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병아리 총장님 (2)
삐!
비서실과 연결된 내선 호출음이 울렸다.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민우는 버튼을 눌렀다.
― 총장님. 교육개발실의 김명현 실장이 왔습니다.
“모셔요.”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김명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오른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김 실장님.”
“취임 축하드립니다. 너무 늦게 인사드린 건 아닌가 걱정이군요.”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집니까?”
김명현은 깨달았다. 민우의 그릇이 예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는 것을.
민우가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보는 자리였다. 서지훈 총장이 퇴임하자 김명현은 장기 휴가를 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재충전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부총장은 장기 휴가를 승인했다. 취임하기 전이라 민우가 개입한 일은 아니었다.
“잘 쉬다 오셨습니까? 어디 다녀오셨어요?”
“미국에도 다녀오고, 제주도에도 다녀왔습니다. 미국은 업무차 갔고, 제주도는 가족들과 함께 갔지요.”
“가족이요?”
선뜻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김명현 실장은 아직 싱글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가족은 김태현 번역가 내외일 것이다.
“김태현 씨는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잘 지냅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한때 총장님 험담을 그렇게나 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팬이 됐습니다.”
“하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민우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김태현은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최근 번역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다혜와 김태현이다. 두 사람 모두 민우와 인연이 깊다. 민우의 이름을 딴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민우는 어느새 번역계의 대부가 되어 있었다. 나이와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민우의 시선이 김명현의 오른손을 향했다. 그는 제법 큰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누가 보면 제가 김 실장님을 쫓아낸 줄 알겠어요.”
“그런 오해가 생기더라도 금방 사그라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현은 오늘부로 명인대를 떠난다. 일반 사직은 아니고 명인대학교 재단 사무국으로 옮기게 됐다. 이쪽을 잘 아는 사람들은 김명현이 ‘영전’했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총장님은 이제 큰 목표를 하나 이루셨잖습니까.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군요. 좀 더 넓은 무대에서 제 꿈을 실현해 보이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종종 얼굴 보고 인사 나눕시다. 힘내시고요.”
정중히 고개를 숙인 김명현이 총장실을 나섰다.
아쉬운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해야 할 때다.
때마침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서지훈이 신임 교육부장관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이었다.
민우는 한진섭이 보낸 링크를 클릭했다. 인터넷 기사였다. 그 안에는 김강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서지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도 힘내세요.”
민우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 * *
서지훈이 교육부장관으로 취임한 직후 예고했던 대로 명인대 전체 감사가 시작되었다.
민우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최대한 협조했다. 직원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다들 자리를 지키며 소임을 다했다.
그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 반갑습니다. 박 총장님. 대통령께서 총장님을 청와대로 초청하셨습니다. 이틀 후 금요일에 오찬이 가능하실지요? 전임 비서관에게 듣기로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만찬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모든 초청을 거절하셨다고 해서 좀 걱정입니다.
솔직한 비서관이었다. 민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 그렇죠. 대통령께서 무척 아끼시는 분이시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뵙자고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만 금요일 오찬엔 박 총장님 말고도 한 분이 더 오십니다.”
“누구인가요?”
― 서지훈 장관입니다.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민우는 김강현 대통령이 왜 오찬을 제안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대선에 나서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대학을 축소 재편하여 연구 중심의 기관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교육계 전체를 건강하게 개혁하겠다고 말이다.
서지훈 장관이 교육부의 실권을 잡은 상황이니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듯했다.
“좋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
― 대통령께서 무척 좋아하시겠네요. 그럼 그때 댁으로 차량을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인사드리겠습니다.”
이틀 후 약속대로 청와대에서 차량이 도착했다. 그리고 목적지에서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났다. 서지훈은 이미 김강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우는 김강현 대통령과 악수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 많았지요. 박 선생이 신경 써준 덕분에 한일관계가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으니까요. 타치카와 선생도 잘해주고 있고.”
김강현 대통령은 굳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라카미 일본 총리가 한국에 다녀간 이후로 일본의 태도는 많이 변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양국은 역사상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요즘 감사 때문에 정신이 없죠? 서 장관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번에 명인대가 처음으로 감사를 받게 됐다고요.”
“예. 약속된 일이기도 하고,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그게 맞는 일이긴 합니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감사라니. 부담이 크시겠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부담이 적습니다. 임기가 어느 정도 차고 나서 감사가 시작되었다면 저에게 부담이 되었을 겁니다. 서 장관께서 배려해 주신 거지요.”
“그렇군요. 하하하. 보기 좋습니다. 두 분은 여전하시군요.”
인사를 끝내고 세 사람은 오찬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비공식 회담이라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이 한 명도 없었다.
“이제 흐름이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좀 나서야 하지 않나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청했습니다. 지금까지 명인대와 청문대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강사법 말씀이군요.”
“법규가 느슨하다 보니 대학의 자율적인 정책에 기대야 하는 면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사 처우에 대해서도 대학별로 차이가 많이 났지요. 이제는 그 제도를 제대로 손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육부에 아주 믿음직한 전문가가 왔으니까요.”
김강현 대통령이 서지훈을 바라보았다. 민우는 그 눈빛에 담긴 신뢰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했다. 서지훈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아마 새교육협의회 구성원을 비롯해 주요 대학 총장들을 불러 공청회를 열 겁니다. 그때 나오셔서 현장에서 겪은 진솔한 이야기를 해주시는 건 어떨지요?”
“좋습니다.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너무 일 이야기만 했군요. 총장 일은 어떻습니까? 소감을 못 들었었는데.”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냥 엄청나게 바빠진 느낌밖에 안 듭니다.”
“바쁜 것에 비해 대외 행사는 잘 안 하시는 것 같던데?”
“내부 정리가 우선이라서요. 아마 감사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 선생의 인맥이 세계 각지에 있지 않습니까? 그 명성을 잘 활용한다면 명인대가 정말 최고의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문득 민우는 교수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이질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방금 나온 김강현 대통령의 한마디에 정답이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갈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다.
마치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처럼.
* * *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이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민우의 커리어도 이제 1년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민우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새해를 한 달 앞둔 오늘, 민우는 휴가를 썼다.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명인대 국문과의 터줏대감, 민영환 교수의 퇴임식이 열리는 날이다.
행사는 명인대 내부에 있는 컨벤션홀에서 열린다. 학계 명사들은 물론 명인대 국문과 교강사들이 거의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퇴임식이 아니라 학술대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민우는 컨벤션홀 안으로 들어갔다.
행사의 여신, 강예진이 데스크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역시 선배는 행사 진행이 잘 어울립니다.”
“죽을래?”
그러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강예진은 아차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작년까지는 아무렇게나 이야기해도 되지만, 지금 민우는 명인대 총장이다. 한마디로 이곳의 주인인 셈이다. 그래서 말조심해야 했다.
“염장 지르지 말고 어서 들어가 봐. 안에 선생님들 많이 오셨어.”
“서지훈 선생님도 오셨어요?”
“화환만 보내셨어. 아무래도 요즘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
한 달 전, 명인대의 종합감사가 끝났다.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서지훈이 총장으로 근무할 때 대부분의 비위 사실을 처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조금의 문제도 없었으니, 교육부에서는 시정 권고만 할 뿐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제는 백성웅 전 총장의 잘못이었다.
그는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다.
“일손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테니까.”
“미쳤냐? 총장한테 일을 시킨다고?”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강예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손을 홰홰 저었다. 빨리 들어가 보라고.
‘우와, 엄청 많이 왔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 있었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대부분 얼굴은 아는 사람들이다. 국문학계는 그만큼 좁기도 하니까.
민우가 들어가니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시 시간을 빼앗겼다.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리로 가려는데 중간보스를 만나고 말았다.
“오늘 올라가서 한 말씀 하셔야지? 총장 나으리.”
이재환과 최민식이었다. 두 사람이야말로 민영환 교수의 황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저는 짬이 안 돼서요. 그런데 사회는 누가 보세요?”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않겠냐?”
최민식이 자수했다. 이재환이 재밌다며 껄껄 웃었다.
민우가 홀 내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멋진 것 같아요. 퇴임식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건 처음 봐요. 새삼스럽지만 정말 대단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말은 무대에 올라가서 하라니까?”
“진심이세요?”
“뭐가 진심이세요냐? 이미 식순에 넣어놨는데.”
최민식이 손에 든 하얀 종이를 팔랑거렸다. 얼핏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민우는 긍정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민우가 모여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30년쯤 뒤에 본인의 퇴임식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줄까?
민우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