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특급 유모의 이혼 사용설명서
흠, 라인을 잘못 탔다는 말 같은데?
황태자가 죽으면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나 보네.
“그렇다고 폐하께서 아가씨를 위해 대신들이나 다른 귀족들의 원성을 막아 줄 리는 없잖아요.”
마사의 지적에 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위인은 아니게 생겼더라.”
사실 마사의 분석은 정확했다.
어찌 보면 알레스는 황태자파 처단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처지였다.
대신들은 황태자파로 낙인찍힌 알레스를 후하게 대우하는 조치에 극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보수적인 귀족들은 그들대로 감히 황제와의 이혼을 선택한 그녀를 사회 기풍을 흐리는 미꾸라지 취급하며 반감을 표할 것이고.
“흐음….”
속에 자강이 들어앉은 알레스는 녹안을 들어 마사를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그런데 마사, 되게 똑똑하다.”
그 말에 마사가 멈칫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마사는 특급 유모야.”
뜻밖의 칭찬에 마사가 얼굴을 붉혔다.
만약 페레티 백작가의 주인들이 다른 귀족처럼 요령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래서 가문이 탄탄하게 유지됐더라면 마사도 아마 평범한 유모로 생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착해 빠지기만 했지 지독히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유모인 자신이 보기에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모시는 가문을 위해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원치 않게 배운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럼, 마사가 생각하는 다른 방도는 뭔데?”
“그거야 당연히 재혼이죠! 아니, 기록을 다 지울 테니까 초혼이죠, 초혼! 정략결혼이 아니라 정말로 사랑하는 분과의 혼인이요.”
“…….”
잘나가다 왜 이래?
“아가씨와 어울리는 멋진 귀공자와요!”
똑똑한 특급 유모가 이상한 데 꽂힌 것 같았다.
한숨을 푹 쉰 자강은 결심한 듯 말했다.
“아까 황제한테 한 말 뒤집어야겠어.”
“네? 그 말씀은 설마 후궁을 선택하겠다는 말씀이세요?”
마사가 무척 실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후궁은 기분 나빠.”
자강의 말에 마사의 얼굴이 확 폈다.
“그렇지요. 후궁은 절대 아니지요. 아가씨가 뭐가 아쉬워서요.”
반색을 하는 마사의 얼굴을 자강은 다시 한 번 멍하니 쳐다봤다.
역시 평범치는 않다.
이런 곳에서 급진적 성향의 유모를 만나게 될 줄이야.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럼… 무엇을 뒤집는다는 말씀이세요?”
“기록을 지워 달라는 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혼녀라는 증표를 아주 굵고 진하게 남겨 달란 얘기지.”
마사가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사랑하는 영식과의 결혼은 어쩌시고요!”
생각보다 증세가 심각해서 자강은 숨을 흡 들이켰다.
이런 곳에서 자유연애를 신봉하는 유모를 만나게 될 줄이야.
운이 좋은 거, 맞나?
“마사, 무려 황제가 된 사람과 이혼한 거라고. 기록을 없앤다고 그게 정말로 없는 일이 되겠어?”
냉철한 판단력을 뽐내던 유모가 왜 이런 데선 무모한 거야?
“아까 기록을 지워 달라고 한 건 그저 황제의 태도가 재수 없어서 한 방 먹이고 싶어서였어.”
순전히 감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이익이 달린 문제가 됐으니 쥐어박고 싶은 마음쯤은 접어 넣어야지.
그러나 마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이틀 부부인걸요. 신랑 얼굴은 결혼식 때 잠깐 본 게 다고, 두 번째 봤을 때 이혼하셨죠. 너무 억울해요.”
“이혼은 내가 선택한 거야. 마사도 후궁보단 이혼이 낫다며?”
“그치만 아가씨, 새로 혼인을 하시면 재정 문제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사, 마사, 그건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 들이박는 거야.
게다가 정략결혼이나 일삼는 귀족 놈들이야 이 시대나 저 시대나 뻔하지 뭐.
황제한테 찍힌 몰락한 가문의 영애를 누가 가까이하려 하겠어.
결혼은커녕 행여 잘못 엮이기라도 할까 봐 다들 벌벌 떨며 몸을 사릴걸?
하지만 자강은 마사에게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인 아가씨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마사에겐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굳이 그녀의 맹목적인 꿈을 산산조각 내고 싶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앞으로 이용할 부분이 많을 것 같은 사람이니까.
대신 살짝 돌려 말하면 되겠지?
“마사, 난 더 이상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난 너무 지쳤어.”
자강은 씁쓸하게 웃으며 모진 세파에 너덜너덜해진 사연 많은 여자를 연기했다.
“예? 이제 겨우 열아홉이신데….”
아, 그랬어?
황제놈 괘씸하잖아? 열아홉밖에 안 된 여자애한테 그렇게 가차 없이 군 거야?
완전 쓰뤠기네.
“그게 말이지… 진실한 사랑이라면 이혼녀라는 과거도 껴안을 수 있어야지 않을까?”
자강은 작전을 바꿔서 ‘난관을 극복했기에 더욱 숭고한 사랑’을 마사에게 들이밀었다.
마음이 흔들린 듯한 마사가 “그렇다면….” 하면서 한 가지 청원을 했다.
맹목적인 꿈을 위한 것치고는 매우 현실적인 코치였다.
* * *
말을 뒤집기 위해 황제 알현을 요청해 놓은 자강은 깨문 혀를 자극하지 않을 초코 무스 케이크를 조심조심 녹여 먹으며 어수선한 머릿속을 정돈했다.
꿈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뭔가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듯한데?
오자마자 다짜고짜 뭘 고르라는 바람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타이밍 한번 절묘하지.
달리 생각하면 원래의 알레스가 후궁을 고른 후가 아니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
솔직히 모르겠다.
일단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집중해 볼까?
그러다 보면 큰 그림이 잡힐 때가 올 것이다.
우선은 작은 밥값, 아니 빵값부터.
까짓것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란 가면을 쓰기로 하자.
어차피 이 가면 저 가면 쓰고 사는 덴 이골이 났잖아? 이젠 진짜 내 모습이 뭔지도 희미한걸.
?그런데 내가 왜 황태자파가 된 거야? 그저 돈 때문에 정략결혼 한 거 아니었어??
?돌연 승하하신 황태자와 이번에 황위에 오르신 대공은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아가씨와 대공의 혼인을 추진한 건 황태자 쪽 사람들이고요….?
자강은 아까 마사가 한 말을 곱씹었다.
처음 들었을 땐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생각할수록 찜찜한 이 기분은 뭐지?
가만있자… 정적에게 중매를 선다?
당연히 호의는 아닐 테고.
황태자로선 대공이 결혼을 통해 힘을 얻는 걸 원치 않았을 터.
자강은 인상을 팍 썼다.
뭐야? 내가, 아니 이 아가씨가 폭탄인 거야?
황태자가 대공을 엿 먹이려고 알레스라는 폭탄을 투척했고, 그에 열받은 대공이 황실까지 뒤엎었다는 거야 뭐야.
아 놔, 자존심 상해.
자강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예쁜데?”
특히 커다란 에메랄드 빛깔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표정에 따라 천진하게도, 신비하게도, 심지어 까마득한 어둠을 품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는 너무 뾰족하지 않고 동그스름한 게 코알라 같았다.
입술은 꼭 아기 새 부리처럼 뾰로통하니 귀엽게 솟아 있고.
게다가 저 풍성하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보라지.
핑크빛이 감도는 갈색의 긴 머리가 탐스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완전 돈 굳었는데?
무엇보다 서른이었던 자강의 눈엔 열아홉이라는 나이 자체가 그냥 무조건 예뻐 보였다.
나, 귀엽잖아!
자강은 두 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런 귀여운 레이디를 폭탄 취급해?
게다가 마사가 말끝마다 ‘착했던 아가씨가’, ‘그렇게 착했던 분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인성도 괜찮은 아가씨였던 거 같고.
이 오징어들이, 허허 참 나, 어이가 없네.
황제도 황제지만, 그 황태자란 놈.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이미 죽었다니 앞으로도 볼 일이 없는 그 화상.
제 맘대로 사람을 갖고 놀아? 명도 짧은 주제에.
치욕으로 당분이 절실해진 자강은 남은 초콜릿 무스를 입에 쓸어 넣었다.
“그나저나 여기 빵이랑 디저트 맛 끝내 주네.”
대체 초콜릿 무스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혀가 쩍 붙도록 달지만 그저 달지만은 않아.
나중에 파티시에를 불러서 꼭 칭찬해 줘야지.
자자, 당 충전했으니 가자, 알레스!
* * *
황제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알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수정 같은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알레스가 결정을 바꾸고 싶다며 알현을 청하였다기에 그는 속으로 거만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정신이 돌아오고 보니 역시 후궁 쪽이 나았나 보군.
하지만 알레스의 요청을 들은 아가판투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기록을 없애 달라는 말 취소하고 싶습니다. 결혼과 이혼 사실을 문서로 확실하게 남겨 주세요. 제가 이혼녀라는 걸 언제 어디서든 증명할 수 있도록.”
이혼을 선택한 걸 번복하려는 게 아니라 더 명확히 하겠다?
무슨 꿍꿍이지?
“이유가 뭐냐?”
“그게….”
돈 벌어야 한다고 말하긴 구차하고.
어찌됐든 전남편인 셈인데, 알레스는 왠지 꿀리기 싫었다.
“뭐, 그냥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어서요. 제가 이런 쪽으로 좀 결벽증이 있어서.”
우와, 이 포장술 좀 보소.
알레스는 제가 말해 놓고도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닌 척하기도 싫고 비겁하게 숨기기도 싫어요.”
어때? 이 누님 분위기 좀 쩔지?
이제 와서 반하진 마라.
아가판투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앞으로 평생 수절하겠다는 뜻인가? 계약서뿐인 관계였다 해도 황제의 여인은 재가할 수 없는데?”
언제는 후궁도 싫다더니, 평생 내 뒷모습만 보고 살겠다는 거야 뭐야.
그래도 황제랑 혼인한 적 있는 여자라고 과시하고 싶은 건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군.
아가판투스가 착각에 빠져 있을 때, 알레스는 마사가 일러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준비했다.
알레스는 계획한 말을 침착하게 옮겼다.
“엄밀히 말해 저는 황제 폐하와 혼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와 하였나?”
“대공 전하와 하였지요. 폐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되신 폐하와 저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저는 제 분수에 맞는 분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대가 결혼하고 이혼한 건 대공이다?”
사실 알레스로서는 재혼할 생각도 없고 재혼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였기에 황제와 이혼하든 대공과 이혼하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유모, 자유연애를 옹호하는 급진적 유모 마사가 눈물로 호소한 소원이었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마사는 현재 자기 수중에 있는 유일한 인재이니까.
그나저나 왜 저 따위 게 소원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그대 말은, 대공 시절의 짐과 결혼하고 이혼한 사실을 문서로 명시해 달라?”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또 번복하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아주… 복잡하게 사는군.”
황제 양반, 사람이 돈 없으면 이렇게 인생이 피곤해지는 법이오.
애초에 가문에 돈이 있었으면 잘못된 정략결혼으로 여기까지 오는 피곤한 일도 없었겠지.
그 구질구질한 사정을 황제 양반 같은 다이아몬드 수저가 알겠소?
알레스는 입을 앙다물었다.
여하튼 자존심도 챙기고 실속도 챙기고 내 사람도 챙기려면 이 방법밖엔 없다고.
아, 돈만 있었어도.
‘꺼져.’
이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뭐 할 수 없지. 확실한 이혼녀 신원 보증을 받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