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92화 (492/500)

정상회담 (2)

다음 날, 신문방송학과 홍주희 교수가 찾아왔다.

오늘 공개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민우는 반갑게 홍주희 교수를 맞았다.

“커피 괜찮으세요? 얼마 전에 좋은 원두가 들어왔거든요.”

“좋죠.”

홍주희 교수는 은근한 미소를 띤 채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미리 만들어 둔 커피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홍주희 교수는 바로 커피를 음미했다.

“음, 역시 좋네요. 좋은 사람이 내려주는 커피라 더 좋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은근한 유혹에 민우는 덤덤히 답했다.

“수학과 세드릭 교수께서 직접 블렌딩한 원둡니다. 얼마 전에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좀 얻어왔어요.”

“세드릭 교수님이라면 수학과의 그분이죠? 한번 연구소에 놀러 가야겠네요.”

“아주 좋아할 겁니다. 요즘 손님 맞는 취미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민우는 굳이 세드릭 교수가 미인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홍주희 교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좀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려야겠네요.”

“안타까운 소식이요?”

그럴 소식이 있나?

민우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소식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총장 선거 토론회는 무산됐어요.”

“무산되다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후보자들이 기권했거든요. 아무도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전해왔어요.”

“아.”

민우는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총장 후보자 토론회는 강제성이 없다. 자신 있는 후보들이 나와서 자신이 적합한 후보라는 것을 홍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도 토론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결정된 것이다.

그 이유는 금방 나왔다.

“모두가 박 교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든 박 교수님을 능가할 수 없을 거라고 계산을 마친 거죠.”

“설마 그랬겠어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구태의연한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겠죠? 지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홍주희 교수가 서류를 건넸다. 이번 총장 선거에 입후보한 후보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보실 것 없어요. 유명한 분들은 한 분도 안 계시거든요. 중요한 건 숫자예요. 평균 후보자 등록 수보다 이번에 등록한 후보자 수가 10퍼센트밖에 안 돼요. 9할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록을 포기한 거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서지훈 총장님이 임기를 마저 끝내지 못한 절호의 찬스인데 말이죠.”

그렇게 말을 매듭지은 홍주희 교수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마디로 승산이 없으니 지레 포기했다는 이야기였다. 구체적인 숫자까지 나오자 민우는 더 이상 부인하지 않았다.

“아무튼 정말 아쉽네요.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네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나요?”

“다른 방법이요?”

홍주희 교수가 눈매를 좁혔다. 무슨 꿍꿍이냐는 듯이.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여유롭게 웃고 있는 민우의 표정을 향했다.

“어차피 촬영 장비나 방송 시간은 확보된 거잖아요. 그리고 전 토론회에 참석하겠다고 말씀을 드렸고요.”

“그렇죠.”

“그렇다면 그 시간은 저 혼자 써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싶은데.”

“혼자서요?”

살짝 놀란 홍주의 교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다.

“정책 브리핑이라도 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예. 저는 후보자 토론회가 단순히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토론을 통해서 대학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묘책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더라면 저 혼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거라면…… 좋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이건 선거관리위원회 쪽과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공개 토론회가 도입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거든요.”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맡겨 주세요.”

미소를 남긴 홍주희 교수가 연구실을 나갔다.

홀로 연구실에 남은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결과 발표가 있을 시간이었다.

‘역시 타치카와 선생하고 같이 보는 게 낫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바로 ‘독도연구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연구소 안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TV 앞에 모여 있었다.

타치카와 교수는 물론, 그의 밑에서 역사와 정책을 연구하는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황급히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타치카와가 나서 민우를 맞았다.

「역시 박 선생이라면 오실 줄 알았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속 보이는 행동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이쪽으로 앉으시죠. 곧 생방송 시작합니다.」

민우는 타치카와 교수와 함께 맨 앞자리에 앉았다.

방송 화면에서는 정상들이 설 연단이 나란히 두 개 놓여 있었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곧 양국 정상들이 나와 합의문을 발표할 것이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타치카와 교수가 물었다.

「박 선생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건 저보다 여기 연구소에 계신 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민우는 다 들리는 목소리로 연구소를 추켜세웠다. 고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명확했다.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 자리를 구상한 건 박 선생 아닙니까? 대강의 이야기는 머릿속에 그려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정치라는 게 그렇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이해관계도 많이 얽혀있고,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아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타치카와는 민우의 말을 경청했다.

예전이었다면 아마추어의 의견일 뿐이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민우는 이미 정계에서 ‘킹 메이커’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도 뭔가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무라카미 총리께서 뭔가 꿍꿍이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민우는 무라카미 총리와 만났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시미즈 선생과는 다른 방식을 계획했다고.

이제 곧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순간 플래시가 터지며 양국 정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회담이 잘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듯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먼저 김강현 대통령의 발언이 시작됐다.

“이제 곧 봄이 찾아오려나 봅니다. 날씨가 무척 따뜻하고 좋네요. 이렇게 좋은 날 여러분께 좋은 결과를 전해드릴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가깝지만 먼 길을 자처하신 무라카미 총리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는 이웃 국가로서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무라카미 총리의 순서였다. 총리는 내내 정중한 태도로 합의문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과 한국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각자의 고통에 무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격변을 맞이한 세계 질서에 대응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무라카미 총리가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다음 대목이 특종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숨죽인 채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식민지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배상에 앞서 우리 일본 정부는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께 정중히 사과하는 바입니다.」

무라카미 총리가 바로 서더니 엄숙히 인사했다. 놀라운 파격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이것은 한국 국민 모두에게 드리는 사과입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는 남은 체류 기간 동안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분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서둘러 움직이겠습니다. 고충도 직접 듣겠습니다. 후에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충분한 보상이 가능하도록 관련 정책을 수립하겠습니다.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현장에서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일본의 수장이 공식 사과를 했다.

그것도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수준이 아니다. 총리의 이름을 걸고 사람들에게 약속했다.

이것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특종이었다.

기자들의 손이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화면을 보고 있던 ‘독도연구소’ 연구원들이 환호했다.

아마 이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기뻐할 것이다.

곧 공식 발표가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돌아왔다.

당연히 모든 질문이 무라카미 총리에게로 향했다.

한 용감한 기자가 인사치레는 제쳐두고 핵심을 물었다.

「왜 갑자기 일본 정부의 태도가 변한 것입니까? 지금까지 일본은 과거사를 부정하고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이어왔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만.」

무라카미 총리는 각오했다는 표정으로 대답에 나섰다.

「얼마 전 어떤 고명한 학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잘 아는 분이죠. 어떤 분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분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만이 해묵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말을 수용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시 무라카미 총리는 좀 더 대국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음을.

옆에 있던 타치카와 교수는 무라카미 총리가 언급한 ‘고명한 학자’가 누군지 짐작한 눈치였다. 민우를 바라보며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다.

아마 타치카와 교수 말고도 그 학자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거다.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일본에서 연일 혐한 시위와 퍼포먼스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발표가 기름을 부은 격이 되지 않을까요? 일본 내부의 반감을 어떻게 잠재우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부분은 우리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미 일본의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나서서 관계 회복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설득에 자신 있습니다.」

「첫 정상회담 소감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웃 나라에서 아주 훌륭한 분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좀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질의응답은 무라카미 총리의 덕담으로 마무리되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TV 전원이 꺼졌다. 연구원들이 저마다 성과를 평가했다. 민우도 타치카와 교수와 소감을 나눴다.

「한일관계에 유례없는 청신호가 켜질 것 같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무언가를 바꾸려는 의지가 보이더군요.」

「앞으로 자주 불려 다니시겠는데요? 자타공인 최고의 전문가 아니십니까?」

민우는 타치카와가 겸양을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이렇게 된 게 다 박 선생 덕분이니 같이 다녀 보려고 합니다.」

「이런.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겁니까?」

「그럼요! 즐거운 일은 서로 나눠야죠.」

두 선생의 웃음소리가 연구소에 울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은 그 장면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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