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열다 (5)
모든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민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함께 귀국한 것은 아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향해 당당히 걷는 일행 중 보이지 않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바로 정연주와 유진태였다.
정연주는 따로 스케줄이 있어 일주일 후에나 들어갈 것 같다고 전해왔다. 민우는 굳이 무슨 스케줄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둘의 행복한 미래를 응원해 줄 뿐이다.
「참 꿈만 같은 일정이었습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타치카와 교수가 그렇게 소감을 밝혔다. 민우는 웃으며 긍정했다.
「일이 잘 풀리려니 싶었는데,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저도 몰랐네요.」
「정말 최고의 성과 아닙니까? 이 소식을 들으면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아마 밖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때 소감을 말씀해주시면 되겠네요.」
「박 선생이 아니라 제가요?」
「그게 좀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서요. 어쨌든 지금 ‘독도연구소’ 소장은 선생이잖습니까?」
민우는 타치카와에게 공을 양보했다. 그 배려가 고마웠던 타치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만큼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역시 박 선생께서 발표해 주셔야죠.」
「괜찮습니다. 선생께서 하세요.」
「아뇨. 전 절대 안 합니다.」
의외로 타치카와가 강경하게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와도 단순히 글자로 지식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의 인생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된 이다.
민우에겐 국가 간의 분쟁이 종식된 것보다 훨씬 더 짜릿한 일이었다.
‘정말 바다처럼 넓고 웅장한 사람이다.’
타치카와 교수는 민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농담이라면서 가볍게 흘려버릴 테니까.
그간의 결실을 돌아보며 타치카와 교수는 민우의 영향력에 다시금 감탄했다. 자신도 이제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석학이 되어가고 있는데, 민우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확신하게 된 한마디가 지금 막 민우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저는 이번 일이 시미즈 선생은 물론, 타치카와 선생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타치카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다. 민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선생께서 어렵게 한국행을 택하시고, 또 시미즈 선생이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다면 제 말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합의안의 공로는 두 선생께서 가져가시는 게 맞죠.」
「허허…….」
「학문적인 업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순간 용기를 낼 수 있는가. 그게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이번 일은 두 분께서 다 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너무 당돌한 말에 타치카와 교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나친 겸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민우의 말대로 귀화와 성명서라는 드라마틱한 두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을 거다.
타치카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평생이 지나고, 어쩌면 다음 생애에서도 박민우라는 거인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번 성과 발표는 타치카와 선생께서 해주세요.」
타치카와 교수는 마치 벼가 무르익는 것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행이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취재 경쟁을 벌일 것도 없었다. 이미 한쪽에는 기자회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윤지 기자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순순히 기자회견장으로 따라오라는 신호군요.”
“어머, 그렇게 보셨나요? 저희는 나름 교수님을 환영하려고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건데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문화부 복귀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교수님 덕분에 승진도 하고, 아주 꿈만 같은 시간이었답니다.”
“그럼 이제 문화부장이 된 건가요?”
“그렇죠. 문화부의 모든 일은 이제 제가 관리하게 됐어요.”
박윤지는 새롭게 나온 명함을 민우에게 건넸다.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나이에 비하면 정말 초고속 승진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엄청난 독점 기사를 따내곤 했다. 당초 민우가 김강현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대변인 생활을 시작했을 때, 경한신문에서는 박윤지 기자를 정치부로 발령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끈끈했기 때문이다.
정치부에서 박윤지는 특종을 어마어마하게 터트렸다. 민우가 도와준 것도 있지만, 그만큼 박윤지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경한신문 경영진이 매우 큰 포상을 내린 것이다.
“그럼 가 볼까요? 다들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넵.”
박윤지는 민우 일행을 인터뷰장으로 안내했다. 기자들은 질서를 유지했다.
일본의 매스컴이 반면교사가 되었다.
원래는 취재 경쟁 때문에 무질서한 경향이 많았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일본처럼은 하지 말자’는 말이 캐치프레이즈처럼 퍼져 모두가 질서를 잘 지켰다.
민우와 동료들이 자리에 앉았고, 마이크가 넘어왔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입국할 때마다 이렇게 기자분들께서 환영회를 열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몇몇 기자들이 반갑게 웃었다. 민우는 학생들에게만 인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기자들도 많았다.
“오늘 전체적인 브리핑은 제가 아니라 옆에 계신, 독도연구소 소장인 타치카와 선생께서 해주실 겁니다. 우선 간략하게 들으신 뒤에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질문을 해주시죠.”
말을 끊은 민우는 마이크를 타치카와 교수에게 넘겼다. 다소 긴장한 그가 서두를 시작했다.
「이번 일본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안건이 결의되었습니다. 첫째, 일본 전문가로 구성된 민간 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가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인 그곳에서는 과거 일본 제국의 만행은 물론, 최근의 영토 분쟁을 비롯한 각종 역사 왜곡 등 한일간의 외교적 마찰에 대해 폭넓게 연구할 예정입니다.」
민우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즉시 통역해 주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민간단체, 그것도 과거사를 조사하기 위해 현역 일본 지식인들이 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 학술 및 문화 교류를 지금보다 더 증대시키는 것으로 합의하였습니다. 분기별로 한 번씩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식인들이 교류하는 행사가 열릴 것이며,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그리고 일본의 문부과학성 당국자들이 협의하여 정례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이 또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민우의 통역을 받아적는 기자들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그럼 질문을 받겠습니다.」
무수히 많은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타치카와 교수가 잘 고르지 못하고 있자 민우가 대신 골라주었다.
타치카와 교수는 아예 마이크까지 넘겼다. 양보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민우는 마이크를 사양하지 않았다.
“천지신문 강유태 기자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어떤 형식으로 발족된 건지 궁금한데요. 참여하는 일본 전문가들은 현직 교수들입니까? 이름 없는 재야 학자들로 구성해 면피성 단체를 구성하려는 게 아닌지 궁금한데요.”
“시미즈 교수님이 계신 곳이 이름 없는 대학이라면 말씀하신 부분이 맞을 겁니다.”
민우의 너스레에 기자들이 웃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 성명서를 발표하신 분은 시미즈 교수입니다. 그분이 주축이 되어 일본 명문대는 물론, 각종 연구소에서 연구 업적이 뛰어난 분들이 이번 협회에 참여했습니다. 전문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어서 다른 기자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이번 위원회는 일본인 학자들만 참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와 타치카와 선생을 비롯해 명인대의 독도 연구소에 속한 연구원들이 특별자문위원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편파적인 결과물보다는 균형 잡힌 결과물을 원합니다.”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그리고 일본의 문부과학성 당국자들이 협의할 것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시기는 언제입니까?”
“아직 발표가 안 났나요? 이건 딱히 엠바고 걸린 게 없는데.”
그와 동시에 기자들이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민우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타치카와 교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하나 있긴 합니다.”
민우의 말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말할까 말까, 살짝 고민하던 민우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좀 묵혀놨다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영화 <매트릭스>의 그 유명한 카피 아시죠?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그 이상을 보시게 될 거라고 약속드립니다.”
“지금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힌트라도 주십시오!”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뿐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 * *
역시나 민우가 바로 돌아온 것은 집이 아니라 연구실이었다. 보직도 없고 강의도 없는 그였지만 봐야 할 서류들이 많았다.
민우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수많은 학생들이 논문 지도교수 제청서를 올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봐주고 싶지만.’
학과 내규상 봐줄 수 있는 학생 수에 제한이 있었다. 만약 제한이 없다면 모든 학생들이 민우를 지도교수로 제청할 테니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민우가 깜짝 놀랐다.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귀여운 딸이 소파에 앉아 책에 몰두하고 있었고, 이수빈은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누르고 있다.
“왔어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집이 아니라 연구실로 올 게 너무 뻔해서 기다리고 있었지.”
“미안.”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윤아 옆으로 다가갔다. 윤아는 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아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것도 그런데, 윤아가 오빠 연구실에 가고 싶다고 떼써서요.”
“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나 뭐라나. 이제 집에 있는 책은 다 읽었대요. 서고를 바꾸든지, 아니면 도서관 출입증이라도 내줘야 할 판이에요.”
생각보다 습득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도 루카치의 유물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그 힘에 빠져있을 무렵 윤아를 낳게 된 것이니까.
부부는 잠시 윤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보고 있으면 딱 오빠 빼닮지 않았어요?”
“그러게.”
“그럴 땐 방해하지 말아요. 우리도 오빠 방해 안 했잖아.”
“알아.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되지.”
민우는 윤아가 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민우가 다가오자 이수빈이 어깨를 꾸욱 주물러 주었다.
“고생 많았어요. 일본에서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요?”
“있었지.”
“오, 뭔데?”
“연주하고 유 실장님. 진지하게 만나는 것 같더라. 같이 입국 안 했어. 둘이 좀 더 있다가 온다고 하더라고.”
“헐?”
이수빈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민우도 그렇고 이수빈도 그 두 사람이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잘됐네요! 앞으로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잘 해내겠죠?”
“그럴 거야. 우리는 그냥 응원만 해주면 돼.”
“이 사실 또 누가 알아요?”
“나랑 당신만.”
“아빠!”
그때 윤아가 책을 내려놓고 민우에게 달려왔다. 민우는 윤아를 꼭 안아 주었다.
“아빠 언제 왔어?”
“아까 왔지.”
민우는 윤아가 내려놓은 책을 바라보았다. 윤아가 읽던 것은 공교롭게도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다.
학부 시절에 여러 번 좌절을 겪을 정도로 난해한 책이었는데 일곱 살배기 딸이 읽고 있다니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내용을 이해했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어.’
자신을 바라보는 윤아의 두 눈에서,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푸른빛이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