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주인을 맞이하다 (2)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네. 하지만 서 교수도, 송승현 이사도 같은 말을 하더군. 박 교수가 없었더라면 현우의 학문과 사상을 후대에 제대로 남길 수 없었을 거라고.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현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결과물을 확인하고, 거기에 사인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박 선생의 덕분이라고 하더군.”
임종 직전 정신을 잃은 송현우 교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제자와 딸의 간곡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민우가 그의 손에 쥐어진 루카치의 만년필 덕분이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빛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민우가 송현우 교수에게 마지막 힘을 불어넣었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일화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다.
이태하 이사장은 그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군요. 이사장님께서 박 교수를 이렇게까지 감싸시는 이유를 말입니다.”
“뭐, 그런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진 않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한 걸 어쩌겠나?”
이태하 이사장은 싱겁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무게와는 전혀 다른 본심이 나왔다.
“그런 사람이라면…… 교수라는 자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총장이 아니라 오히려 교수로 남아야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네. 박 선생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총장은 기업가와 다를 게 없어. 온갖 더러운 일에 연루될 가능성이 많다는 거지.”
만약 민우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바로 김강현 대통령이다.
김강현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민우와 함께 캠프에서 활동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박 교수만큼은 순백의 교수로 남았으면 한다고.
그 말과 상당히 비슷한 한마디였다.
“그런 심정이셨군요. 제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예?”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의견을 내야 할 것 아닌가? 설마 공짜로 입을 슥 닦으려는 건 아니겠지?”
당황한 남자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태하 이사장을 오래도록 모신 사람이다. 지금은 그저 지나가듯 묻는 게 아니라 진짜 의견을 묻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라면 박 교수를 신임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총장에 오르는 것은 박 교수가 원하는 길이지 않습니까. 그가 학생들을 위하듯, 대학과 학계를 위해 뭔가 큰일을 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뻔한 대답인데.”
“뻔한 대답이라는 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남자의 당돌한 대답에 이태하 이사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자네가 말대답을 할 때도 있군.”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의 말이 맞아서 한 말이야. 내 생각도 다르지 않고. 그저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지.”
남자는 자신의 주인이 진심으로 결정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물었다.
“이사회를 준비할까요?”
“그렇게 합세.”
고개 숙여 인사한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긴급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마음을 정한 이태하 이사장은 굳이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 * *
오랜만에 푹 잔 것 같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하곤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는 요리가 한창인지 지지고 볶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소한 기름에 야채가 볶아지는 맛있는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밖으로 나가니 이수빈이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한창이었다.
“뭐 해?”
“볶음밥이요. 어제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짬뽕 국물까지 만들어 놨어요. 맛있게 먹으라고.”
“웬일로 먹고 싶다는 걸 다 해준대?”
“첫 출근인데 든든히 먹고 가야지.”
피식 웃은 민우는 밑반찬을 꺼내고 빈 그릇과 수저를 준비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곤히 잠들어 있는 윤아를 깨웠다.
오늘은 민우가 총장으로서 처음 출근하는 날이었다.
학교를 옮긴 것도 아니다. 대학에서 일하는 것도 그대로다. 그저 직위가 변한 것일 뿐이지만, 마치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숟가락질하던 윤아가 물었다.
“이제 아빠 교장 선생님 된 거야?”
“맞아. 명인대학교 교장 선생님.”
이제 초등학교에 막 다니기 시작한 윤아에겐 총장이라는 단어보단 교장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익숙했다. 윤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도 나중에 아빠 학교에서 공부할래.”
“뭐 공부하고 싶은데?”
“의사 선생님이 되는 공부.”
“그럼 열심히 해야겠다. 아빠네 학교에서 의사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를 정말 잘해야 하거든.”
이수빈이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윤아라면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영재 트랙을 밟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해올 정도였으니까.
이미 그 이야기는 윤아가 다섯 살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와 이수빈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딸을 천재로 키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고 대학에서 동료를 얻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때쯤이면 소윤 언니한테 배울 수 있겠네.”
“소윤 언니도 교수야?”
“아마 그때쯤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윤아는 올해 8살이다. 대학 입학까지는 12년 정도가 남았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소윤이 박사학위를 받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지각하겠다. 어서 먹어.”
“응!”
가족끼리 오붓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수빈은 윤아를 데려다주기 위해 먼저 집을 나섰다.
민우도 명인대로 출발했다. 이제는 대학 총장이 되었기 때문에 레아 대신 명인대에 소속된 운전기사가 대신 차를 몰았다.
레아는 얼마 전 미국으로 돌아갔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사람마다 각자 가야 할 길이 있는 법이다.
차에 오른 민우가 목적지를 수정했다.
“대학본부 말고 인문관에 먼저 들러 주세요.”
“인문관 말씀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직 업무 시작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민우는 총장 업무를 시작하기 전 다른 일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차가 인문관 앞에서 멈췄다.
민우가 내리자 학생들이 반겼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자주 드나드는 교수였다. 그래서 학생들과 허울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학생들은 민우를 여전히 ‘선생’이라 불렀다.
민우는 총장이라는 직함보다 선생이라 불리는 것이 훨씬 좋았다. 직책이 바뀌어도 그들에겐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민우가 찾아간 곳은 바로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갑작스럽게 민우가 들어오자 민영환 교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가?”
그렇게 한마디 하긴 했는데,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이제 대학의 총장이 된 사람이었다. 존칭을 써야 맞았다.
“임기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총장이라고 해봐야 아직 멀지 않았습니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아직 멀었다니? 일단 앉으시게.”
민영환 교수가 자리를 권했다. 민우는 차분히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그간 선생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그 가르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 한마디에 민영환 교수는 다시금 깜짝 놀랐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다 서지훈 선생이 한 게지.”
“제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과거가 좀 달라졌겠죠. 석사과정 도중에 지도교수를 서지훈 선생님으로 바꿨을 겁니다.”
민우가 석사과정 중일 때 서지훈 교수가 상아대에서 명인대로 자리를 옮겼다.
서지훈 교수는 상아대 시절부터 민우를 지도해왔다. 그래서 그때 지도교수를 바꿀 거냐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민우는 바꾸지 않았다.
민영환 교수에게도 아직 배울 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그거야…….”
“요즘도 후배들에게 <개벽>지 창간일 묻고 그러십니까?”
“요즘은 안 그래.”
석사과정 신입생 시절 민영환 교수에게 많이 시달렸었다. 이런저런 심부름과 테스트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래도 가끔은 하세요. 그래야 후배들이 공부 열심히 하지요.”
“시대가 많이 변했다. 알아서들 공부 잘하더라. 학교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이지.”
굳이 그게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민우가 화제를 바꿨다.
“선생님도 올해가 지나면 이제 퇴임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후 계획은 세워두셨습니까?”
민우는 제법 예민한 질문을 꺼냈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획 세울 게 무엇 있나?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거리 하는 거지. 30년 넘게 대학에 있었어. 이제는 좀 쉬어야 할 때야.”
“아쉽네요. 아직 선생님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게야?”
“하하하. 음모라니요. 제자의 성의라고 생각해 주셔야지요. 저는 선생님을 명예교수로 추대하고 싶습니다. 조금 더 대학을 위해서 일해 주실 순 없을까요?”
“으음…….”
민영환의 생각이 길어졌다. 그러다 불현듯 그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예전에 준 노트 말이야. 실존주의 스터디 노트. 그거 아직 가지고 있나?”
“아닙니다. 얼마 전에 물려줬습니다.”
“누가 가져갔지?”
“차민재 선생이요.”
“역시 그렇군.”
민영환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 노트를 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너 같은 놈이 보이거든 물려주라고 했던 말이 생생히 재생되었다.
민우는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후계를 찾은 듯했다.
민영환은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민우는 노트를 물려줬음에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물러나는 것은 변명 같았다.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그런데 마누라가 싫어하겠어. 퇴임하면 같이 놀러 다니자고 했는데 말이지.”
“하하하. 사모님껜 말씀 잘해주세요. 오늘 업무 시작하자마자 바로 관련 절차 진행하라고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교무처장이 설예라 선생일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설예라 선생에게 지시를 한다고? 뒷감당할 자신 있나?”
“그것도 나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민우는 웃었다. 그리고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또 뭐로 놀래킬 생각이야?”
“다음 학기에 퇴임식 하셔야죠. 개인적으로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요즘 예진 선배가 좀 한가한 것 같아서요.”
“마지막까지 수고를 끼치고 싶진 않은데.”
“오히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예진 선배만큼 선생님 곁에서 보좌한 사람도 없으니까 말이죠. 곧 선생님 자리도 이을 거고 말이죠.”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민우의 말은 강예진의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한편으로는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자를 챙겨주는 게 아니라 제자에게 챙김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소란스럽겐 안 했으면 좋겠다. 간소하게 하자꾸나.”
“그럴 순 없습니다. 국문학계의 대부께서 퇴임하시는데 간소하게 하다뇨. 기대해 주세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뭐, 알아서 해.”
“그럼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박 선생.”
따라 나온 민영환 교수가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취임 축하한다.”
교육부장관 청문회
“오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박민우 총장님의 카페 겸 집무실인가!”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온 사람은 바로 한진섭이었다. 역시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서류를 검토하던 민우는 잠시 쉬기로 했다.
“비서가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하디? 총장님 바쁘시니 노크는 하고 들어가시라고.”
“최측근을 감히 누가 막아? 그러다 혼나요.”
“혼나야 되는 건 비서가 아니라 너 같은데…….”
“쉽게 가자고. 쉽게. 하하하하!”
한진섭은 마치 자신이 총장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가 괜히 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진섭도 바쁜 사람이니까.
하지만 민우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한진섭은 노크했다. 민우가 업무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너 일할 땐 문 열어놓는 게 좋겠더라.”
“왜?”
“내가 노크 열 번은 넘게 했어. 대답도 없어가지고 비서 씨가 걱정하더라고. 혹시 과로사한 게 아닌가? 박민우라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들어온 거야.”
“그런 일이 있었어?”
민우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검토하던 서류는 정말 중요한 서류였으니까. 민우는 한진섭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내가 깊은 깨달음을 준 것 같으니 커피나 한잔 내와 보시게.”
“누가 총장인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