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490화 (490/500)

신년회

새해가 밝았다.

민우는 동료들과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신년회를 개최했다.

보통은 민우의 집에서 하거나 정연주의 오피스텔을 빌렸을 텐데, 이제는 불가능했다. 인원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놀 만한 파티룸을 빌려야 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멤버들이 휴머니티에 가입했다. 원래는 10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정확히 두 배가 늘어 20명이 되었다.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도 모두 민우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휴머니티도 이제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가 1등이네.”

“바랄 걸 바라야지.”

그렇게 대꾸한 민우가 불을 켰다. 잘 정리된 파티룸이 한눈에 들어왔다. 윤아는 벌써 신났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바쁘다.

짐을 내려놓은 이수빈이 핸드폰을 켜서 단톡방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섭섭 오빠네는 애기 친정에 맡기고 온다고 해서 좀 늦을 거 같대요. 다른 사람들은 오고 있는 중이고요.”

“일단 준비하자. 출장뷔페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뭐 필요한 거 없죠? 연주가 사 온다는데.”

“생각나는 거 전부 사 오라고 해. 남아서 나쁠 거 없잖아?”

“알았어요.”

파티 장소에 먼저 도착한 민우와 이수빈은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히 윤아도 따라왔다. 그래서 손을 하나라도 덜 수 있었다.

곧 출장뷔페가 도착해 주변에 음식을 깔았다.

이수빈이 음식 상태를 확인하며 테이블 배치를 조정했고, 민우는 딸과 함께 벽에 장식할 것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윤아가 힘껏 풍선을 부는 모습에 민우는 잠시 아빠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차민재였다.

하버드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차민재는 출국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바로 휴머니티에 가입했다. 민우는 제자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일찍 왔네?”

“왠지 선생님들 먼저 오셔서 준비하고 계실 것 같았어요. 그 예상이 정확했네요.”

“하하하. 이제야 드디어 네가 한진섭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았구나.”

“어…… 그런 것까진 아니지만.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일단 장식부터 달자. 전구 만들어 왔는데 종이에 그려진 모양대로 벽에 걸면 될 거야.”

“넵.”

손이 하나 느니 준비는 금방이었다.

민우와 차민재, 그리고 윤아까지 힘을 모아 신년회가 열릴 내부를 꾸몄다. 풍선과 꽃이 적절히 어울려 파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제 됐다.”

“와! 멋있다!”

“그럼 전원 연결해볼까?”

“웅!”

차민재가 전구줄의 전원을 연결하자 벽에 그림 같은 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좀 지나긴 했지만, 윤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마침 그때 다음 손님이 도착했다. 그들도 이번에 새로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명인대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외국인 교수들이었다. 타치카와를 비롯해 세드릭, 미셸, 셀린느가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늦은 건 아니죠?」

「딱 좋아요. 지금 막 준비 끝났거든요.」

「오늘 자리에 어울릴 만한 좋은 와인을 구해왔어요. 세드릭 씨는 뭔가 잔뜩 챙겨왔지만.」

셀린느의 말에 민우가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은 세드릭은 집에서 챙겨 온 커피 추출 도구를 세팅하고 있었다. 구수한 커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세드릭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주 끝내주게 로스팅한 원두를 챙겨 왔네.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군. 오늘 내 커피를 마시면 이제 다른 커피는 입에 대지 못할 거야.」

「하하하. 조심해야겠네요.」

민우는 유쾌하게 웃었고, 미셸은 못 말린다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그때 타치카와 교수가 가까이 다가와 민우와 악수했다.

「이런 멋진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치카와는 정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 구성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순항 중이다.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국 학자들은 공정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음엔 가족들도 데려와도 될까요?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좋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네요.」

정중히 인사한 타치카와가 물러났다.

그때 다음 손님이 입장했다.

그런데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세드릭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천재 수학자가 대뜸 손님과 포옹하더니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스터 한! 당신의 팬이오.」

「누, 누구신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당신의 영화, 아주 환상적이었지. 칸 영화제의 주인공이 될 만했소!」

세드릭이 열을 올리며 한정현 감독을 맞았다.

그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 <방랑자들>은 각종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을 받았고, 한정현은 이제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거기다 <프로페서> 시즌 2도 호평 속에 종영되었다.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이제 시즌 3 촬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그런 그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 이제 좀 새로운 영화를 찍어보고 싶습니다. 영화라고 해서 필름에 꼭 남겨야 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이제 제 인생을 필름 삼아 새로운 걸 찍어보고 싶네요. 하하하. 너무 건방진가요?

그래서 휴머니티에 가입했다. 민우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민우는 한정현 감독에게 다가가 세드릭을 간단히 소개했고, 서로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정현 감독은 아직 프랑스어에 서툴렀는데 다행히 셀린느가 통역으로 나서서 팬미팅이 성사되었다.

그때 또 다른 신입 회원이 기존 회원과 함께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실장님.”

유진태 실장이었다. 그리고 수수하지만 예쁘게 꾸민 정연주가 그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유진태 실장의 손엔 커다란 봉지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안에는 간식으로 먹을 만한 것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실장님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색다르고 좋은데요?”

민우가 간식 봉지를 받으며 말했다. 유진태가 멋쩍게 웃었다.

“대단한 분들만 모이신 곳인데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뇨. 여기에서 제일 대단한 분은 실장님이죠.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미인을 얻으셨는데. 이제 다음엔 식장에서 뵈어야죠? 국수 먹고 싶습니다.”

“커, 커흠!”

유진태 실장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민우는 이제 유진태 실장을 놀리는 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사실 유진태는 자발적으로 모임에 들어온 게 아니다.

정연주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진태는 정연주의 비서로 일하며 휴머니티에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하곤 했다. 특히 캠퍼스를 세울 때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유진태도 휴머니티 멤버로 들어올 자격은 충분했다.

“별일 없지?”

“이젠 없어요. 주변도 이제 좀 조용해진 것 같고요.”

정연주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작년 말, 정연주는 유진태 실장과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실로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모든 관심이 대한그룹으로 쏠렸고, 두 사람의 이름이 연일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렸다. 온갖 루머가 두 사람을 괴롭혔다.

하지만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애초에 정연주가 대한그룹의 승계권과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업을 잇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최근엔 청문대를 맡아 교육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한그룹에서는 정연주의 귀여운 일탈을 용인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유진태 실장은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그건 누군가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 민우는 두 사람을 묵묵히 응원하고 있었다.

이어서 기존 멤버들도 모두 도착했다.

이수빈이 물었다.

“아직 몇 명이나 안 왔어요?”

“세 명. 다들 정시에 못 오는 사람들이니 기다려야지.”

“오빠도 와서 좀 먹어요.”

“애들 다 오면.”

이미 안에서는 파티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세드릭의 커피를 마시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서들 와.”

새롭게 멤버가 된 이소윤과 양지모가 나타났다. 밖이 제법 추웠는지 코가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둘이 오프 맞추느라 힘들었겠네.”

“말도 마세요. 그나마 이번엔 피자랑 햄버거로 끝나서 다행이지 다음엔 어림도 없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선방했네 뭐.”

“오! 드디어 왔구나. 신혼 중에 어렵게 시간 냈는데 이런 곳에서 놀아도 되겠어? 좀 더 으슥한 곳으로 가야지. 큭큭큭.”

갑자기 불쑥 끼어든 한진섭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서강일이 맞장구쳤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두 분이나 계시니까 오늘 죽어라 마셔도 괜찮겠는데? 적어도 객사하진 않을 거 아냐.”

“그렇지! 이 선생. 혹시 숙취에 좋은 약 같은 거 없어? 오늘은 정말 볼짱 다 볼 생각이라.”

“적당히 좀 해! 이 철없는 휴먼들아. 언제 철들래?”

주예린의 일침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세상에!」

민우가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인물이 감탄사와 함께 나타났다.

잠시 경계한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이봐 친구. 요즘 월급 밀리기라도 한 거야? 이런 누추한 곳에서 파티라니……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상의라도 하지 그랬어?」

마지막으로 자리를 빛낸 것은 자얀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민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 * *

준비한 음식은 금방 동났다.

하지만 멤버들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서로 안면을 익히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혀 접점이 없는 모임이었다. 각자 몸담은 분야도 다르고, 관심사도 달랐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존재가 중심을 잡고 있었다.

바로 민우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5년 뒤, 혹은 10년 뒤면 또 여기서 얼마나 수가 늘어날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

민우의 한마디에 모두가 대화를 뚝 멈췄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민우 쪽으로 다가왔다.

“신년이니까 우리 학장님께서 한 말씀 하셔야죠? 새로 온 손님들도 계신데.”

“현직 학장은 그다음 순서죠. 설립자가 가장 먼저 해야 이치에 맞는 거 아닙니까?”

“옳소!”

“그게 정답이네.”

서강일의 말이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가 먼저 소감을 밝혔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어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총장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실패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직 저는 서른여덟일 뿐이고,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쫄린 모양인데?”

“그러게. 광탈할까 봐 걱정되나 봐.”

서강일과 한진섭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죽이 잘 맞게 된 두 사람이었다.

그때 정연주에게 영어로 통역 받은 자얀이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만약 네가 낙선하면 명인대를 통째로 사버릴 테니까!」

한국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모두가 통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 분위기가 진정되고, 한진섭이 잔을 들었다.

“자자, 건배합시다. 우리 박 선생의 건승을 위하여!”

“힘내세요!”

“아빠 파이팅!”

주스가 담긴 잔을 든 윤아도 건배 대열에 합류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멤버들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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