖아요.”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내는 사서는 왠지 신나 보였다.

사실 그는 신이 난 게 맞았다.

가뜩이나 찾는 이가 별로 없는 황실 도서관인데, 최근 황궁이 뒤집히는 바람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게다가 이제 곧 오후부터 대관식을 대신한 황실 연회까지 열린다지 않은가.

원래는 황제의 대관식과 경축 연회가 함께 열리는 것이 관례지만, 대관식을 날치기로 치렀기에 이제야 귀족들을 불러들여 국무회의와 연회를 따로 여는 거라 했다.

이런 시국이니 누가 한가하게 도서관에 오겠는가.

파리만 날리던 차에 소중한 방문객이, 그것도 생기 도는 레이디가 왔으니 신이 날 수밖에.

아까부터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어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온 게 아닌가.

“그나저나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아하, 오늘 파티에 초대받아 오신 거구나.”

정작 그는 눈앞의 레이디가 황궁을 뒤집은 주역 중 하나란 건 알지 못했다.

눈을 반짝거리는 사서를 알레스도 신기한 눈으로 훑었다.

고운 얼굴선, 뽀얀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가 미소녀도 울고 갈 만큼 아름다웠지만 각이 잡힌 몸은 운동 좀 한 듯 딴딴해 보였고, 친화력은 동네 언니 급이었다.

한마디로 매우 언밸런스한 조합이었다.

알레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서는 재빨리 입을 놀렸다.

“영애도 혹시 ‘푸른 불꽃의 고결’ 멤버? 그분의 책을 찾는 걸 보니 그렇죠?”

사서의 눈빛이 은근해졌다.

“…아닐 걸요?”

알레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하자 사서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물었다.

“이런, 그럼 ‘붉은 물보라의 매혹’ 멤버?”

“그것도 아닌데….”

대관절 무슨 멤버이기에 이름이 다 그 모양이야?

알레스 팔뚝에 소름이 돋든 말든 사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 두 클럽의 이름을 실수로 바꿔서 말했다가 백주대로에서 싸대기 맞은 영식도 있다더라고요.”

“아, 네…. 안심하세요, 전 둘 다 아닐 거예요.”

사서가 다시 알레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귀족 영애 중 둘 다 아닌 사람은 드문데…. 뭐, 좋습니다. ‘태양을 삼킨 백장미’나 ‘별이 빛나는 밤의 사슴’ 멤버처럼 구석진 취향도 응당 존중받아야죠. 암요.”

“아니라니까요.”

“부끄러워 말아요. 취향은 죄가 아닙니다. ‘푸른 불꽃의 고결’이 아니라면 그 책은 왜 물어본 거죠?”

제 말만 하는 사서 때문에 슬슬 피로와 짜증이 올라온 알레스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신기하잖아요. 그런 책이 팔린다는 게.”

사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책이라뇨?”

사서의 정색한 얼굴을 보고 알레스는 아차 싶었다.

아직은 이곳의 정서를 거스르면 안 되는데.

이놈의 성질머리. 얼른 수습해!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그런 책이란 것이… 매우 훌륭하고 유익하고 감동적인 책이란 뜻인데, 조금, 아주 조금 현실과 거리가 있는 건 아닌가… 싶지만 그건 또 독자가 각자 노력해야 마땅한 부분이고 그게 독서의 기쁨인… 그런 책이 아닐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알레스가 마구 떠벌거리는 걸 재밌다는 듯 듣고 있던 사서가 물었다.

“진심이에요?”

“네? 그게, 다시 생각해 보니 현실과의 거리도 뭐 그닥 크지는 않은….”

“아니, 그거 말고 앞부분. 훌륭하고 유익하다는 건 그렇다 치고 그 책 읽고 감동까지 받긴 힘들 텐데?”

응?

“고지식하고 지루하잖아요.”

뭐라고?

알레스는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인기가 좋아서 열 권 모두 대출됐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재밌다는 거잖아요.”

“이런이런 레이디, 그거랑 그건 완전히 다른 얘기죠.”

사서의 한쪽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물정 모르는 순진한 레이디 같으니라구.

알레스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어수룩한 코찔찔이 중세 촌뜨기에게 세상 물정 모른다는 귀여움이나 받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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