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우상’ 본상 시상식은 이제 지음사 본사에서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조만간 종합운동장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민우가 식장으로 입장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식장엔 한국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명사들이 민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민우는 보이는 족족 고개를 숙이며 그 성원에 화답했다.
미리 준비된 자리에 도착했다. 그곳엔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왔냐?”
특별석에는 서지훈과 송승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민우를 바라보는 두 눈만큼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원고 진척 상황은 어때요?”
송승현이 물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까지 원고 독촉을 할 줄은 몰랐다. 민우는 제발 한 번만 봐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얼마를 먹든 송승현은 무서울 것 같았다.
“박 선생!”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어?”
“다시 강단으로 돌아간다면서? 벌써 소문이 쫙 퍼졌던데.”
너무 많은 질문이 한 번에 쏟아졌다.
동시에 민우의 시야가 가득 찼다. 스무 명에 달하는 휴머니티 멤버들이 다 같이 몰려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이제는 나이를 속일 수 없어 보였다. 흰머리와 주름살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휴머니티를 세계 제일의 지식 커뮤니티로 키워내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는 하나둘 은퇴하며 후임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상황이었다.
“이야, 우리 박 선생! 못 본 사이에 폭삭 늙었네?”
“누가 할 소리를.”
한진섭이 너스레를 떨었다. 세계여행을 떠났다던 한진섭과 주예린은 소리소문없이 시상식에 참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차민재 선생이 명인대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어쩜 그렇게 인재를 쏙쏙 빼 가세요?”
약간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정연주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청문대를 키워내고 있었고,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곁에는 이제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고 있는 유진태 실장이 있었다.
“하, 참. 어딜 가나 박민우 타령만 하고 있으니 못 봐주겠네. 꼴사나운 일이야.”
“메로나 먹고 싶다…….”
서강일과 강민희의 모습도 보였다. 한일대를 나온 두 사람도 이제 국문학계의 거목이 되었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 안색이 좀 안 좋아지신 거 같은데. 잠깐 봐 드릴까요?”
“조명이 어두워서 그래.”
“아, 그래요?”
이소윤과 양지모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은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명인대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때 익숙한 아랍어가 들려왔다.
「하여간 한국에는 마음에 드는 이벤트 홀이 없어! 이 코딱지만 한 곳에서 어떻게 행사를 치르는 거야?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는 게 좋겠어. 어때?」
자얀도 함께였다. 한껏 나이가 든 그였지만 선글라스를 아주 능숙하게 소화해냈다.
「드디어 난제의 해결점을 찾았소. 이제 곧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의 비밀이 풀릴 것이오.」
세드릭도 여전했다. 민우는 사뭇 기대되었다. 그를 근 30여 년간 괴롭힌 세기의 난제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까 싶어서.
「민우 씨! 이제 대학으로 돌아온 거죠? 이제는 좀 같이 산책도 하고 와인도 마시면서 놀자고요!」
매번 놀 생각만 하는 미셸도 여전했고.
“이번에도 연말 파티하는 거죠? 근사한 와인 준비해 놓을게요.”
셀린느도 여전했다.
그 밖의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민우와 어울렸다. 한 사람씩 모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버지.”
딸 윤아가 손을 흔들었다. 벌써 다섯 살이 된 손자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냅다 뛰어와 품에 안겼다.
“다정아. 할아버지 힘들어. 그만 내려오렴.”
이수빈이 타일렀다. 다정이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민우의 어린 시절을 똑 닮았다.
그때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민우는 이수빈과 나란히 앉았다. 그 뒤로 민우의 동료들이 넓게 포진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 표정을 읽은 이수빈이 웃으며 말했다.
“참 꿈만 같지 않아요? 이 모든 것, 당신이 만든 거예요. 당신은 아니라고 하겠죠. 다 같이 만든 거라고. 하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푹 빠져있다는 거.”
“그래. 꿈만 같은 일이야. 가끔은 겁날 때도 있어. 꿈에서 깨어나면 석사 1학기 시절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때 이수빈이 민우의 팔을 꼬집었다.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팠다.
“무슨 짓이야?”
“꿈 아니라는 거 알려주려고요. 같이 즐겨요. 이 순간이 흘러가기 전에.”
피식 웃은 민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무대로 옮겼다.
* * *
“할아부지!”
꼬마 아이가 노인을 불렀다. 책상에 앉아 있던 노인은 두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 주었다. 아이는 이 연구실을 참 좋아했다.
“엄마는?”
“바빠서 안 놀아줘. 할아부지가 놀아줄 거라고 했어.”
“그럼 같이 놀자꾸나.”
노인은 손자와 한참을 어울렸다.
하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손자가 지쳐 잠든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노인은 소파에서 잠든 손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제 슬슬 정리할 때가 됐구나.’
노인은 서랍을 열고 필통과 원고지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연구실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중앙도서관이었다. 게이트에서 직원 카드를 태그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원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진정하라며 손짓했고, 곧 걸음을 옮겨 대출실 사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서의 반응도 경비원과 비슷했다. 그는 노인을 보며 깜짝 놀랐다.
“교수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전화 주셨으면 업무 도와드렸을 텐데.”
“전화로 이야기할 만한 일은 아니라서 직접 왔네. 미안하군.”
“아유, 아닙니다. 무슨 일이실까요?”
사서는 긴장했다. 눈앞의 노인은 이 대학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다른 건 아니고, 보존서고에 좀 들어가고 싶은데.”
“보존서고요? 거긴 어쩐 일로…….”
“찾고 싶은 책이 있네.”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녀올게요. 먼지가 많아서 좀 힘드실 수도 있어요.”
“괜찮네.”
노인이 간단히 끊자 사서는 어쩔 수 없이 열쇠를 챙기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자물쇠를 열었다.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사용 후에 올라오셔서 말씀해주시면 제가 정리할게요.”
“고맙네.”
사서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고, 노인은 천천히 보존서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은 변했지만 이곳은 그대로군.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노인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떤 지점에 도착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필통을 열었다. 그 안에는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안경과 만년필, 그리고 원고지 뭉치를 그곳에 내려놓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노인이 그곳을 떠났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그가 물건을 남긴 바로 그곳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아낸 듯한 황홀한 빛무리였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보존서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학자, 박민우.
그가 남긴 물건은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 <프로페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