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후
“박 총장님. 이제 4선을 앞두고 있는데요. 만약 내년에 연임에 성공하게 된다면 명인대 최초의 4선 총장이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경한신문에서 나온 젊은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민우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나이가 들다 보니 예전처럼 당차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됐다. 밤하늘처럼 까맣던 민우의 머리에도 어느새 흰 머리가 듬성듬성 자라나고 있었다.
젊은 혈기로 쌓은 지식은 이제 지혜가 되었다.
민우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 명인대 총장이 된 이후로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총장직을 두 번이나 연임했고, 지금이 세 번째 총장 임기 중이었다.
내년에 세 번째 임기가 완료되지만 민우는 은퇴할 생각이 없었다.
11년이 지났다고 해도 이제 지천명을 앞둔 나이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했다.
덕분에 명인대는 말 그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전 세계의 명사들이 모이는 곳. 꿈을 품은 학생들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학문의 요람. 그리고 누구나 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는 멋진 무대.
그 11년 사이 꿈만 같았던 모든 일들을 민우는 착실히 이루어냈다.
이제 명인대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대학이자 연구기관이 되었다.
“글쎄요. 으음.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군요.”
민우는 조심스레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취재를 나온 이 젊은 기자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신중할 때였다.
단순히 ‘4선 총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직 명인대에는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대학을 이끌고 싶었다.
“총장직은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요는, 리더가 어떤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교육 철학이 대학 구성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이겠지요.”
“지금까지 박 총장께서는 정말 많은 정책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막상 뵙고 말씀을 들어보니,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것처럼 들립니다만. 맞습니까?”
“제대로 보셨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자 젊은 기자가 웃었다.
이제는 경한신문의 사장이 된 박윤지가 귀띔했다. 앞으로 크게 될 인재라고. 그래서 특별히 인터뷰를 부탁한 것이었다.
“그럼 질문을 좀 바꾸겠습니다. 지금까지 박 총장께서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정책이 무엇입니까?”
“시간강사 처우에 대한 정책입니다.”
민우는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바로 답했다.
“역시 그렇군요.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책은 이미 모든 대학에서 시행하고 있을 정도로 검증된 정책이지요.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정책이 있었기에 지금의 명인대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정부에서 모든 것을 케어해 주지만 그때는 대학이 희생해야 할 시기였으니까요. 당시 새로운 정책의 혜택을 받은 시간강사들은 지금 저명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멋진 투자였던 셈이지요.”
“우리 대한민국이 고등교육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박 총장님의 혜안 덕이다, 이런 평가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 저는 그저 방향을 잡았을 뿐입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해서 얻은 결과인 셈이지요. 제 이름이 따로 거론될 이유는 없습니다.”
민우는 딱 잘라 말했다.
젊은 기자의 눈에 존경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박윤지 사장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정중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지만, 마치 70대의 중후한 안목을 지닌 명사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박 총장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항간에서는 박 총장께서 계속 총장직에 도전하신다는 말이 있던데요.”
“맞습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니까요.”
민우는 그 유력한 후보 중 하나를 떠올렸다.
얼마 전 청문대 미래학부 교수로 임용된 수제자 차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버드 유학이 그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이후 차민재는 세계 각국을 오가며 경험을 쌓았다. 문화를 익히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넓혔다.
그는 루카치의 유물을 얻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물의 능력을 온전히 흡수한 민우가 물심양면으로 키운 사람이 바로 차민재니까.
“혹시 그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퇴임 이후에는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그 계획은 명확합니다. 사실 총장 선거에 나서기 전에 제자들과 약속한 게 있습니다. 모든 일을 끝내면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겠다고.”
민우가 옛일을 상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그 제자들은 모두가 교수가 되거나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너무 늦은 거지요. 그래도 늦었지만 약속은 지키고 싶습니다.”
“그 약속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기사가 준비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기자가 짐을 챙겼다. 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박윤지 사장님은 잘 계시죠?”
“아, 예.”
“사장님께서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저를요?”
“그래요. 앞으로 경한신문을 이끌어나갈 재목이라고.”
갑작스러운 칭찬에 젊은 기자는 당황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칭찬에 인색하다. 민우는 그것을 좀 바꾸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또 보지요.”
“감사합니다. 총장님.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손님이 나가자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제2캠퍼스 사업계획서’가 놓여 있었다. 명인대는 지방에 새로운 캠퍼스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네, 박민우입니다.”
― 바쁘냐?
“타이밍 기가 막히네요. 지금 막 인터뷰 끝나고 자리에 앉았거든요. 혹시 저 모르는 사이 CCTV 설치하신 건 아니죠? 국정원 요원이 왔다 갔다던가.”
― 하하하. 넌 참 여전해. 기자들 질리지도 않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지훈이었다.
민우만큼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명인대 교수에서 총장으로, 그리고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지금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다.
대선에 출마하기 전 그가 했던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린다.
대학을 바꾸었으니 이제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그는 여전히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 다음 달에 아랍에미리트 일정이 있다. 정상회담 겸 현지 시찰을 할 생각이거든. 누굴 가이드로 데려가면 좋을까 싶었는데 바로 네 얼굴이 떠올라서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 저를 데려가려고 하세요?”
―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엔 너처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없거든.
반박할 말이 없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스승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일정 자세히 알려주시면 준비해 놓겠습니다. 다른 수행원은 안 필요하시나요?”
― 글쎄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려나?
“좀 더 생각해 볼게요. 기왕 나가는 거라면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요.”
― 오케이. 그럼 또 연락하마.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내년 총장 선거 전에는 ‘제2캠퍼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놓을 생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