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93화 (493/500)

새 주인을 맞이하다 (1)

일본에서 벌어진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물론 무라카미 총리의 담화문이 발표된 이후 일본 열도는 말 그대로 혼란에 빠졌다. 비판도 많았고 옹호도 많았다.

민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무라카미 총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미즈 선생도 있고, 다른 분들도 도와줄 테니까 언젠가 잘 정리될 거야. 조용히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오겠지.’

민우는 이제 온전히 자신이 갈 길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총장 선거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홍주희 교수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이번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솔직히 저번 소식도 나쁜 소식은 아니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홍주희 교수는 인쇄된 서류를 민우에게 건넸다. 홍주희 교수와 명인대 선거관리위원회가 논의한 내용이 요약되어 있었다.

빠르게 다 읽은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신경 많이 써주셨네요.”

후보자 토론회에서 배정된 시간을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소식이었다.

“저 혼자 결정하기는 좀 그렇고, 동료들하고 좀 이야기를 해볼게요. 좀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려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나름 준비하고 있을게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총장님.”

홍주희 교수는 민우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민우는 딱히 부인하지 않고 그녀를 배웅했다.

이후 민우는 바로 기획에 들어갔다. 민우는 혼자 생각하지 않고 원년 멤버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명인대 미래 포럼’이었다.

자신이 구상한 명인대의 중장기 플랜을 설명하고 대학 구성원을 초청해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총장 후보자 토론회 대신 열린 ‘명인대 미래 포럼’은 호평 속에서 막을 내렸다.

민우는 혼자 무대를 차지하지 않았다. 학부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시간강사와 정교수를 불러다 놓고 의견 청취와 토론을 이어갔다.

자리를 마무리하며 민우는 분명히 선언했다.

“저는 고고한 총장이 되지 않을 겁니다. 현장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고민하고 웃을 수 있는 총장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앉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여러분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민우의 소감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투표 당일이 되었다. 모든 것을 차분히 정리하고 늦게 집에서 나온 민우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으며 명인대로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투표죠? 꼭 좋은 성과 거두시길 바랄게요!”

“힘내세요!”

“저 교수님 찍었어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제는 교내 구성원 모두가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민우는 홀가분하게 걸음을 옮겨 연구실에 도착했다.

문을 여니 매콤달콤한 떡볶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년 멤버들이 모여 분식을 잔뜩 깔아놓고 민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 떡볶이야?”

“행운의 음식이잖아. 재작년 기억 안 나냐? 그때 서지훈 선생님 개표방송 볼 때 먹었던 거. 그때 그 집에서 메뉴도 똑같이 사 왔지.”

과연 한진섭의 추진력은 남달랐다.

그도 그렇고 주예린도 그렇고 이수빈도 학기가 시작된 상황이라 상당히 바빴다. 그럼에도 이렇게 모여준다는 게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민우도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옛날 생각나는데?”

“언제 적?”

“팀 307호 처음 뭉칠 때. 종종 이렇게 모이곤 했잖아.”

“역시 사람은 큰일을 앞두고 있으면 감상에 빠진다니까. 걱정하지 마 인마. 이번 선거에 굵직한 사람 아무도 없었잖아? 다들 네가 총장이 될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상황인데 이변이 일어나겠어?”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죠. 아, 맞다. 울 오빠한테 한 표 주고 온 거 맞죠? 왠지 섭섭 오빠는 믿음이 안 간단 말이지.”

이수빈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한진섭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민우 쪽으로 표가 쏠리면 재미없잖아? 공산당도 아닌데. 박수찬 선생님한테 표 주고 왔다.”

“진짜로? 완전 배신자네.”

“그러게.”

주예린이 거들자 한진섭이 흠칫했다. 순식간에 3 대 1 상황이 되었다.

“아이 씨. 농담도 못 하냐? 나도 총장 친구 둔 덕 좀 봐야 할 거 아냐? 당연히 민우 찍었지!”

“증거 있어요?”

“무슨?”

“그게 농담이면 울 오빠 찍었다는 증거 있냐구요.”

“…….”

“배신자.”

괜한 농담을 꺼낸 한진섭은 끝내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화제를 돌려야 했다.

“자자, 영양가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읍시다. 다 불겠다.”

“잘 먹겠습니다.”

원년 멤버들은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민우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자 이수빈이 나무젓가락을 챙겨주었다.

“오빠도 좀 먹어요.”

“고마워.”

문득 이태하 이사장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총장 선거는 임용 여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다. 일종의 적격 심사다. 후보 3인을 표결로 선정한 다음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거다.

즉 1순위로 뽑히더라도 이사회에서 부결된다면 총장이 될 수 없다는 소리다.

재작년 선거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전혀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학과 이사회에서는 새로운 총장 선출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장인이 만든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민우는 손을 뻗어 떡볶이를 집었다.

― 안녕하세요. 명인대 가족 여러분. 지금부터 개표방송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투표율은 총 85.1퍼센트로 지난 선거보다 조금 높은 수준입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홍주희 교수가 패널로 앉아 있었다.

“시작이야.”

연구실에 모인 네 사람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고정되었다. 본격적으로 개표가 시작되었다.

* * *

고즈넉한 서재에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서재엔 온갖 책들이 가득했다. 평생을 학문에 투신한 학자처럼 다양한 분야가 망라되어 있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노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정했다. 생기가 가득한 눈빛이 모니터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명인대의 이태하 이사장이었다.

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스케줄을 빼고 선거 방송에 집중하고 있었다.

― 개표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기호 1번 박민우 후보가 총장 후보 1순위로 당선되었음을 확정합니다. 다음으로는…….

드디어 선거 결과가 나왔다.

동시에 이태하 이사장의 입에서도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2등과 3등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민우가 총장 선거에 등록하고, 투표에서 1순위를 차지한 이상 더는 볼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민우에게 축하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즉, 이번 투표는 총장 후보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것이지만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때 노크가 들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장님. 명인대 총장 후보 선거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금 나도 봤네.”

“그러셨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야 이태하 이사장은 총장 임명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이태하 이사장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남자는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얼마 전까지 회의적이었다네. 박 교수가 총장직에 오르는 것을 말이지.”

“하지만 최연소 총장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대와 불안이 섞여 있으니 이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겠나?”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자네라면 들을 만한 자격이 있지.”

허리를 편 이태하 이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비스듬히 앉은 채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이르기도 하고, 그만한 자질이 있을까 고민했었지. 명인대 총장 자리는 일반적인 총장직과 그 궤가 달라. 사립대학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인재가 자리를 이어받아야 하지. 하지만 그 전통은 이미 서지훈 선생 대에 끝나 버렸고, 이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지.”

‘새교육협의회’가 설립되고 김강현 대통령이 그곳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하면서 기존 총장협의회는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어 버렸다. 이탈자도 많고 각종 비리 혐의로 고발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에 편승하려고 하는 것은 오판이었다. 현명했던 이태하 이사장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즉, 지금은 새롭게 판을 짜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박민우 선생은 경험이 너무 적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주 크게 다가올 걸세.”

이태하 이사장도 얼마 전 민우가 개최한 포럼을 지켜보았다.

이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결국은 모든 교수와 연구원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연구와 교육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인데 이게 어찌 쉬운 일일까?

“그렇다면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잘 모르겠네. 반반이라고 할까?”

“그럼 2순위 후보를 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좀 걸리는 사건이 있어서 말이지.”

그제야 남자는 이태하 이사장이 모든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지금 나올 이야기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입으로 나오기까지, 상당히 많은 침묵이 필요했다.

“예전에…… 아주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었지. 그리고 나와 같이 평생 교육계에 투신한 사람이 있어. 송현우 교수라고 자네도 알지?”

“압니다. 국문학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이죠. 저도 그 교수님의 책으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고 해도, 출사표를 던지고 세상에 나올 때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네. 현우와 나는 매사에 대립했지. 대학과 교육계를 바꿔야 한다는 큰 뜻은 같았지만, 그 방법론이 달랐거든. 어떻게 다른지는 자네도 잘 알 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세. 그렇게 나는 재단으로 들어왔고, 그는 현장에 남았네.”

애초에 시작점부터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

이태하 이사장은 이명인 설립자의 후손이라 재단에서 일하게 될 것이 거의 정해진 상황이었다. 반면 송현우 교수는 명인대 국문과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이후로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송현우 교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태하 이사장은 송현우 교수가 생전에 이루려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았다.

도달하는 길이 달랐을 뿐이다.

“그렇게 덧없이 갈 거였다면 뭐하러 이렇게 아웅다웅 살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후회가 되더군. 그런데 그때 현우의 유지를 이어받은 사람이 있어.”

“서지훈 교수입니까? 아니면, 송승현 이사입니까?”

“사람들은 서지훈 선생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박민우 선생이지.”

뜻밖의 말에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이태하 이사장을 쳐다보았다. 소탈하게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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