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벌어먹느냐 얻어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당분간 어디서 지내면 좋을까? 로즈마리 궁이 좋겠군.”
이제 그만 치워야겠구나.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
황제의 솔직한 속내였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식당 밥이 맛있는 곳으로 해 주세요.”
자강의 속내는 더더욱 솔직했다.
어차피 내 집 될 것도 아니고. 잘 먹고 푹 쉬다 가야지.
바야흐로 각지의 고위 귀족들이 대회의장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아가판투스 황제는 일부러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를 대회의장으로 호출한 참이었다.
이미 대거 숙청된 황태자파의 앞날이 어떻게 변하는지 다른 귀족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황제의 의도는 제대로 먹혔다.
이혼에 밥 타령을 하고 있는 귀부인의 광기 어린 모습은 참혹했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자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찼다.
새로운 황제는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군.
당분간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런데 수군거리는 귀족들 사이에서 황제와 알레스의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심해처럼 깊고 푸른 눈이 한참 동안 알레스에게 못 박혔다.
그 암청색 눈에 이채가 반짝인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엄격한 입가에 쏜살같은 미소가 스친 것은 그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 * *
“역시 탄수화물은 사랑이야.”
식탁 가득 놓인 윤기 좌르르한 빵들과 초코칩이 뿌려진 쿠키들.
그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콧속 가득 흡입한 자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황제가 지시한 대로 로즈마리 궁에 둥지를 튼 자강은 곧장 식사부터 요청했다.
애매한 시간대였는지 주방 하녀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를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기에 만들어 놓은 빵이나 쿠키 같은 거라도 내놓으라고 했다.
‘아, 이 아이들 중 어떤 녀석부터 귀여워해 준담?’
행복한 고민에 몸서리치던 자강은 초승달 모양의 담백하고 폭신한 빵에 손을 뻗었다.
안쪽에 살짝 버터를 바르고 소금으로만 간을 해 노릇하게 구운 빵이었다.
이런 단순한 빵이 제빵사의 솜씨를 보여주는 거거든.
한입 베어 문 자강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꿈인데도 놀라울 만큼 맛과 식감의 밸런스가 훌륭했다.
‘여기, 빵 맛집이었잖아!’
이곳으로 오기 전, 양자강으로 살 때부터 그녀는 식탐이 많았다.
욕심 많은 여자 아니랄까 봐 식탐까지 있다며, 직장 동료들은 자강을 악녀, 마녀 외에도 거지라고 불렀다.
인성 거지, 양심 거지, 품위 거지, 수치심 거지 등등 거지 앞에 붙는 수식어는 상황 따라 다양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자강은 밥만 잘 먹었다.
점심시간이든 회식 자리에서든 보란 듯이 잘 먹는 자강의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식욕은 그녀만큼이나 뻔뻔했다.
누군가는 자강이 일부러 그러는 거라며 분개했지만, 딱히 사람들과 신경전을 벌이려는 의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먹는 거밖엔 낙이 없었을 뿐.
인간이 지닌 주요한 욕구 중 자강에게 허락된 건 식욕뿐이었다.
일명 ‘3포 세대’로 일컬어지던 자강에게 성욕은 사치였고, 흙수저로 성공을 거머쥐려면 수면욕쯤은 기꺼이 반납해야 했다.
물론 체질적으로 타고난 대식가이기도 했고.
여하튼 밥은 자강에게 언제나 중요했다.
밥그릇, 밥심, 밥벌이, 밥줄 등.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밥값’이었다.
‘밥값은 하자.’
그게 자강의 신조였다.
스스로 충분히 밥값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먹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실제로 자강은 누구보다 열심히 밥값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그런 자강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말은 ‘밥벌레’, ‘식충이’였다.
밥만 먹고 밥값은 떼먹는 가증스럽고 경멸스러운 것들.
그에 비하면 악녀나 거지는 얼마나 훌륭한가.
?성격이 얼마나 지랄맞으면 저렇게 먹고도 살로 안 가는 거야? 하여간 독한 년.?
사람들이 못마땅해하던 또 한 가지.
대식가 자강은 마른, 아니 깡마른 편에 속했다.
하지만 자강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선행보다 악행에 더 많은 열량이 소모된다고.
특히 악행엔 탄수화물이 필수였다.
독한 짓, 모진 짓, 야비한 짓을 한 후엔 반드시 탄수화물을 섭취해 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으니.
그렇게 긍정 마인드로 속을 빵빵하게 충전해야 지속 가능한 악행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겐 야박하게, 자신에겐 관대하게.
악녀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살찌지 않는 비결?
간단했다.
양껏 먹고 더 양껏 패악을 부리면 된다.
그 와중에 쌍욕이라도 듣는다면 더 확실하고.
쌍욕은 수명 연장과 다이어트에 두루 도움이 되는 악녀의 쌍화탕이랄까.
그 찰지면서도 깊고 진한 원한의 풍미란. 한번 맛들이면 끊질 못한다.
아차차, 영업 비밀을 너무 떠들어댄 거 같은데?
하여튼 이렇게 식탐 많은 자강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빵을 맛보고선 침샘이란 것이 폭발하고 말았다.
악녀 자강이 남몰래 좋아하며 사족을 못 쓰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맛있는 거’였다.
‘와, 꿈인데 이렇게 맛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아 진짜, 미쳤다 정말.’
이렇게 깨방정을 떨며 급하게 오물거리다 그만.
콰득.
자강은 제 혀를 깨물고 말았다.
얼마나 야무지게 깨물었는지, 혀가 두 동강 나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혀를 강타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아까부터 옆에서 서성거리던 여사님이 자강을 얼싸안으며 흐느꼈다.
“불쌍한 우리 아가씨! 지금껏 잘 참았어요. 정말로, 정말로요. 이제 참지 마세요. 맘껏 울어도 돼요.”
네? 아프긴 하지만 혀 좀 깨문 걸로 울면 꼴불견 아닐까요?
그나저나 여사님은 왜 우시는 건지.
‘어휴, 정신이 번쩍 드네. 그런데… 이거 꿈일 텐데?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거야? 꿈인데?’
자강은 이럴 때 취하는 공식 행동인 볼 꼬집기를 해 봤다.
“아파….”
자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프신 게 당연하죠. 저도 이렇게 아픈걸요.”
여사님, 제발.
자강은 여사님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건 진짜 눈물이었다. 그것도 매우 염도가 높은.
덴장, 이게 다 뭐지?
지금 이게 꿈이 아니면, 그럼 양자강으로 살아온 삶이 꿈이냐?
그게 꿈이라기엔 너무 디테일한 대하드라마인걸.
주인공이 계속 나락으로 곤두박질만 쳐서 시청자가 다 하차해 버린.
내가 나비 꿈을 꾸는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건지… 가 아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자강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여사님. 혹시 제가 오랫동안 잠에 빠졌던 적이 있나요?”
아무래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인 듯해 자강은 물어봤다.
“네?”
“그러니까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거나 며칠 내리 잠만 잤다거나.”
“아가씬 늦잠 한번 자본 적이 없는 걸요. 그나저나 여사님이라뇨. 마사잖아요. 아가씨의 유모.”
마사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자강은 저런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인정 많고 뚝심도 있는 데다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다 알고 있는 사람.
“저기 마사 씨, 내가… 누구죠?”
마사는 놀란 듯했지만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일자로 앙다물었다.
‘아가씨는 지금 심신이 많이 미약하신 상태야.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허둥대면 안 돼.’
마사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가씨는 페레티 백작 가문의 영애시고 존함은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백작이면 귀족 같은 거예요?”
“그럼요, 당연히 귀족이시죠. 그러니까 말씀 낮추세요.”
“귀족이면 지위도 높고 돈도 많고 그런 거죠? …아니, 그런 거지?”
오! 괜찮은데? 그렇다면 나도 이제 불로소득이란 걸 만져 보는 거야?
“그렇기는 한데… 가문이 좀 어려워져서요. 작위를 팔까 정략결혼을 할까 고민하다 여기까지 오시게 된 거거든요.”
마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제가 쫓겨날 각오로 끝까지 아가씰 말렸어야 했는데. 역시 정략결혼은 아니었어요.”
작위 매매나 정략결혼?
그나마 방금 이혼해서 그중 하나는 걷어찬 상태고.
어째 막장까지 간 느낌인데?
“설마 돈이 없어?”
“당장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지만… 아까 아가씨가 황제께 저택이랑 마차랑 또 다른 것도 뜯어, 아니 요구하신다고…. 가문의 형편을 생각한 말씀 아니셨나요?”
귀족인데 돈이 없다고?
이거 무늬만 귀족이지 완전 빈 깡통이잖아!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금수저는 무슨….
자강의 기분이 저조해진 줄도 모르고 마사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무척 놀랐고 걱정도 됐지만 솔직히 아가씨가 대견하기도 했어요. 제 표현이 외람되다면 용서하세요.”
안타까울 정도로 착하기만 한 주인 아가씨로선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횡포였을 텐데.
생전 처음 겪는 일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와중에도 살길을 놓지 않으시다니.
마사는 또 울컥할 뻔했다.
역시 닥치면 어떻게든 해내는 법인가.
“특히나 기록을 지워 달라고 황제께 요청하실 땐 제가 아는 아가씨가 맞나 했다니까요.”
우리 아가씨에게 그런 야무진 면이 있었다니.
“아가씨 성격에 직접 사업 같은 걸 하실 리 없으니 말씀 잘하신 거예요.”
“…무슨 뜻이지?”
“아, 귀족 영애와 부인들은 원래 수익을 내는 사업은 못 하게 돼 있잖아요. 자선사업 같은 건 몰라도. 그런데 이혼한 경우엔 허용이 되나 보더라고요.”
제국의 관습에 따라 이혼한 귀족 여성은 반강제로 가문에서 독립해야 했으니, 먹고 살기 위한 형식적인 방편을 열어 둔 셈이었다.
“가만, 그럼 나는 이혼했지만 이혼녀가 아닌 거야?”
“문서상 그렇지요. 아가씨가 잘 대처하신 덕분에.”
“아까 가문이 폭삭 망했다며? 그럼 나라도 이혼녀가 돼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마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답답하다는 듯이 속닥였다.
“아이참, 아까는 영리하게 손을 다 쓰시고선?”
응? 무슨 소리지?
수상한 눈빛을 마구 쏘아대며 눈짓하는 마사.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자강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힘들게 벌지 말고 황제한테 왕창 뜯어내자는 얘기야?”
“예. 그런 뜻 아니셨어요?”
마사가 되레 커다래진 눈으로 알레스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니, 순박하게 생긴 양반이?
신분제 시대에 유모직에 종사하는 사람치고는 사상이 매우 급진적이잖아?
알레스의 탈을 쓴 자강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다.
“이혼녀가 돼서 직접 돈을 벌거나 위자료로 한몫 단단히 챙기는 거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어?”
그 질문에 마사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어머, 당연히 다른 방도를 찾아야죠.”
“그, 그렇지?”
“아무리 폐하께서 섭섭지 않게 해 주마 하셨어도 한도가 있을 테니 저흰 저희대로 대비를 해야죠.”
“황제도 한도 초과가 있어?”
“대신들과 다른 귀족들이 아가씨께 호의적이지 않을 테니까요.”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제 발로 나가 준다는데 지금.”
“아가씨한텐 황태자파란 꼬리표가 붙었으니까요!”
“그거 불리한 거야?”
마사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무척이요. 묻어 버리고 싶은 자가 있으면 황태자파라고 밀고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