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1)
총장 선거를 향한 민우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민우는 선거에 집중하기 위해 다가올 1학기에 어떠한 보직과 강의도 받지 않았다.
그에게 지도를 청하려던 국문과 학생들이 여럿 서운해했지만, 좀 더 좋은 대학으로 만들기 위한 민우의 노력에 응원을 보냈다.
민우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내가 세운 목표를 모두 달성하게 된다면 다시 강단으로 돌아올 거야. 물론 그때가 되면 너희들이 학생일지, 아니면 강사일지 교수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같이 공부하도록 하자.”
제자들은 납득했다.
민우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들의 미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까꿍!”
“까꿍은 개뿔. 여기가 유치원이냐?”
“윤아 학교 간다고 유치원 무시하는 것 좀 봐.”
주예린과 한진섭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광란의 신년회가 끝나고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이수빈도 안으로 들어왔다.
“맛있는 원두가 들어왔다는 첩보가 있어서 검문 나왔습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시죠.”
“그 이야긴 또 어디서 들었어?”
“세드릭 교수님이 알려줬어요. 오늘 가면 맛있는 커피를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고.”
신년회를 계기로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세드릭 교수는 예술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민우는 새삼스럽게 주예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해 들어 이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다. 단지 어머니가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정현 감독의 <방랑자들>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각종 영화제 본상을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원작은 주예린의 작품이다.
그리고 늘 발목을 잡았던 한수영 교수와의 관계도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이제는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볼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모교인 상아대에 강연을 나갈 일도 많았다.
한수영 교수는 주예린이 모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배경에는 한정현 감독의 공이 컸다. <방랑자들>이 엄청난 수익을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상아대 국문과에 들어가는 장학금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이다.
한정현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했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제작비와 투자금을 제외한 수익이 발생할 경우 상아대에서 작가의 꿈을 키우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 말이다.
덕분에 주고 끝나는 장학금이 아니라, 주예린과 한정현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장기적으로 상아대 학생들을 후원할 방법을 모색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몸값이 뛰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세계적인 소설 작가였다. 이미 더 뛸 몸값도 없었다. 그저 예전보다 더 많은 출판사와 미디어에서 연락이 올 뿐이다.
“근데 윤아한테 무슨 용돈을 그렇게 많이 줬냐?”
“그게 뭐가 많아요? 가방 하나 사고 신발 하나 사면 끝인 돈인데.”
“하여간…….”
주예린의 말도 틀린 건 아니라 민우는 혀를 찼다. 그녀의 100만 원과 자신의 100만 원은 가치 자체가 다르다. 주예린은 이미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억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용돈 사건은 며칠 전 있었던 신년회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년회 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단연 윤아였다. 그 자리에서 윤아는 세상 무엇보다도 든든한 삼촌과 이모를 얻게 되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돈도 많이 받았다.
그 와중에 윤아는 예린 이모가 하얀색 종이를 줬다며 그것을 민우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종이가 아니었다. 수표였다.
예상과는 달리 숫자 0이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나 박혀 있었다.
100만 원짜리 수표였던 것이다.
민우는 그길로 윤아의 통장을 만들어 그 돈을 넣어두긴 했지만 이런 큰돈을 쥐여줘도 되는 건지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게 뭐 있어요? 윤아 걔 선배보다 똑똑해요. 돈 관리는 더 철저히 잘할 거예요. 괜히 뺏지 말고 윤아가 쓰게 냅둬요.”
“그래도 너무 많았어.”
“그래봐야 자얀 씨가 준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데 뭘 그리 까칠하게 구실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자얀은 아부다비 왕가의 인장이 들어간 필기도구 세트를 윤아에게 선물했다. 순금 장식이 들어간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인장 자체가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윤아는 예쁜 필기도구를 받았다며 좋아했지만, 민우는 그것을 가방에 넣어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정말 기대돼요. 윤아가 벌써 학교에 들어간다니…… 엄청 똑똑하니까 금방 주변의 관심을 받지 않을까요?”
“그게 걱정이긴 해. 지나친 관심이 아이한테 독이 될까 봐.”
“윤아라면 잘해 낼 것 같아요. 부모 닮아서 아주 강한 면이 있거든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그나저나 우리 진환이는 언제 학교 간담? 선배 부러운 적이 별로 없었는데 윤아 학교 간다니까 엄청 부럽더라고요.”
“나는 민우한테 부러운 거 많았는데 그것도 엄청 부럽더라고!”
한진섭의 너스레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진환은 작년에 태어난 한진섭과 주예린의 아들이다. 건강히 잘 크고 있고, 한 달 뒤면 벌써 첫돌을 맞이한다. 돌잡이에서 무엇을 잡을까 기대되기도 했다.
민우가 한마디 했다.
“그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남 일이라고 막 이야기하시네.”
“겪어보면 안다는 이야기야. 재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 들인 시간만큼 애들은 훌쩍 자라. 애 키우는 데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거잖아?”
“우와. 완전 아저씨 같았어요. 방금.”
“아저씨 맞습니다.”
주예린의 안식년은 작년 부로 끝났다.
그래서 원년 멤버들은 민우의 연구실에 자주 모여 선거 전략을 의논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이제 내일이면 공개 토론회 라인업 발표되는 날이죠?”
“그렇지.”
이번에도 신방과 홍주희 교수가 명인대 선거관리위원회와 협력해서 공개 토론 방송을 진행한다. 민우는 토론회에 참석하겠다고 통보한 상황.
내일이면 누가 총장 후보 토론회에 참석하게 될지 윤곽이 드러난다. 동시에 누가 총장 후보로 등록했는지도 완전히 공개된다.
사실 민우는 토론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명인대 내에서 요직을 거치며 대학 사정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력자들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다.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상대가 혹시라도 선배의 약점을 들고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민우한테 약점이 있었어?”
한진섭이 묻자 주예린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예쁜 여제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든지…….”
“하하하. 우리 와이프께서 박 선생 별명을 모르시는구나.”
“별명이 또 있었어? 뭔데?”
“박 내관.”
내관은 내시를 뜻한다.
그래서 두 여자들이 꺄르르 웃었다. 민우는 그런 별명이 돌고 있는지 몰랐다. 학생들이 장난삼아 퍼트린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적절한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민우가 그런 쪽으로는 철저하니까. 여학생들하고 따로 밥도 안 먹는다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건 그렇지.”
여자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국문과, 특히 대학원에는 여학생 비율이 높다. 그래서 잘못 소문이 퍼지면 난처한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그래서 민우는 애초에 선을 딱 그었다.
연구실에 상주하는 학생도 차민재를 선택한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 별명엔 다른 뜻도 있는 거 같은데요? 서지훈 선생님을 충실히 따르는 관리 같은 느낌? 사극 보면 그렇잖아요. 왕의 침소를 지키는 그런 사람.”
“맞아. 그런 것도 있지. 서지훈 선생님 말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으니까.”
“쯧. 둘째 낳기는 틀렸네. 나도 모르는 사이 고자가 되어버려서.”
“하하하하.”
민우는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커피를 직접 준비해 주었다.
얼마 전 신년회에서 세드릭의 커피 메이킹 비법을 전수받았다. 원두도 함께 선물 받았다. 그래서 평소보다도 더욱 풍부한 향을 지닌 커피가 완성되었다.
풍성해진 커피향처럼, 총장 선거에 관한 이야기도 좀 더 깊어져 갔다.
“그래도 선배가 재작년에 서지훈 선생님 도와서 총장 선거 한번 해본 보람이 있네요. 토론회 말곤 딱히 준비할 게 없잖아요?”
주예린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커피가 너무 맛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좀 들어보니 이번엔 총장 후보 등록도 별로 안 했다던데?”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설예라 선생님.”
한진섭의 정보도 의외로 들을 게 많았다. ‘새교육협의회’에서 고위직들과 함께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예라 교수는 현재 명인대 교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총장 후보자 등록 현황에 대해서도 꽤 잘 알고 있을 터라, 귀담아들을 이야기였다.
한진섭의 말이 계속되었다.
“다들 박민우라는 천재지변을 피하려는 분위기야. 하긴, 누가 감히 나서서 맞서겠어? 투표해 봐야 결과가 뻔한 일인데. 학생들도 그런데 교수들 표도 거의 민우 거 아닌가?”
“그렇죠. 울 오빠가 지난 2년간 정말 바쁘게 뛰어다녔으니까.”
“내 말이 그거야. 그 결실이 오늘에서야 완성된 거지. 이제 나무 그늘에 편하게 앉아 과실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이거지.”
원년 멤버들은 민우의 당선을 벌써부터 확정하는 분위기였다.
민우는 딱히 방심하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생각하는 차원이 달랐다. 총장 자리에 오르게 되면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고민할 뿐이다.
이번에 낙선하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을 테니까.
민우에게 가장 큰 무기는 인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젊음이었다. 30대에 명문대 총장 선거에 나간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토론회 끝나고 교수님들께 인사드리고 하면 얼추 마무리되겠어.”
“그렇지.”
사실 굳이 인사를 하러 다닐 필요는 없었다. 각 학부와 학과의 책임자들이 알아서 찾아와 인사를 하는 형국이었다.
“근데 내각은 어떻게 꾸릴지 생각해 봤냐?”
내각은 대학 행정부를 빗댄 말이었다. 한진섭의 질문에 민우는 그저 웃을 뿐 별다른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민우에겐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원칙은 조직을 젊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인사를 바탕으로 온 대학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어? 잠깐만. 이것 좀 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한진섭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화면을 확대했다.
그것은 뉴스 동영상이었다.
오른쪽 상단에 ‘LIVE’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생방송인 것 같았다.
장소는 공항이었다.
― 지금 막 무라카미 일본 총리 내외가 탑승한 전용기가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문한 무라카미 총리는 사전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합의가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는데요. 김강현 대통령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다소 상기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거대한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무라카미 총리 내외가 손을 흔드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의장대의 환영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무덤덤하게 동영상을 보는 민우의 모습을 본 한진섭이 흠칫 놀랐다.
“설마 이것도 네 작품이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일에 집중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이라는 것을.
그 정상회담을 민우가 주선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와, 진짜 어마어마하네. 기자들한테 매트릭스 드립을 친 게 허세가 아니었어!”
“내일이면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 거야.”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지금부터가 시작이지.”
여러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