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군의 위자료를 굴려보자 >
1화
미친 여자에게 일일삼식을
“후궁이 되겠느냐, 아니면 이혼해 줄까?”
자강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내 운명에 수맥이라도 흐르니?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번번이 물을 먹을 순 없는데.
후궁, 이혼.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다짜고짜?
눈앞의 남자는 위압적이면서도 비릿한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둘 다 썩은 동아줄인걸, 어디 한번 잘 골라 보라고 선심 쓰듯 말하는 저 면상.
아니, 애초에 왜 항상 너희들이 내미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두 사람 주위로 잔인한 흥미를 드러낸 눈동자들이 번뜩이고 있다.
요 며칠 재수가 없더니만, 꿈자리마저 사납네.
“이렇게 돼서 유감이지만, 세상엔 격이라는 게 있지 않나. 알다시피 그대는 이제 짐과는 격이….”
남자가 ‘뭔 소린지 알지?’ 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 그러세요? 노는 물이 다르세요?
“대신 뭘 선택하든 섭섭지 않게 해 주지. 나 크루그 제국의 황제 아가판투스 아메시스트 맥켈란의 이름으로.”
뭐? 황제? 아가미 황제?
아무리 꿈이라지만 자강은 자신의 정신세계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온몸에 보석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남자의 차림새도 그렇고, 말도 안 되게 길고 혀 꼬이는 이름도 그렇고.
자신의 무의식 어디에 저런 민망한 것들이 숨어 있었던 걸까?
좀 무서워지려고 그런다.
“선택해 봐라.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
이거 지금 내 이름인 거니?
제대로 듣지 못한 자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해괴한 차림을 한 저 인간, 어딘지 고 부장을 닮았다.
어이없게도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였지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저 눈빛이며, 특히 인위적으로 모양을 낸 저 구레나룻이.
확 뜯어버릴까?
늘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일을 꿈에서나마 저질러 봐?
안 그래도 부글부글하던 차에 너 잘 걸렸다.
남자의 금빛 찬란한 구레나룻을 노려보던 자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저 끔찍한 털을 움켜쥐면 내 손만 더러워질 거야.
자강은 며칠 전 해고당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온갖 비위를 다 맞춰 주고 갖은 똥을 치워 줬던 상사에게 제대로 뒤통수 맞은 날.
정리해고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자강은 배신감과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강을 괴롭힌 건 따로 있었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저한테는 회사가 전부예요. 아시잖아요.?
부당하다고, 제대로 된 이유를 대 보라고, 이대로는 못 나간다고, 부숴 버릴 거라고!
독하게 따지지도, 악다구니를 쓰지도 못하고 끝까지 비굴했던 모습.
전 직원이 한마음으로 미워했던 악녀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나 한심하고 시시한 모습이었다.
자강은 꿈에서라도 제대로 만회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의 후회가 이런 황당한 꿈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부끄러운 설정이라니, 충격이 크긴 컸나 보다.
고 부장, 아니 그 곰팡내 나는 고 씨 아저씨한테 저런 눈부신 금발에 자수정처럼 고혹적인 눈동자가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황제씩이나 시켜 주다니. 분하다.
자강은 정신 건강을 위하여 꿈에서나마 침착하게 실속을 챙기자 싶었다.
“레이디 페레티?”
이번엔 황제 옆에 서 있던 얍삽하게 생긴 남자가 재촉하듯 자강을 불렀다.
알았다구, 닦달 좀 하지 마.
자강은 우선 짝다리를 짚었다.
지나치게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제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아쉬워서 저자세람?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다.
최대한 건방지게.
기선 제압이다!
하지만 자강의 다리는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혼으로 할게요.”
짜장으로 할게요, 후라이드로 할게요, 물냉으로 할게요, 찍먹으로 할게요… 정도의 톤으로 자강은 말했다.
아니지.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꽤나 치열한 고민을 필요로 하는 중대 사안이다.
그에 비하면 후궁과 이혼 중 고르는 건 고민할 거리도 못 되지!
“레이디? 긴장하셨나요? 잘못 말씀하신 것 같은데?”
방금 그 얍삽이가 되물었다.
자강이 이혼을 고르자 위풍당당하던 고 씨 황제의 미간에도 주름이 생겼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오만함 대신 의문이 서렸다.
사실 여기 있는 모든 이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가 후궁을 고를 것임을.
저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가 어떤 여자인가.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다 무너져 가는 가문의 영애라 황태자가 일부러 대공과 짝 지운 여자.
미색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지만, 늘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아둔해 보이던 여자였다.
무난하고 얌전하여 눈에 차지도 거슬리지도 않는, 방 한구석에 장식품으로 세워 두면 딱 좋을 만한 여자였다.
물론 그녀가 거기 있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겠지만.
그래서 주변의 예상을 벗어나는 건 결코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이혼이요, 이혼!”
알레스가 좀 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파인지, 곧 무시무시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알레스의 선택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불행을 구경하러 왔을 뿐.
하지만 장식품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불행이었던 걸까.
아무래도 그녀가 정신줄을 놓은 것 같다.
“아가씨….”
함께 입궁한 유모가 놀란 듯 비통한 듯 감격한 듯 묘하게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긴,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겨우 이틀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황궁을 뒤엎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제도 전체가, 아니 제국 전체가 들끓었다.
식을 올리는 둥 마는 둥 하던 대공이 그날 밤 황제가 되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혼인 서약을 했던 그는 다음 날 급히 입궁한 알레스에게 정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하더니, 이제 후궁이 되든 이혼을 하든 선택하라고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범한 귀족 영애의 삶에 들이닥친 느닷없는 광풍이었다.
그녀의 박복함이 조금 안되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런 세력도 없는 집안의 여식에겐 후궁 자리도 감지덕지지.
그런데… 이혼을 하겠다?
“저…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아까 섭섭지 않게 해 준다고 했죠?”
자강의 말에 고 씨 황제의 얼굴에 황당함이, 얍삽이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러게 누가 함부로 이름 걸래?
그것도 그렇게 긴 이름을.
자강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죠? 위자료는 정정당당하게. 적당히 퉁치려는 생각 마시고. 세부 목록은 충분히 생각하고 깨알같이 작성해서 변호사 통해 보낼게요.”
뭔가 악착같이 받아내고 싶지만 이혼은 처음이라….
자강은 시간을 조금 벌기로 했다.
꿈속에서 시간을 벌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참, 위자료와 별개로 결혼과 관련한 기록은 싹 지워 줘요. 전부 무효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깨끗하게 없었던 일로!”
미쳤다.
알레스 에스메랄다 페레티가 결국 미쳐 버렸다.
비록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황태자의 도구가 되어 감히 잠자는 맹수를 옭아매려 한 여자에게 적절한 응징을 하려 했을 뿐인데.
묘하게 번쩍이는 그녀의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딱 광녀의 그것이었다.
“…알겠다. 약속대로 하지.”
미친 여자에게 자비를.
갑자기 찜찜해진 황제는 그녀를 얼른 치워 버리고 싶어졌다.
훗, 상대의 심리 변화를 알아챈 자강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먼저 피하는 쪽이 지는 거지. 버티기 작전이다.
“참, 살 집이랑 짐 옮길 차가 준비되기 전까진 여기서 한 발짝도 못 움직입니다.”
짐부터 빼는 건 하수가 하는 짓이지.
전 회사에서도 홀라당 짐부터 빼는 게 아니었다.
책상을 치울 때까지, 아니 책상을 치우면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해서 버텼어야 했다.
호락호락 나와 준 게 분했다.
“알겠다. 빠른 시일 내에 저택과 마차부터 배정하지.”
“섭섭지 않게요.”
“섭섭지 않게.”
그리고… 뭘 더 뜯어내지?
자강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다.
이놈의 꿈이 계속되고 있으니 뭐라도 해먹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딜을 가만히 곱씹어 보니 한풀이로는 여러 모로 성에 차지 않았다.
위자료와 집과 차가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꿈이 계속될지도 모르겠고.
보통 꿈에선 적당히 쾌적한 화장실 하나 찾는 데도 헤매고 또 헤매잖아?
잘못하면 입금된 위자료를 찾으려고 계좌 비밀번호만 수백 번 누르다가 끝날 수도 있다.
즉각적인 만족, 꿈에도 ‘소확행’이 필요해.
“참, 여기서 지내는 동안.”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황제가 다시 들려온 알레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황제인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에메랄드 눈동자가 아까와는 또 다른 빛을 뿜고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 강렬하고 진지하고 뭔가 집념에 불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걸까?
“일일삼식에 오후 간식 1회, 야식 1회, 주류 1병 제공을 요구합니다.”
미간을 좁힌 그녀가 매우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설마, 먹을 걸… 안 줄까 봐?”
어이가 없어진 황제가 헛웃음을 치려는데, 그녀가 급히 덧붙였다.
“참고로 호텔 조식 선호하구요, 오후 간식엔 커피나 음료 포함이 상식이죠. 참, 반주는 주류 1병에 포함시키지 않는 센스.”
검지를 세운 채 강조하는 알레스를 황제는 황당한 눈으로 훑었다.
광인들이 비정상적으로 먹는 거에 집착한다더니.
제국의 귀족 영애와 귀부인들은 새 모이만큼 먹었다.
그들에게 음식이란 패션과 같은 거였다. 티파티나 연회에 어울리는 액세서리 정도랄까.
저렇게 음식을 진심으로 먹자고 덤비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뭐라는 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 반이고.
황제의 입에서 곧장 오케이가 떨어지지 않자 알레스의 표정이 스산해졌다.
“섭섭지 않게 해 준다더니. 먹는 걸로 빈정 상하는 것만큼 원한을 남기는 일도 없다던데….”
옆에서 유모가 또 손수건을 물고 울음을 삼켰다.
입 짧은 아가씨가, 먹는 데 관심이라곤 가져 본 적 없던 아가씨가!
건강이 걱정되어 늘 조금만 더 드시라 잔소리하는 게 제 일이었는데.
오늘따라 전에 없던 식탐을 드러내신다. 말도 너무너무 잘 하시고.
“그 요청 또한 받아들이지. 이번에도 섭섭지 않게 해 주면 되는 건가?”
잠시 기막혀하던 황제가 표정을 가다듬고 대수롭지 않은 척 수락했다.
이제 막 대업의 첫발을 내디딘 상황에 걸신들린 광녀의 원한 같은 걸 사고 싶진 않으니까.
황제가 수락하자 자강은 속으로 어깨춤을 췄다.
꿈이니까 마음껏 식탐 대방출!
‘황궁 음식이란 어떤 걸까? 설령 맛을 못 느끼더라도 형형색색 어여쁜 모양새를 보며 눈요기는 할 수 있잖아?’
자강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오직 맛있는 것들에게만 내어주던 상냥한 미소가 방심한 사이 흘러나온 거였다.
황제가 흠칫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어찌 이 상황에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웃음이란 자고로 사회적 예의를 갖추기 위해,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어떤 의도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도 아니면 상대를 속이기 위해 짓는 것이거늘.
저토록 무방비한 웃음이라니.
참, 저 여자는 지금 제정신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