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99화 (499/500)

모든 업무를 마친 민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저녁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어? 오늘 학원 안 가는 날이던가?”

“이젠 집에서 해도 될 거 같아요. 학원은 좀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훌쩍 자라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윤아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딸의 공부법은 독특했다. 필기하지 않고 편한 자세로 책만 읽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천재라고 난리다.

이미 실력은 입증되었다. 전국학력평가에서 늘 이과계열 수석을 차지하고 있다.

민우와 이수빈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 윤아는 명인대 의과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옵션은 다양했다. 이미 세계 명문대에서 입학 권유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명인대가 있는 이상 윤아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다.

“준비는 어때?”

“순조로워요. 그래도 떨어지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떨어지면 어쩔 생각이니?”

“모델이나 할까 싶어요.”

민우는 웃었다.

모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윤아도 아무나는 아니었다. 이수빈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니까. 자신감이 보기 좋았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해. 네가 의학을 전공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지.”

“실은, 좀 고민이긴 해요.”

“뭐가 고민인데?”

“의사가 되겠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꿈이잖아요. 이 꿈이 진짜 제가 원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어린 마음에 소윤 언니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윤아는 어려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실존의 문제다.

하지만 민우의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소윤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면 제대로 본 거야. 적어도 만들어진 꿈은 아닐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소윤이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의사거든. 어리긴 했지만 너는 그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본 거고. 그럼 답 나온 거지.”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윤아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의미가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윤아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그때 주방에서 이수빈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어서 와서 저녁 먹어요. 윤아 넌 책 놓고 와. 밥 먹으면서 책 보면 혼난다.”

“알았어요.”

민우는 식탁에 앉았다. 세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윤아는 수험생이었고 이수빈은 최근 대외협력처장 보직을 맡았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으면 모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아 참, 영부인께서 선물 보내셨어요. 좋은 약재가 들어왔다고 탕약 만들어서 보내셨더라고요.”

맛있게 숟가락을 뜨던 민우가 흠칫했다. 이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거 매형네 집에도 가지 않았어?”

“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민우는 숟가락을 놓고 탄식했다. 조만간 지음사에서 신간 계약서가 날아올 게 분명했다.

서지훈이 대통령이니 영부인은 당연히 송승현이다. 지음사의 일을 모두 정리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쪽으로는 영향력이 크다.

탕약을 보냈다는 건 신간 원고 독촉의 의미다.

“그거 뇌물이야. 앞으론 받지 마.”

“챙겨주시는 건데 어떻게 거절해요? 그냥 먹으면 되지.”

“말이 쉽지.”

“어차피 내가 고생하는 거 아니잖아요. 귀한 와이프 보직교수 만든 벌이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윤아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민우는 여전히 잡혀 살고 있었다.

“보직교수가 무슨 벌칙이라도 돼?”

“애들 논문 봐주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일 시키니까 그렇지! 콱 그냥 내년에 안식년 신청할까 보다.”

“…….”

민우는 입을 꾹 다물고 수저를 떴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이수빈에게 물었다.

“주님이랑 섭섭이는 요즘 연락 없어?”

“없죠. 세계여행 중인데 노느라 정신없지 우리한테 연락이나 하겠어요? 정말이지 부러워 죽겠다니까. 남편 잘 만나서.”

“남편이 아니라 아내를 잘 만난 거 아니고?”

“아, 그러네?”

얼마 전, 주예린과 한진섭은 명인대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홀연 세계여행을 떠났다. 아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나 뭐라나.

“우리도 여행 좀 가요. 내년에 윤아 대학 들어가면 휴가 좀 내서.”

“그럴까? 윤아 너 가 보고 싶은 데 있어?”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여행에 별로 관심이 없는 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두 부모는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명인대 도서관 보존서고요. 아빠가 거기 좋다고 늘 그러셔서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하, 그럼 그렇지…….”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이수빈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며 민우는 식사를 계속했다.

에필로그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모든 게 변했다. 풍경도, 사람도.

민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총장님. 정말 아쉽지만 이제 보내드려야겠네요.”

“고맙네.”

직원들이 건네는 꽃다발을 받으며 민우는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일곱 번의 총장 임기가 모두 끝났다. 민우는 7선 총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말 그대로 명인대의 황금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8선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민우는 연임을 단념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강단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별은 아니잖아요? 내년부터 다시 교수로 활동하시잖아요. 연구실에서 종종 뵐 수 있겠어요.”

“오면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 드리지.”

“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총장직은 끝났지만, 민우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명인대 이사회에서 민우를 명예교수로 추대한 것이다.

민우는 굳이 그 자리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네. 고마웠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나도 늙은 것 같군.”

“그런 말씀 마세요. 총장님은 여전히 정정하시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신임 총장한테나 하시게.”

민우는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대학본부를 나섰다.

이제 그가 돌아갈 곳은 한 곳뿐이다.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교수들과 부대꼈던 인문관 연구동으로.

대학 측의 배려 덕분에 민우의 연구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규모 도서관 정도로 활용되어 대학원생들이 세미나실로 쓰기도 했다.

민우는 오랜만에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셨어요?”

어느새 중년이 된 수제자가 민우를 맞았다. 그는 예전에 민우가 그랬던 것처럼 손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청문대 선생이 남의 학교엔 무슨 일인가?”

“무슨 서운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남이 들으면 배신자인 줄 알겠네.”

예전의 차민재가 아니었다.

오랜 해외 생활이 그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제는 민우에게 농담을 던질 정도로 유쾌해졌다.

“그럼 배신자 아니었고?”

“아시잖아요. 저 도전하는 거 좋아하는 거. 조만간 명인대로 자리 옮길 겁니다. 선생님께서 받아주셔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죠.”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어. 너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

“아직 확신이 안 서서요.”

“무슨 확신?”

“이제 저도 제자를 키워야 하는데, 선생님처럼 잘해 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요.”

“무슨 약한 소리를 하고 있나?”

짓궂게 웃은 민우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자신이 만든 커피보다 훨씬 풍미가 깊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일까? 아니면…….

“선생님?”

“아, 미안하네. 요즘 잠깐 멍해질 때가 있어서.”

민우는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고?”

“역시 선생님 눈은 못 속입니다. 하아,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대학원을 권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결국 그걸 선택하는 것은 제자의 몫이지.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그러니 마음 편히 갈 길 가시게.”

“선생님은 정말 언제나 태평하셔서 부러워요.”

“그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두 사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내일이죠?”

“그래. 내일이지. 벌써 20년도 훨씬 넘었구나. 참 꿈만 같은 일이야.”

내일은 ‘박민우상’ 시상식이 열린다. 이제 몇 해만 지나면 30주년을 맞이한다.

그 사이 ‘박민우상’ 수상자들은 인류 문명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그래서 이제 세계 지식인들은 노벨상보다도 ‘박민우상’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덕분에 민우는 이제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윤아도 내일 같이 간다고 들었는데.”

“바쁜 녀석이 웬일로 시간을 낸다더구나.”

“다른 선생님들도 오실 거고. 오랜만에 다들 모이겠어요. 기대됩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점차 아련해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