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총장이 들어온 이후로 총장실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바로 한쪽에 커피용품들이 늘어선 것이다.
민우는 차를 대접할 때 비서를 시키지 않고 직접 만들어 대접하곤 했다. 수고스럽지 않냐는 말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잠깐의 수고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민우는 직접 내린 커피를 한진섭에게 권했다.
“크! 역시 세드릭 교수 로스팅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박민우 커피가 이렇게 맛있어질 줄이야. 상전벽해로구나!”
“쓸데없는 소린 집어치우고.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냐?”
“그게…… 음. 서지훈 선생님 쪽에선 연락 없나 싶어서.”
“서지훈 선생님?”
“요즘 협의회도 잘 안 나오시거든. 연락도 잘 안 되고.”
서지훈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하기 직전 ‘새교육협의회’의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회원 신분은 유지하되 의사결정엔 참여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서지훈이 혹시라도 변절한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민우는 그것이 서지훈의 배려라고 판단했다.
정치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독자적인 기구로서 기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거야 뭐 청문회 준비하시느라 정신없으셔서 그런 거겠지. 어차피 협회장 자리도 연주가 이어받았잖아? 선생님 도움이 크게 필요한 상황은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아무래도 정신적 지주는 여전히 서지훈 선생님이지. 지금 활동하는 주력 인원들도 다 선생님 보고 들어온 건데 갑자기 안 나오시니 혼란할 수밖에.”
“연주가 좀 더 분발해야겠구나.”
“확실히 사람이 많아지니 통제가 힘들어지고 있어. 의견도 다양하게 나뉘고. 뭐 당장이야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얼마 전 김강현 대통령은 신임 교육부장관으로 서지훈을 지목했다.
국민들은 신임 장관이 불어올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환영했다. 하지만 정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험과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심지어 여당에서도 급진적인 성향을 지닌 서지훈을 멀리하는 게 좋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여간 정치인들 태세 전환은 알아줘야 해.’
당연히 민우는 그런 비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자신이 대선 캠프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도 들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지훈은 그보다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비판이 나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지훈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즉, 그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오늘 찾아온 이유야?”
“협회장을 네가 이어받는 건 어떨까 싶어서 왔다.”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민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한진섭은 농담인 척했지만, 그의 말에 많은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민우가 모를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역적모의 하지 말고 연주 일이나 잘 도와줘. 아직 처음이라 그래. 시간 지나면 자리 잡겠지.”
“역적모의라니. 충신의 간언을 이렇게 폄하한다고?”
“충성 충 자가 아니라 벌레 충 자겠지.”
그래도 이렇게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좀 정리된 모양이다. 한진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청문회는 별일 없으려나?”
“20년도 넘은 자동차 끌고 다니는 분이야. 털어서 먼지도 안 날걸? 먼지는 무슨. 수술실급 무균 상태겠지. 자녀도 없으시고 재산도 많지 않고 병역도 완벽하게 수행하셨으니 문제 될 게 있나?”
“그래도 워낙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내고 하니까 걱정돼서 그래. 주님도 별말은 안 하지만 걱정하는 눈치더라.”
“뭐, 지켜보자고. 청문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신임 교육부장관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민우는 총장실에 앉아 TV를 틀었다.
마침 청문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서지훈 총장이 선서했다. 선서가 끝나자 카메라가 움직이더니 참석자들을 쭉 비춰주었다. 나름 정계에서 이름 있는 의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윽고 서지훈 총장이 좌석에 앉았다.
야당은 김강현 대통령의 지명을 완전 반대하고 있었고, 여당에서도 일부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모든 매스컴에서 이번 청문회에서 진통이 예상된다는 결론을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그저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영화나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주인공이 악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위기는 시청자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니까.
“지금부터 교육부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위원장이 청문회 개시를 선언했고, 의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
“저는 먼저 후보자가 과연 대한민국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부터 따져 묻고 싶습니다. 후보는 명인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했고, 상아대 전임교수로 시작해 명인대에서…….”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서지훈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이력을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점만 간단히 물어주십시오.”
“…….”
질문을 꺼낸 의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누가 청문회에서 이렇게 오만방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죄가 없었다. 다만 서지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을 뿐이다.
서지훈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싸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잃을 게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후보자는 지정된 시간에만 답변을 해주십시오.”
“예. 하지만 위원장께서도 잘 중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참석하신 분들이 효율적으로 질문할 수 있도록 진행 부탁드립니다.”
“크흠!”
위원장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도 여당의 중진이라 어쩔 수 없이 김강현 대통령의 선택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만, 내심 서지훈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여러모로 서지훈의 적이 많아지는 상황.
어수선한 장내가 정리되고, 잠시 질문이 끊겼던 의원이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교수와 총장 이력이 끝인 사람이 교육부라는 거대 단체를 잘 이끌 수 있는지 의문이군요.”
“말씀을 들어보니 국문학에 대한 편파적인 감정이 묻어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무, 무슨 소리를……!”
“국문학도 학문의 하나입니다. 저는 석사와 박사를 거치며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을 체득했고, 교수와 총장직을 거치며 교육 정책에 대한 고민을 수없이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데 자격 미달이라니요? 전공에 대한 편견 말고는 해석할 여지가 없는 질문입니다.”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TV를 지켜보던 민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했던 걱정이 완전히 녹아 없어진 기분이었다. 때마침 한진섭에게 카톡이 왔다.
섭섭한애: 잠깐이라도 서지훈 선생님을 걱정했던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주님: 쪽팔린 줄 알아야지
섭섭한애: 아니 당신도 같이 걱정했으면서 그래???
주님: 나가서 기저귀나 사 오셔
섭섭한애: 넵
민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TV에 집중했다.
이번엔 다른 야당 의원이 질문을 시작했다.
“그…… 서지훈 후보자는 총장으로 약 1년 반밖에 근무하지 않았습니다. 정책을 논하기엔 짧은 시간이 아닐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바로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1년 반은 짧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1년 반은 아주 긴 시간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굉장히 오만한 말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은 평범하고 자신은 천재라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감탄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청문회에서 저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난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청문회장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청문회장이 장난입니까? 여기가 당신 놀이터예요?”
“예의를 지키세요!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입니까?”
“이래서 제가 처음부터 청문회를 반대했던 겁니다!”
의원들이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서지훈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민우는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험한 말을 쏟아낼수록 손해 보는 것은 의원들일 테니까. 그들은 마치 생방송 중인 것을 망각하기라도 한 듯 막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만! 그만 하세요! 계속 소란을 피우면 퇴장시킬 겁니다.”
“아니. 위원장님. 퇴장시켜야 하는 건 후보자라고요! 왜 감싸는 겁니까? 여당 인사라 그런 겁니까?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걸까요?”
“무슨 말씀을! 후보자가 험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건 당신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위원장과 의원들의 손해가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서지훈과 그를 지명한 김강현 대통령은 반사이익을 받을 것이 분명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란이 잦아들었다.
위원장이 마지막 경고를 하고 나서야 의원들이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흠흠! 그럼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후보자의 말은 자기는 똑똑한 사람이니 1년 반이라는 경험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뭐 그런 겁니까?”
“저는 제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1년 반이라는 시간은 저에게 아주 충분하면서도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말씀드린 것이지요.”
“하지만 총장직엔 마땅히 임기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임기는 구성원과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른 길로 샜다는 것은 책임감이 없다는 증거 아닐까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서지훈 총장은 진지하게 그 질문에 답변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장관이라는 자리가 책임감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교육에 대한 철학과 신념, 부패 척결의 의지. 이런 종합적인 것들이 교육공직자가 가져야 할 덕목 아닐까요? 책임감만을 따진다면 굳이 청문회가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